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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관념(1900-1901 강의록, 2019)> 3강 4강
[원인관념의 첫째 형식: 시지각과 촉지각의 연관]
벩송: 원인관념(L’idée de cause),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00-1901)
- 슈발리에(Jacques Chevalier, 1882-1962), 벩송 강의 수강자. 그의 필기 노트.. ,
- 메이에르-비쉬(Gabriel Meyer-Bisch, s.d.) 편집, PUF, 2019, 부록 pp.192-197(P. 256).
3강: 앞 강의에서 지각이론을 분석하면서 논리적 사고와 생리학적 탐구들의 난점을 지적하였다. 오관의 감각작용은 지각작용 다음이다. 심리학적 탐구는, 의식이 세계를 또는 물질을 어떻게 구분하는가 하는 문제로서 지각작용의 문제이다. 여기서 중요한 방법은 전체에서 부분으로이지 부분에서 전체로 나가는 것은 아니다. - 물질에서 분할 또는 자르기가 이루어지는 것은 의식의 분해를 통해서 파악되는 것이 아닌가? 의식의 분해, 분열은 생명체의 자기 보존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자기 보존의 방식으로서 자기의 성립은 다른 물체들과 분리되어 있음을 깨닫는 것이리라. MM(물질과 기억, 1896)의 3장에서 지각작용을 의식에서 물체(신체) 접하는 부분에서 성립한다고 한다. 그 접합에서 현실적으로 신체로부터 물체의 구별이 생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지각은 이미지-추억과 순수추억을 뒤에 달고 있다. 지각작용의 소재[재료]가 구성되는 것이 신체이다. (55QMB)
4강: 의식 상태의 어떤 것으로서 지각작용은 마치 꿈 속에서(추억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같다. 지각작용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신체에서이다. 신체의 실재성은 다른 물체와 구별에서 이루어지는 데, 이는 분석에 의해서이지, 종합에 의해서가 아니다. 대상을 나의 신체와 구별하는 분석의 방식이 필요하다. 외부 대상에 대한 그 신체의 능력이 재인식일까? 신체가 대상을 다시 제시하는 표상은 나의 신체의 능력과 달리 지성을 통한 기호에 의한 것이리라. 벩송이 그 기원을 다루는 의미는, 보고 나서 또 보는데, 왜 과거의 추억들이 표상에 참여하는가에 관한 문제거리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 모든 현상이 표상에서 원인을 갖는 것이 아니라, 모든 대상이 원인이라 한다. 왜냐하면 대상자체가 다른 것들과 연결하는 방식은 거의 무한정하기 때문이다. 원인은 대상들이 움직임에 따라 작동하는데, 어찌하여 하나의 대상과 다른 대상이 서로 연결이 있는 것으로 여기냐는 것이다. 외부대상들이 아니라 의식 상태들이 연결되는 것은, 단순히 오랜 습관에 의한 기대와 편리 때문이 아니며, 다른 여러 관계에서 그렇게 보일 뿐이라는 것이다. (55Q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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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인관념(1900-1901 강의록, 2019)> 3강(192-194), 4강(194-197)
* 3강(192-194)
[원인: 심리학적 분석과 앞뒤 연관]
[심리학적 분석: 지각작용에서 신체의 구성.]
우리가 진행하는 것은 종합이 아니라, 오히려 분해(une dissociation)이다. 우리는 부분들에서 전체로 가지 않고 오히려 전체에서 부분들로 갈 것이다. 그러한 것이 우리의 결론이었다. (192)
이제 어떻게 분해의 작업이 이루어지는가?
생명있는 존재에게서 사유와 그것을 둘러싼 물질과 연관은 어떤 것인가?
우리가 물질을 물체들로 만드는 분할(la division)은 우리의 [의식]구조에 상대적이며, 그리고 우리가 차지하는 장소에 상대적이다. 이런 구별들(ces distinctions)과 이런 분할들에서, 어디에서 멈춰지는가? 화학자의 원자는 아마도 단순하지 않다. 그럼에도 물질의 분할들에서 화학자는 우리들의 감관들 보다 훨씬 더 멀리 갈 것이다. 우주의 에너지들과 같은 인력들 가운데서, 정신은 물체들에서 지지점들을 지닌다. 정신은 이런 보편적(우주적) 운동성(cette mobilité) 안에서 몇몇 요소들을 고체화 한고, 물리학자는 말한다. 그리고 자연주의자는 무엇을 말하는가? 곤충의 눈은 운동을 지각하지 물체를 지각하지 않는다. 이로부터 무슨 결론을 지을 것인가? 절대적으로 자유재량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물질을 물체로 분해(la décomposition)하는 것은 종의 본성에, 그리고 우리의 필요들에 아주 상대적이다.
