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자 요한
탄생>
세례자 요한은 유다 임금 헤로데 대왕 시대 기원전 1세기 말 팔레스타인 유다 산악지방에서 태어났다. 예수보다 6개월 정도 빠른 탄생이다. 이름은 그리스식으로 요한이다. 직업을 대표적으로 예언자 세례자이다. 아버지는 레위 지파 사제 계급인 즈카르야와 어머니 엘리사벳 사이에 태어났다. 루카 복음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활동이 하느님의 계시에 의한 것으로, 두 사람의 운명이 불가분 얽혀진 것을 암시하고 있으며, 그 기록도 ‘잉태-탄생-성장-활동’을 대구법對句法 형식으로 전개한다.
요한과 예수님이 친척 간이라고 하지만 요한의 레위 지파, 예수님은 유다 지파로 지파 중심으로 살아가는 생활 양식상 가까운 친척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요한은 공적 활동 전개 중 예수님에 대해 ‘알지 못한다’(요한 1,31)라고 말하였다. 또한 자신의 체포 전후, 예수께서 세례 운동으로 명성이 자자 하자(요한 3,26) 자기 제자들을 파견하여 메시아인지 묻기도 하였다. ( 루카 7, 20) 예수는 자신이 행한 활동들을 언급하며 "나를 의심하지 않는 자는 행복하다."라고 답변한다.
유다 사회 관습상 자동 사제직을 계승하여 특권층으로 보장된 삶을 살 수 있었으나, 사회적 관습을 절연하고 구세주 예수그리스도 예언자로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다. 또한 세례 운동의 선구자로 당대 엄청난 사회적 종교적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마태 3,14) 예수는 무죄하신 분인데 왜 요한을 찾아와 세례를 받았을까? 많은 성서학자들은 예수가 세례운동에 손수 동참함으로써 요한이 시작한 세례운동의 진면목을 상승시키고,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마태오 버전으로 말하면, ‘하느님의 의로움을 이루기 위함’이다. 아무튼 예수는 요한과 그의 세례운동을 지지함으로써, 기득권 세력인 성전관계자들의 경제적*종교적 권력과 탐욕에 근절을 용인하려는 것이다.
활동>
백성 앞에 나타나 활동할 때까지 유다 광야에서 살았다. 요한이 활동을 시작한 때는 로마황제 티베리우스 통치 15년인 기원후 29년경으로 추정할수 있다.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는데, 이것은 구약성경시대 가장 영향력있었던 엘리야 예언자의 차림새이다(2열왕 1,8) 그는 메뚜기와 야생 들 꿀을 먹고 살았는데 이것은 전형적 유목민 생활양식이다. 후에 세례 운동을 전개하면서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단식 등 고행과 금욕주의적 삶을 살아, ‘마귀 들린 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반면 예수님과 제자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자주 먹고 마시자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루카 5,32; 마태 11,18-19)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들도 세례를 받기 위해 찾아왔는데 이들은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며 독설을 퍼부었다.(마태3,7) 각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와 “어떻게 살으오리까?” 라고 묻자, 두 벌 옷을 가진 자는 못 가진 이에게 나누고 먹을 것도 그렇게 할 것을,. 세리에게는 정해진 것 이상 착취하지 말 것을, 군인들에게는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봉급으로 만족하라고 한다. 설교와 가르침이 강경하고 직설적이며 단호하다. 반면 예수의 가르침은 은유와 비유적이며 행동은 자비롭고 온유하다.
세례자 요한은 30세가 되던 해부터 요르단강에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표지로 세례 운동을 선포하며 실시하였다. 그러자 예루살렘 온 유다와 요르단 부근의 사람들이 대거 몰려와 세례를 받았다. 요한의 세례 운동은 경신례 제물 준비 없이 구약의 할례,정결례,속죄를 결합한 것으로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예수 그리스도도 갈릴래아에서부터 요한을 찾아와 세례를 받았으며, 제자들과 함께 세례 운동을 일으켰다. 또한 공관복음의 시작과 마지막에서 세례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반복 강조하고 있다.
