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종지도의 제창자 반소(班昭)
"중국여사학제일인(中国女史学家第一人)
반소(班昭)는 중국 “이십사사(二十四史)” 저자 중에서 유일한 여성이다.
남송의 시인 서균(徐钧)은 "부녀 중에 누가 당신처럼 현명하고,
문장과 품행의 아름다움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有妇谁能似尔贤, 文章操行美俱全.)"라고 하였으며,
청나라의 강유위(康有爲)는 "중국여사학제일인(中国女史学家第一人)"이라고 하였다
. 명청(明清)의 소설에서 여자아이가 천부적으로 총명하다는 것을 묘사할 때에
"재능이 반채에 비할만 하다(才比班蔡)”, “재주가 반좌와 같다(才同班左)”라는 말을 쓴다.
여기에 나오는 "반(班)"이 반소를 말한다.
그리고, "채(蔡)”는 동한말년의 채문희(蔡文姬)이고, "좌(左)"는 서진의 좌분(左棻)이다.
반소는 서기 45년 역사가 반표(班彪)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부친 반표는 역사 편찬에 몰두하였고, 큰오빠 반고도 이미 유명했으며, 둘째 오빠 반초는 늘 《공양춘추》를 읽고 읽었다.
문사(文史)를 함께 중시하는 가풍으로 반소는 어려서부터 귀동냥하여 공부를 했는데,
어린 나이에 비범한 재능을 보였다. 반소가 아홉 살 때에 아버지 반표가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14세에 시집을 갔는데 더욱 불행하게도 시집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 조세숙(曹世叔)도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재가를 하지 않고 자녀를 데리고 홀로 살았다.
서기 92년 큰오빠 반고가 권신 두헌(窦宪)의 모반에 연루되어 투옥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죽자
반소에게는 오빠 반고가 마무리하지 못한 미완의 《한서(漢書)》가 남아 있었다.
둘째오빠 반초는 서역으로 출사해 있었기 때문에 한화제(汉和帝)는 반소로 하여금 《한서》를 마무리하도록 하였다.
반소는 《한서》가 아버지와 큰오빠가 평생 심혈을 기울인 역작임을 잘 알았기에 오빠를 떠나보낸 슬픔을 참고 이어받았다.
그녀는 당시 황실장서각의 하나인 동관장서각(东观藏书阁)에 들어가서 황실장서를 두루 섭렵하면서 저술을 이어갔다.
그녀는 아버지와 오빠가 완성한 저술을 꼼꼼히 정리·검토하여 해 《팔표(八表)》와 《천문지(天文志)》를 보완하였다
그녀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한서》라는 대작을 완성하고서는
자신의 이름은 한자도 올리지 아니하고 그의 오빠 반고(班固)의 저작이라고 명기하였다.
반소가 《한서》의 정리와 보완작업을 한 것에서 이미 그녀는 최고의 사학자 반열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하여 강유위(康有爲)는 반소를 "중국여사학제일인(中国女史学家第一人)"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반소는 둘째오빠 반초가 늙자 그를 서역에서 낙양으로 돌아오게 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남송(是南)의 역사학자 범엽(范晔)가 쓴 《후한서(后汉书)》에는 반소가 여성으로서 오빠 반초를 돌아오게 하기 위해
예지를 발휘한 것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서기 100년 오랜 세월 서역에 머무르다가 68세가 된 반초는 고향이 그리워서 조정에 복귀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조정이 질질 끌면서 회신을 하지 않자 반소는 오빠의 염원을 이루어주기 위해 과감하게
《오빠 반초를 위해 대신 구하는 소(为兄超求代疏》를 써서 황제에게 보냈다.
"저의 동모오빠인 서역도후 정원후 반초는 다행히 보잘것없는 공로로 특별히 중상을 받아 열후의 작위를 받고
이천석의 관직에 올랐습니다.
황제의 은사는 너무나 호탕하여 참으로 작은 신하가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초가 서역에 출사할 때에 모든 것을 희생할 것을 맹세하고
, 작은 공이나마 세워서 충성을 다하고자 하였습니다
.(妾同产兄西域都护定远侯超, 幸得以微功特蒙重赏, 爵列通侯, 位二千石.
天恩殊绝, 诚非小臣所当被蒙. 超之始出. 志捐躯命. 冀立微功, 以自陈效.)"로
시작되는 상소문은 문장이 너무나 수려하였고 구구절절이 읽는 사람의 폐부를 찔러
깊이 감동한 한화제(汉和帝)는 마침내 반초의 귀환을 허락하였다.
반소는 《한서》의 훌륭하게 편찬한 것으로 인해 한화제(漢和帝)의 부름을 받아 후비들의 스승이 되었고,
이로 인해 아직 황후가 되지 못하고 있던 후비(后妃) 등수(邓绥)와 나이를 잊은 절친인 “망년규밀(忘年闺蜜)”이 되었다.
이후 등수는 서기 102년에 한화제의 새 황후가 되었다.
