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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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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스크랩 야성정씨 영양 가곡동월잠고택 이야기
혜명 추천 0 조회 24 13.12.03 21: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영양 가곡동 월잠고택(月岑古宅)
소 재 지 :  영양군 일월면 가곡리 407번지
건 축 주 :  정상추(鄭象樞, 1759~1834)
건축시기 :  1778년(정조2)
소 유 자 :  정동춘(鄭東春)
문 화 재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95호


건축 이야기
월잠(月岑) 정유석(鄭惟碩, 1634~1714)은 영해면 인량리에서 태어나 효종 때에 영양군 일월면 가곡리로 입향하였다. 그 뒤 가곡리에 정착하여 1778년(정조2)에 그의 5대손 정상추(鄭象樞, 1759~1834)가 건축한 것을 방계인 현소유자 5대조가 매입하였다고 한다. 1987년 12월 29일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95호로 지정되었다.


건축 특징
정침(正寢)의 축대는 자연석을 쌓았으며, 자연석 초석 위에 각주(角柱)를 세웠다. 안채와 사랑채의 대청에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상부가구(上部架構)는 3량가로 되어있다. 특히 안채의 하부에는 뜬 창방처럼 보를 하나 더 내었으며 들보를 보강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 집에는 원래 안방, 웃방, 웃고방에 각각 꽃굴(코쿨, cocool)이 있었으나 지금은 웃고방에만 그 잔형이 남아있다.


건축 구성
정침(正寢)은 정면 4칸, 측면 5칸의 박공기와지붕이다. 정면 4칸 중 우측에서 둘째 칸이 중문칸으로 내정(內庭)과 통하게 하였으며, 이 중문칸의 우측에는 고방이 놓여있고 좌측에는 사랑방과 건물단에 사랑마루방이 배치되어 있으며, 사랑 마루방 뒤쪽에 폭이 좁은 빈소방을 곁들여 한 무리의 사랑채 부분을 구성하였다. 안채의 중심은 반듯한 내정 쪽 전체를 차지한 전면이 개방된 2칸 대청이며, 우측에 웃방이 배치되어 건물의 모서리를 이루었고 그 앞으로 웃고방과 중방이 차례로 배설되어 사랑채에 붙어있는 빈소방과 반 칸 넓이의 통칸으로 연결되어 있다.
대문칸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합각지붕으로 되어있다. 대문칸의 양측에 행랑방 한 칸과 마구가 한 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방앗간채는 단칸으로 박공지붕으로 되어있다.

 

문중 이야기
- 야성정씨, 가문의 번영
야성정씨(野城鄭氏)의 시조 정가후(鄭可侯)는 고려 희종 때 대사도(大司徒)가 되었으며, 일본을 정벌할 때 많은 공을 세웠으므로 야성군에 봉해졌다. 그러므로 후손들은 본관을 야성으로 하였다. 야성은 경상북도 영덕의 옛 이름이다. 야성정씨의 집성촌은 경상북도 영양군 도곡동,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가곡동, 경북 청송군 부남면 감연동에 분포되어 있다.
고려 때 정교(鄭交)는 이부상서를 지냈으며, 정언국(鄭彦國)은 교위, 정당유(鄭唐裕)와 정자피(鄭自皮)는 중랑장, 정송(鄭松)은 문하시중 야성백(野城伯)에 봉해졌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정을현(鄭乙賢)은 군수를 지냈고, 정태진은 낭장(郞將), 정득화(鄭得和)는 현감을 역임하였다. 또한 정자함(鄭自咸)은 판관, 정창국(鄭昌國)은 부사과가 되었다.
정담(鄭湛, 1548~1592)은 자가 언결(彦潔), 호는 일헌(逸軒)이다. 경서에 통달하였고 병서를 습득하였다. 1571년(선조4) 24세 때 신립 장군의 휘하에서 돌격장이 되었고, 1589년(선조22) 무과에 급제하여 도호부판관이 되었으며, 1591년(선조24) 청주목사, 1592년(선조25) 김제군수, 같은 해 4월 13일 왜적과 싸워 전사를 하였다. 1593년(선조26)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순조 때 장렬공(壯烈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정승립(鄭承立, 1582~1676)은 자가 효중(孝仲)이다. 임진왜란의 공신 정담의 둘째 아들로 영해에서 태어났으나, 만년에 영양으로 이주하였다. 무과에 급제하고 사정원 어모장군 행용양위 부호군(司正院禦侮將軍行龍?衛副護軍)에 제수되었다. 만년에 세상을 피해 산수를 즐겨 영양으로 옮겨 살았다.