모든 이들이 일치하는 한 가지가 있다. 최소한의 지속에서, 수적으로 굉장히 많은 외적 현상들은 압축된 것들(condensés)로써 간주될 수 있다. 빛에 대한 우리의 지각작용은 3조의 진동들로 들어온다. 요소적인 현상의 형상화[도형화]가 양태가 어떤 것일지라도, 부인할 수 없는 것, 그것은 요소적 현상들의 수(le nombre)이다. 요소적 현상들은 우리가 지각할 수 있거나 또는 의식할 수 있는 지속의 가장 작은 간격들을 유지한다.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192)
생명이 나타나는 것과 동시에, 자발적인 운동(le mouvement spontané)이 나타난다. 운동은 내적 원리 속에 생명있는 존재의 내부에서, 운동의 기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생명이 있는 도처에서 자발적 운동이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생명 유기체 속에 운동의 자발성에 참여함과 동시에, 우리는 특별한 기관들 덕분에 주변 세계에서 만들어진 운동들에 대해 지각작용에 참여한다. 어떻게 이 두 사실들 사이에 연관이 정립되지 않겠는가?어떻게 이 둘이 서로 재결합된다고 인정하지 않겠는가?만일 우리가 가장 단순한 생명존재를 다룬다하더라도, 외적 진동들에 대한 흐릿한(vague 모호한) 지각작용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동물의 계열로 올라감에 따라서, 사람들은 이런 기능에 적응하는 세포들의 차이(la différenciation)를, 그리고 점점 더 복잡한 신경체계의 형성작업을 주목한다. 생명존재의 행동이 가능하기 위하여, 외적 진동들은 최소한의 지속으로 압축되어야만 한다. [읽을 수 없는 단어], 왜 사정이 그러한가?
우리가 물질은 요소적인 진동들로 해결함에 따라서, 또한 그에 따라 계산은 물질에 더 잘 적용[응용]된다. 이런 해결(cette résolution)의 끝에, 우리가 발견한 것은 수학적 필연성이다.그러나 가장 엄격한 수학에 도달하기 위하여, 지속은 0(제로)과 동일해야 할 것이다. 0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따라서 한 부분, 즉 사람들이 부분을 가정하는 어떤 작은 부분, 즉 계산에 굴절[굴복]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193)
따라서 이런 필연성이 절대적으로 엄격하지 않는지를 가정해보다. 힘은 어떤 활동성일 것이다.
문제는 이런 것이다. 비결정성으로 미세한 부분을 남기는, 필연성에 복종된 이런 물질이 주어지면, [문제는] 자유의 부분과 같은, 비결정성을 무한정하게 증가시켜야만 한다.그런데 우리를 구성하는 힘이 어떻게 거의 필연성인 그물코들을 관통하여 지나가기에 이를 것인가? 그(il)가 처분하는[마음대로 다루는] 에너지 양이 지속의 리듬을, 신경 기관들의 구조를, 따라서 유기체 전체를 곧 바로 규정할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구조를 통하여 발가벗은[적나라한] 실재성을 볼 수 있다면, 이런 에너지의 정도를 사람들은 알아챘을 것이다(apercevoir). (193)
따라서 만일 사람들이 물질을 구별된 물체로 분할의 기원에까지, 즉 멈춰진 윤곽들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이 문제에 대답은, 터전과 물질에 마주하여 종이 소유한 생명적 힘의 – 생명적 에너지의, 생명적 자유의 - 정도에 대한 규정작업[결정론]에서 발견될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설명할 수 있는 것, 그것은 형이상학적 특성이 없는 심리학적 과정이다. 물질의 자르기(un sectionnement, 절단)가 어떻게 작업되었는지를 자문해보자. (194)
운동은 우리에게 이 문제의 열쇠를 준다. 우리는 시각과 촉각에 의하여 운동을 무매개적으로 지각한다. 우리는 운동을 주의에 의해 반사[반성]적 방식으로 지각한다. 주의는 위치의 연관들 속에서 변화를 파악한다.
