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군은 강원도 중서부에 위치, 영동과 영서를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이다. 동부와 북부에는 1천m 이상의 고봉들이 솟아 있고 홍천강, 내촌천, 덕치천 등이 군의 가운데를 지난다. 홍천은 동학농민군 최후의 항전지이면서 일제강점기에는 만세운동도 치열하게 벌였다. 기미만세공원도 그런 숭고한 뜻을 되새겨주는 명소이다. 1919년 4월 1일 일제 탄압에 항거, 만세운동을 하다 이곳에서 순직한 8열사를 추모하기 위하여 1963년 관과민이 합동하여 팔렬각을 건립하였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팔렬각이 노후되자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모든 선열들의 뜻을 기리고자 1990년 2월 28일에 기미만세공원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군민의 성금과 독지가의 도움, 군비를 투자하여 약 5,700㎡의 부지에 기미만세상을 세우고 부대시설을 하는 등 공원을 조성했다. 8열사를 비롯한 선현들의 애국충절의 높은 뜻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이룩한 곳이다.
동창마을은 옛날, 대동미(세금으로 내는 쌀)를 수납하던 창고이며 물류의 집산지였다고 한다. 그래서 주막거리와 장터가 형성되고 번창하던 마을이었다고 추측되며. 마굿간이 필요했을 것이고, 주먹거리가 있어서 시끌벅적했을 것이다. 또 공원 한모퉁이에 서있는 공덕비를 비롯한 비석들이 서있는 것으로 보아 동창을 관리하기 위한 관가의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고, 부촌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옛 지명이 物巨里(물거리) 즉 큰 재물이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이다.
처마밑의 제비소리만 요란하다. 동창이 있었다는 현재의 농협건물을 지나 2차선 마을길을 올라가면, 대안학교인 팔렬중고 그리고 쭉가면 이 마을이 자랑하는 척야산이다. 동창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 중인 대표적인 명소로 “동창만세운동기념사업회”가 추진하는 기미만세공원 사업이다. 김덕원 의사의 후손인 기념사업회 김창묵 회장이 직접 선두에서서 자신의 자비를 들여가며 공원을 조성하였다. 전 조순국무총리를 비롯한 각계의 학계, 문인 등의 글들이 새겨져있다. 철쭉이 만개하면 척야산이 온통 불붙는 모습은 장관이다.
김덕원 의사’를 우리는 장두(掌頭) 김덕원 의사( 金德元 義士)라고 부른다. 장두(掌頭)가 무슨 뜻일까? 호(號)인줄 알았으나 호는 아니다. ‘장두’란 ‘현기영’의 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에 등장하는 장두(狀頭)와 같은 의미인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장두 김덕원 의사’는 1919년 4월3일 동창에서 기미만세운동을 주도한 항일투사다.
1876년 11월26일 물걸리에서 태어나 8세에 결혼하고 1919년 생계수단으로 마방을 차리고 ‘말강구’(곡물 중개인)를 한다. 그 후 마방을 중심으로 조선을 침략하려는 일제의 만행과 ‘을사늑약(乙巳勒約)’의 상황을 접하면서 물걸리를 중심으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만세운동을 계획한다.
45세가 되던 1919년 4월3일 물걸리, 와야리, 문현리, 장평리, 수하리, 인제 상남, 내면 방내에서 모인 3천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동창만세운동을 주도한다. 독립선언서 낭독과 대한독립만세삼창에 이어 내촌면주재소로 행진하던 중 군중의 함성에 일본헌병의 무차별 사격으로 ‘이순극(李順克)’ ‘전영균(全榮均)’ ‘이기선(李基先)’ ‘이여선(李麗先)’ ‘연의진(延義鎭)’ ‘김자희(金自喜)’ ‘전기홍(全基弘)’ ‘양도준(梁道俊)’등 팔열사가 순국하고 김덕원은 복골 은장봉으로 피신한다.
1923년 일제의 관헌에 체포-춘천 형무소에 수감 1927년 춘천 형무소에서 석방되고, 마방을 정리하여 항골 응달말로 이사하여 옥고의 여독으로 고생하다가 1942년경(?)에 숨을 거둔다.
‘척야산’은 물걸리 기미 만세공원과 함께 팔열사의 넋을 추모하고 항일 투사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동창만세운동기념사업회’에서 추진하는 사업이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 때문에 ‘물걸리’하면 ‘동창만세운동’이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마을이다. ‘물걸리’하면 어디냐고 하지만 ‘동창’하면 금방 알아듣는다. ‘동창’이 있었던 자리는 지금 ‘농협비료창고’ 터다.
‘동창’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중기 이후 사창(司倉) 제도에서 비롯된다. 사창은 ‘대동미’를 수집 보관하는 창고다. ‘대동미(大同米)’는 조선 중기이후 ‘대동법(조선 선조41년-1608년-이원익에 의하여 실시;중앙에 선혜청을 두었다)’에 의하여 공물(貢物-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는 것)을 미곡(쌀)으로 통일하여 바치게 하던 납세 미곡을 말한다.
‘동창’이 물걸리에 들어섰던 이유는 영서 내륙의 교통 중심지였고 강을 이용한 물류 운송이 가능했다는 점이라 추정한다. 홍천군지에도 ‘홍천에는 동서남북 4방에 동창 북창 서창 남창으로 불리는 대동미 창고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동창에 서석 내촌 인제부 일부지역의 특산물과 ‘대동미’를 수집·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다. 따라서 물걸리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고 자연스럽게 장마당이 형성되고 주막거리와 마방이 들어서게 되었다. 사창을 관리하기 위하여 중앙의 관리나 현감 등의 순찰이 잦았고 이들의 행적이 많이 남게 되었다. 그래서 생겨난 게 ‘비석거리’다. 대부분 선정비나 공덕비인 비석에는 이곳에 부임을 하거나 순방한 관리들의 이름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비석거리’는 원래 지금이 팔열각 앞 길 건너편이었고 다리 건너에 마방과 주막거리가 있었다. 지금 그 흔적은 볼 수 없는데 1964년의 대홍수 때 다 쓸려 내려갔다고 하고 그나마 남은 비석들은 만세공원 뒤편에 세워져 있다.
최근에는 김덕원 의사를 비롯하여 부장두 전성열의사, 팔열사를 추모하는 기미만세공원이 새로 조성되고, 마방터, 척야산, 용호강, 남강로, 김군보 등을 공원으로 단장하고 있어 찾는 이의 발길이 많아진 곳이다. 또한 ‘동창 물리침술원’도 물걸리를 알리는데 빼놓을 수 없다.
대동여지도 홍천부분 내촌에는 ‘물거리(物巨里)’가 등재한다. 큰 재물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물걸리(物傑里)로 바뀌었다.
물걸리의 중심은 동창과 탑둔지와 주막거리이다. 동창은 대동미창고를 중심으로 팔렬중학교(대안학교)와 지금의 시장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다. 특히 주막거리에는 전영균(팔열사중 한분)의 약방 겸 글방(당시 대형태극기가 게양되었다)이 있었고 김덕원의 마방(지금 마방터 건너편)이 있었고, 4.3 동창만세 운동 거사계획을 밀고한 ‘김홍이(당시 이장)’가 술을 먹었던 ‘김달홍의 주막’과 ‘김도명의 술집’도 주막거리를 이루는 장마당에 있었다. 장마당은 지금의 마방터 공원, 길 건너편으로 개울가에 들어섰다. 당시 시위에 모인 군중들은 비석거리와 장마당, 탑둔지, 가루개고개, 구미터까지 꽉 메웠다고 한다. <일부는 시인 허림의 글을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