관련인물
- 정유석(鄭惟碩, 1634~1714)
자는 덕경(德卿), 호는 월잠(月岑)이고, 본관은 야성(野城)이다. 영해읍 인량리에서 태어났다. 효종 때 영양군 일월면 가곡리로 입향하였다. 1736년(숙종13) 통정대부에 추증되었다.
- 정영식(鄭英植)
자는 고술(故述), 호는 청산(聽山)이고, 본관은 야성(野城)이다. 명암(明庵) 정홍규(鄭鴻逵)의 증손이다. 문예로서 향리에 명성이 있었다.
- 정홍규(鄭鴻逵, 1804~1870)
자는 사점(士漸), 호는 명암(明庵)이고, 본관은 야성(野城)이다. 정지묵(鄭持墨)의 아들로 일월면 가곡동에서 출생하였다. 선비다운 풍모와 온순하고 문예를 겸비하였다.
- 정지묵(鄭持墨, 1781~1820)
자는 군경(君敬), 호는 의재(毅齋)이고, 본관은 야성(野城)이다. 성정과 행실이 온아하고 문학에 통달하였으니 향리에서 모두 칭송하였다.
- 정상추(鄭象樞, 1759~1834)
자는 중거(重居), 호는 우와(愚窩)이고, 본관은 야성(野城)이다. 어려서부터
덕이 뛰어나고 풍채와 거동이 뛰어났다. 만곡(晩谷) 조술도(趙述道, 1729∼1803)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학행으로 향리에서 명성이 있었다.
- 정시묵(鄭時墨, 1782~1861)
자는 군양(君養), 호는 효재(曉齋)이고, 본관은 야성(野城)이다. 정상추(鄭象樞)의 아들로 일월면 가곡동에서 출생하였다. 성정과 행실이 준엄하여 향리에서 모두 경탄하였다.
- 정붕규(鄭鵬逵, 1806~1875)
자는 사원(士遠), 호는 우포(寓浦)이고, 본관은 야성(野城)이다. 정시묵(鄭時墨)의 아들로 일월면 가곡동에서 출생하였다. 도량이 넓고 풍류가 있어 사우들이 추중하였다. 월록서당별소(月麓書堂別所)를 창건하였다.
- 정덕현(鄭德鉉, 1840~1896)
자는 성후(聖厚), 호는 매포(梅圃)이고, 본관은 야성(野城)이다. 임진왜란의 공신 정담(鄭湛, 1548~1592)의 11대손으로 일월면 가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서와 역학을 통독하여 문장이 탁월했으며, 문학과 행의가 행리에서 저명하였다.
- 정윤영(鄭胤永, 1868~1938)
자는 경조(景祚), 호는 괴음당(槐陰堂)이고, 본관은 야성(野城)이다. 임진왜란의 충신 정담의 12대 종손이며 정덕현의 아들이다. 과거에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향리에서 후진양성에 힘썼다. 그의 문하생들이 주관하여 김일대(金日大)가 비문을 짓고 배승환(裵昇煥)이 글씨를 쓴 묘비가 있다.

 

영양 > 일월수비권 > 일월면 가곡리
- 조선 숙종 때에는 영양군이 없어지게 되어 영해군 덕봉면(德峯面)으로 불러 오다가 숙종 병진년에 다시 영양현이 되었을 때 북이면(北二面), 북초면(北初面)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1914년 행정 구역을 고칠 때에 이르러서 북이면의 전부와 북초면의 일부를 합하고 일월산의 이름을 따다가 일월면으로 부르게 되었다.
일월면은 기후를 보면 대륙성으로 낮과 밤의 일교차가 커서 기온이 고르지 않다. 겨울이 길고 해가 비치는 일조시간이 비교적 짧고 강우량이 적은 편이다. 10월 초가 되면 벌써 서리가 내리며 다음 해 4월까지는 서리가 여전하게 내린다. 평야는 주로 남쪽에 있으며, 특용작물이 많으며 고추는 대표적인 영양의 특산품이다. 음력 3월까지 눈 속에서 자란다는 금죽은 일월산 산채의 특산으로 옛날 임금의 수라상에까지 올랐다고 한다.
일월면의 길은 골짜기를 따라서 동부와 서부로 나 있다. 도계리에는 영양 향교가 있고, 가곡리 가마실 마을에는 장렬공 사당이 있고, 도곡리 웃가마실에는 1868년에 헐린 명고서원 터에 명고서당이 있으며, 주곡리에는 월록서당이 있다.
일월면 자연 부락 가운데 가곡리에 대한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가곡리는 청기면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데, 마을의 경치가 아름다워 가곡(佳谷)이라 하였다. 특산물로 숫돌과 고추, 담배를 들 수 있다. 본래 영양군 북이면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을 고칠 때 점곡과 가마실?법곡동의 일부를 합하고 가마실과 점곡의 마을 이름에서 글자를 따다가 가곡이라 하여 일월면에 들게 된다.
가마실?가곡(佳谷)?부곡(釜谷)은 마을의 경치가 아름다워 가곡이라 불렀으며 혹은 가마실이라고 불렀다. 이 마을에는 안?과 뒷?이 있는데 안?은 굿?이라고도 하고 구릉향촌이라고도 했다. 뒷?은 두들?이라 했으며 가마솥 형국의 마을이 있다. 오늘날의 주곡?가곡?도곡 세 마을로 이어진 것을 통틀어 삼부곡(三釜谷)이라고 하였다. 뒷?에는 가마솥 형국의 야성정씨(野城鄭氏) 월잠고택(月岑古宅)이 있다. 고택 앞쪽 부엌 아궁이처럼 생긴 곳에 못을 막았더니 상서롭지 못한 일들이 자주 생겨 걱정하였는데, 저절로 못둑이 허물어지고 옛길이 드러나 오늘에 이르렀다.
금마래골?금마라골?문종곡(文宗谷)?금곡(金谷)?금계곡(金鷄谷)은 옛날 글 잘하는 사람이 있어서 문종곡이라 하였는데, 발음이 변하여 금마래골이라 불리운다. 또 마을 앞산의 모양이 금계포란형이라 하여 금계골이라고도 불리고, 앞산에 금이 매장되어 있어 금곡이라고도 부른다. 1935년 일본인이 금광을 개발 운영하기도 했다. 금마라골은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그 뒤 발음이 바뀌어 금마래골이라 부른 듯하다. 문종곡은 1700년경에 야성정씨 종택이 영해로부터 이 마을에 입향한 이후 대대로 글 잘하는 선비들이 끊이지 않았는데, 글 잘하는 종택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문두들?문양촌(文陽村)은 옛날 이곳에 글방이 있어 한문을 많이 공부하여 글 잘하는 사람이 많이 배출되어 마을을 빛냈다고 하여 문양 또는 문두들이라 부르고 있다. 한편 마을이 물의 북쪽에 생겼다고 해서 양(陽)이 붙은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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