분명[구별]한 물체는 공간에서 다른 물체들과 구별하여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물체이다.
이렇게 원초적으로 연속된 물질의 분할이 조작된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는 꿈의 지각작용이 있을 뿐이다.무엇이 이런 시각적 이미지를 내부(un intérieur)에게 주도록 우리를 인도하는가? 첫째 진행방식, 그것은 이미지들 가운데서 우리들 신체로부터 우리에게 행하는 구성작업이다. 꼬마애는 의식적 삶의 초기에, 다른 물체들로부터 자기 신체를 아직 깔끔하게 구별하지 못한다.단지 꼬마는 자기에게 항상 현재로 있는 이미지가 있다고 주목한다. 그리고 시각적 이미지는 촉각적 이미지가 된다. 그리고 거기에 비결정적[비규정적] 이미지의 재료를 구성하는 무엇이 있다. 그의 신체는 그에게서 하나의 촉각적 대상이 된다. 그러고 나서 자기 신체의 표면 위에 우선 자리 잡은 감각작용들이 그에 의해서 내부에 자리잡게 된다(근육 운동, 내장 운동 등). 이때부터 꼬마는 하나의 신체로 갖추어진다.
이렇게 재료가 되었던 신체로부터, 꼬마는 다른 신체[물체]들로 이행해 나갈 것이다. (194) (55Q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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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8 랑게(Friedrich-Albert Lange, 1828-1875) 독일 역사학자, 철학자. 사회학자. 유물론의 역사와 현재 유물론 의미의 비판(Geschichte des Materialismus und Kritik seiner Bedeutung in der Gegenwart. 1866) :
* 4강(194-197)
[신체구성에서 시지각작용과 촉지각작용의 연관]
[의식의 생성과 성장 과정에서 원인이란? 관계도 필연도 아니고 연관이다.]
지각작용에 대한 우리의 분석에서 우리는 말했다. 이런 지각작용은 우리에게 우선 시각적 이미지를 제공한다고, 그리고 만일 우리가 스스로 만족한다면 이런 지각은 견고함이 없는 꿈과 같은 것이라고, 또 시각적 이미지는 풍부해지고, 과정의 연구가 접근하면서, 우리는 우리자신의 신체를 제시했어야만 할 것이다. 그 신체는 표면에서 시작하여 깊이들을 얻어서, 다양한 감각작용들로 시작부터 가득 채워진다. 이런 시각적 이미지의 내부를 끝내 구성하는 것은 유기체적 촉각의 지각작용이다. (194-195)
우리 신체는 이때에 안정되고, 단단하고, 실체적인 실재성이 된다. [그 다음에서야] 다른 이미지들은 차례로 실체들이 된다. 이것은 일반화에 의해서인가? 추론에 의해서, 유비에 의해서인가? 아마도, 그러나 그것은 다른 것들처럼 유비에 의한 추론(un raisonnement)이 아니고, 다른 것들처럼 귀납(une induction)도 아닐 것이다. 소위 말하는 추리(l’inférence)도 아니다. 만일 시각적 이미지 속에서 종합(une synthèse), 즉 구축작용(une construction)을 만들었다면, 사정이 이러할 것이리라. 어린애가 진행하는 것은 구축작용에 의해서가 아니라, 분석에 의해서(par analyse) 이다.
