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고행주의, 중도 수행>
붓다를 이루기 전의 고타마 싯다르타는, 샤카(석가)라는 한 종족의 족장의 아들이었습니다. 경전에서는
당당한 왕자로 표현합니다. 여러 사료들을 참고하고 경전의 내용들을 소박하게 해석해도, 고타마
싯다르타가 보통 사람보다 여러 면에서 뛰어난 것은 사실이라 여겨 집니다. 삶의 근본적 문제를 스스로
찾아내어 집요하게 사유를 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이런 창조적 ‘기질’이 당시에 만연하고 있는 고행주의를 과감히 버리고 중도 수행이라는 사실상 모험이라
할 수 있는 수행으로, 오히려 인류 역사상 최고의 정신적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타고난 체력과 왕자로서의 철저한 교육 또한 고타마 싯다르타가 자신감과 도전의식을
갖는 데 좋은 밑거름이 되었을 것입니다.
붓다가 당시의 고행주의로써 얻을 수 있는 경지는 앞에서 언급한대로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였음은
붓다께서 누누이 언급하신 내용 입니다. 붓다는 비상비비상처에 만족하지 못하고, 고행주의에서 중도
수행〔필자주: 붓다께서 하신 수행법이 남방불교에서는 위빠사나, 북방불교에 서는 참선이라고 주장해서
편의상 이렇게 이름 붙여둡니다〕으로 수행 방법을‘업그레이드’ 하셨습니다.
이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1,000년 이상을 이어져 내려 온 수행의 최고 경지에 이르고 난 후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을 감히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비상비비상처라는 경지에 대해 언급을 해 보겠습니다.
기존의 설명은 삼계인 욕계·색계·무색계 중 정신작용으로만 이루어진 세계인 무색계의 공처空處·
식처識處·무소유처無所有處·비 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등 무색계無色界 사천四天의 마지막 단계라고
말 합니다.
고전적인 풀이로는 정신작용만으로 이루어진 세계임에도 아직 윤회의 적용을 받는 마지막 단계가
비상비비상처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33천 등과 더불어 아주 관념적인 세계로 느껴집니다.
제가 거의 40년 가까이 불법을 대하면서 극복하기 가장 난해한 문제가 바로 ‘관념화’된 불교 틀에서
벗어나는 일이었습니다. 붓다께서는 관념이 아닌 ‘일상’으로 법을 설하셨고 실제 ‘평상심이 불심佛心’
이라고 누구든 말은 합니다. 그러나 깨달음의 실체를 대할수록 한국 불교의 진리의 관념화는 기복불교
보다 더 고질적이고 심각한 병폐 라고 절감합니다. 이 책을 읽는 분들이 ‘너도 똑같지 않느냐’라고 하실
것 같아 제가 느낀 그대로 소박하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비상비비상처는 ‘선악 시비분별이 느껴지지 않는 경지’라고 생각 합니다. 많이 듣던 경지라서 특별할 게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언어는 같이 사용하고 있지만 내놓는 속내는 전혀 다릅니다. 선악 시비
분별이 없으니, 당연히 편안하기는 한 경지입니다. 보통 편안한 경지가 아니라 탐·진·치를 벗어난 동요
없는 편안함을 이룩한 경지입니다. 얼치기 선사들은 탐·진·치를 벗어나면 단박 깨달음이라고 말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실상은 이때부터가 법계를 아우르는 수행의 시작일 뿐입니다.
이쯤에서 다시 붓다의 심정으로 돌아와야겠습니다. 비상비비상처에 이른 붓다는 되레 그 경지에 엄청난
실망을 하게 됩니다.
왜? 붓다는 생사를 초월하고,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에 이익(자비)을 줄 수 있는 ‘능력 있는 경지’를
원했던 것이지, 자기 한 몸 편안하고 번뇌가 없어졌다고 만족하는 게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재의 우리는 불교의 이타심을 당연시하고 있지만(실행은 전혀 못하면서) 이런 붓다의
사고의 ‘점프’는, 한 세상을 창조하는 것 만큼 상상하기 어려운 도약이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붓다의
이타심은 그저 단순히 이해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류가 문명의 시대를 여는데만 수십 만년이 걸렸습니다. 붓다의 이 이타심 ‘한 생각’으로 비로소
인류에게는 명실상부한 최고등의 정신적 문명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붓다의 반 고행주의의 성공은
바로 이런 의미를 지닌 역사적 사건이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