순교>
요한의 죽음 원인은 무엇일까? 헤로데 안티파스는 자기의 이복 형수 헤로디아와 결혼하기 위해 전처 나바테아의 왕국의 딸을 체포하여 투옥시켰다. 요한은 수차레 이런 왕은 비행을 직언했는데 헤로데는 요한 때문에 일종의 민중봉기 같은 일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있었고, 그 일이 있는 날에는 로마황제에게 대하여 자기의 정치생명은 끝장이 나기 때문이었다.
요한이 설교와 세례운동을 시작할 그 무렵, 많은 사람들이 에언자와 구세주 행세를 자처하며 매끄러운 글이나 설교와 활동으로 백성들의 비위를 맞추며 선동하였다. 그런데 요한은 전연 달랐다. 역사가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이 죽은 진짜 이유는 대중들에게 엄청난 인기가 반란으로 이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숙청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루카에 의하면 요한은 군중과 종교지도자 정치적 통치자 모든 부류의 사람을 대상으로 파격적인 설교와 행동을 하였는데 이것이 빌미가 된 것이다. 군중들을 향해 시민운동을 했으면 종교와 정치 통치자에게는 아부했어야 하는데, 올곧은 요한은 자신의 세례운동의 시작부터 백성-종교정치 지도자 전체의 불의를 지적하고 비판하였으니 어디에서든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것이다. 그중에 경신례 차원의 세례 운동도 들 수 있다. 문제는 요한이 세례 운동을 시작해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이 세례 운동은 기득권 사제계급의 사람들에게는 경신례 즉 속죄제사와 정결례를 전복하는 매우 위험한 도전이 되었다.
요한과 예수 시대에 이스라엘은 그리스-로마의 강력한 통치로부터 정체성을 지키고자 경신례특히 정결례를 철저히 지켰다. 이방인 외국인 건드린 물건이나 옷은 반드시 정결 예식을 통해 정화해야만 했다. 그래도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끊임없이 정결례를 강조하고 반복해야했다. 그런데 예언자 요한은 엄청난 혁명을 터트렸다. ’단 한 번만 죄를 성심껏 회개하고 고백한 뒤 세례를 받으면 그것으로 완전히 구원된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한번으로 충분하면서 결정적이다. 그리고(당시 관례상 정결례는 비공식이었기 때문에 신심 깊은 유다인들은 각자 정결례를 했던 반면) 요한은 대낮의 요르단강에서 공공연하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것은 사제계급과 그들의 경신례 전담에 대한 엄청난 도전이다. 성전, 사제, 예물과 상관없이 죄를 용서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백성들은 이제 각자 사는 곳에 정결례와 속죄 예물을 마련하고 사제들에게 정결례 값을 치르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오지 않아도 된다. 그 대신 진정으로 뉘우치고 자신의 행실을 고치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고-사실 이것은 대단한 것이다-콸콸 흐르는 요르단강으로 와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 성전 사람들이 요한의 성공을 곱게 봐주고 묵인할 수 없다. 이상을 종합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매우 닮아 있다.
사망 연도는 예수가 왕성하게 복음 활동을 시작하던 시기로 알려져 있다. 참수 후 요한의 제자들이 그의 주검을 거두었다. (마르 6,29)
평가>
요한은 설교와 세례 운동으로 당대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준 예언자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인으로 생각될 인물이었다.(마르 8,28) 예수는 요한을 구약의 ’엘리야로 비유하며(마태 11,14;14,2) ‘여자로부터 태어난 모든 사람중에 최고’라고 극찬하였다. 신약성경 네 복음서와 유대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요한을 매우 비중있는 인물로 언급하고 있다.
참고:쟈크 뒤켄, 예수; 백민관 신부,세례자 요한 죽음
입력:최 마리 에스텔 수녀ㅣ2024년 1월 11일 PM 22:5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