4년 후에 한화제가 일찍이 죽었는데, 새로 즉위한 한상제(汉殤帝) 유륭(刘隆)은 태어난 지 백일 밖에 되지 않은 아기였다.
그리하여 등수가 태후가 되어 수렴청정을 하였다.
그리하여 반소는 막후에서 등후가 정무를 처리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도왔다.
반소의 도움을 받은 등수 태후는 호랑이 등에 날개를 단 격이 되어 처음부터 조정을 법도 있게 장악하여
신하와 백성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절친 반소가 탁월한 식견으로 자신의 섭정을 훌륭하게 보좌하자
등태후는 반소의 아들 조성(曹成)을 후(侯)를 봉했고, 후에 관직이 승상에 이르렀다.
반소가 등태후의 유능한 "고참(高参)" 즉, 고급참모로서 있으면서 등태후가 국정을 잘 이끌어가자
그녀의 뒤에서 반소의 참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녀를 "규밀간정(闺蜜干政)", 즉 측근이 국정을 농단한다고 탄핵하는 사람이 없었고
오히려 반소를 높이 평가했다.
반소는 막후에서 "규밀간정"을 하면서 정치적으로 큰 역할을 하였지만
역사학자와 문학가로서의 명성이 더욱 컸기 때문에 정치가로서의
그녀의 신분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겨지고 있다.
반소는 문학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한번은 반소의 둘째오빠인 반초가 서역에서 아주 아름다운 참새 한 마리를 한나라 조정에 보내왔는데,
반소는 궁으로 초대되어 그 자리에서 《대작부(大雀赋)》 한 편을 썼다
. 만년에 자신의 아들을 따라 진류(陈留)로 가게 된 반소는 가는 길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였는데,
이것이 후대에 천 년 동안 불리어지고 있는《동정부(东征赋)》이다.
만년의 반소는 집안에 시집가야할 딸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부녀의 예절을 제대로 몰라 장차 시댁의 체면을 구기고 가문을 욕되게 할까봐 걱정되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비약(卑弱)》,《부부(夫妇)》,《경순(敬顺)》,《부행(妇行)》, 《전심(专心)》, 《곡종(曲从)》,
《화숙매(和叔妹)》일곱 장으로 된《여계(女诫)》를 지어 권면하였다.
《여계》는 여자가 시집간 뒤 처리해야 할 세 가지 관계,
즉 남편에 대한 경순, 시부모에 대한 곡종과 형제들과의 화순을 다루고 있다.
여성이 갖추어야 할 네가지 행실로 부덕(妇德), 부언(妇言), 부용(妇容), 부공(妇功)을 제시하는데,
이것이 "사덕지의(四德之仪)"이다.
그리고, 여성은 시집가기 전에는 아버지를 따르고(未嫁从父),
시집가면 남편을 따르며(出嫁从夫), 남편이 죽으면 자식을 따라야 한다(夫死从子)고 하였다.
반소에 의해 그 유명한 "삼종지도(三从之道)"가 생겨났던 것이다.
이후 "삼종지도"와 "사덕지의"는 중국 여성의 결혼생활 기준이자 도덕준칙이 되었다.
《여계》는 반씨 집안의 집안의 딸들을 가르치고자 했던는 사설 교과서인데,
뜻밖에도 경성의 권문세가들이 다투어 필사하여 중국 고대 여인의 일상 행동규범이 되었다.
남송의 시인 서균(徐钧)은 "여계는 사람들 사이에서 저절로 전해졌다(女戒人间自可传)"라고 하고 있다.
이후《여계》는 선비 문중에서 여성을 교육하는 필수 교과서가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이것이 중국 여성들의 사상과 자유를 크게 구속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리하여 반소는 "중국여훈지조(中国女训之祖)", 즉 중국여성을 훈계하는 시조가 되었다.
어찌 보면 전통봉건시대에 여성을 올가매었던 것이 남성인 공자가 아니라 같은 여성인 반소였다고도 할 수 있겠다.
《여계》에 대해서는 후세에 그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린다.
먼저《여계》를 지은 반소를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주창자로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실제로 반소는《여계》에서 남존여비 사상을 바탕으로 여성의 순종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여계》를 통해 반소는 여인들에게 남편의 형제자매와 사이좋게 지내라고 조언하고 있으며,
글의 행간에는 딸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하다는 견해도 있다.
당시 최고의 경학자이던 마융(马融)은 《여계》를 읽은 후 매우 좋다고 하면서
자기 부인과 딸로 하여금 공부하도록 하였다.
반면에 반소의 남편이던 조세숙의 여동생 조풍생(豊曹生)은 《여계》를 읽고나서 동의하지 않고 반박하는 글을 썼는데,
그녀의 문체 또한 대단했다고 한다.
참고로, 중국 여성 교육의 4대서인 "여사서(女四书)"에는
《여계》외에《내훈(内训)》, 《여논어(女论语)》, 《여범첩록(女范捷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