추론하지 않고서 자신이 확신하는 것을 모호하게 발설하기에 그치면서, 어린애(아동)는 다른 물체들을 자기 신체와 동화해야만 한다.난점은 어떻게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왜를 설명하는 것: 어떻게 다른 물체들이 우리 신체에 닮은 것 같이 우리에게 보이는가가 아니라, 왜 다른 신체들이 우리에게 달리 나타나는가이다. 이런 설명으로부터 사람들은 쉽게 원리를 가질 것이다. 우리가 한 물체를 생각할 때, 우리는 그것에게 모호하고 꺼져가는 감각의 나머지를, 그리고 의지의 시작과 저항의 의사표시(une velléité)를 부여한다. [이로서] 우리는 실체의 관념이 원인의 관념과 가까이 지낸다(côtoyer)는 점에 이르렀다.내가 지적하는 원인 관념의 첫째 핵심이다. 나는 믿는데, 이 관념의 기원, 그것은 시각적 지각작용과 상응하는 촉각적 지각 작용들 사이에 확립하는 연결이다. (195)
우리가 한 대상을 깨달을 때, 이 대상은 우리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시각적 이미지이다. 그러나 나중에 우리는 시각적 이미지를 지각할 수 있으려면, 거기에서 규정된 촉각 지각들을 읽어야 한다. 어떻게 이런 읽기가 이루어지는가? 어떻게 이런 [이미지, 관념의] 연합이 확립되는가? (195)
아주 신기한 두뇌 감화현상(une affection)이, 즉 심리맹(la cécitépsychique, 영혼맹)이 있다. 어떤 인물이 시각에 의해 대상을 지각하는데, 그는 그것을 재인식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 인물은 자기 이유가 있다. 그는 자기 속에 언어의 어떤 혼란도 생산되지 않는다. 가끔 그는 탁자를 서술할 수 있고, 묘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탁자의 앞에서 그는 탁자를 재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195)
사람들은 한 환자의 보다 특별한 경우에 언어맹(la cécitéverbale)의 이름을 붙인다.그 환자는 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쓰여진 한 쪽을 읽을 수 없다. 이런 상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만일 사람들이 환자에게 그가 막 쓴 쪽을 복사하게 요구 하면, 그는 그것을 할 수 없거나 또는 어떤 소묘처럼 행사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받아쓰기에서 유창하게 쓸 수 있다. 그러한 것이 증명하는 것은, 우리가 복사할 때, 몇몇 메카니즘이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표기법[글씨]의 철자를 부여함에서, 신경 중추들 속에 하나의 섬유(un fil)가 있다. 그 섬유가 시각적 이미지를 손의 습관과 해당하는 운동에 연결한다. 한편으로 [시각의] 보여짐(une vision)이 있고, 다른 한편 [손의] 움직이는 습관이 있다. 둘 사이에 하나의 섬유, 즉 이들을 연결하는 메카니즘이 있다. (196)
표기법(écriture, 글씨)의 철자들을 읽기 위하여,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이런 메커니즘을 작용하게 한다. 우리는 상상적으로 글씨를 쓴다. 중국 철자 앞에서 우리는 그것을 읽는 자들과 동일한 것을 본다.우리에게 부족한 것, 그것은 철자들을 분해하고 재구성하고, 그것의 내부를 보는 능력이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신체의, 손의] 움직이는 요소, 운동이다.
이제 심리맹(la cécitépsychique) 일반으로 되돌아가자. 거기서 또한 환자는 대상들을 복사하는 능력을 상실하였다. [영혼에서, 기억의 연결에] 상처 입은(손상된) 어떤 것이 있고, 이 대상을 그리기로서 재생산하려는 것은 시각적 이미지와 소요의 다양한 메카니즘들, 즉 손의 운동들 사이에 소통이다. 연결하는 [소통]섬유가 잘려진 것이다. 만일 환자가 대상을 더 이상 재인식할 수 없다면, 그러한 것이 증명하는 것은 우리가 한 대상을 볼 때, 우리가 수동적(passif)이 아니라는 것이다.즉 우리가 이미지 그 앞에 가며, 우리는 사람들이 자기의 접촉을 시험하는[체험하는] 촉각적 감각작용들을 무의식적으로[무매개적으로] 재생산하며, 우리는 이런 대상의 형태에 상응하는 [신체의] 운동들을 완수한다. 이 메카니즘의 작용[행동]은 대부분에서 재인식(la reconnaissance) 속으로 들어간다. (196)
[신체에서] 생겨나며 상상되는 운동들의 체계는 전유된[소속된] 메카니즘들에 의해 준비된 체계이며, 시각적 이미지 전체에 상응한다. 그 운동들의 체계는 촉각적 지각작용들에 상응하며, 우리에게 이런 대상의 가능한 접촉을 암시하고, 그 대상의 관점(la vision, 시각상)을 운동으로 연장하다(prolonger, 이어준다). [의식의] 지각작용은 펼쳐져서 [신체의] 행동에 이른다. 인간에게는, 우리가 수동적으로 감당하는 이미지를 능동적으로 다시 만드는(refaire) 경향성이 있다.시각적 지각작용은 우리에게서 개별적 대상에 상응하는[해당하는] 특수한 운동들로 이어진다. (196-197)
그러한 것이 원인성을 믿는 우리 신앙의 기원이다. 결과[효과]는 원인과 다르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거기에는 내용이 있고, 거기에서 나오는 것 같다. 두 항은 [정상적일 경우에, 또한 습관적으로]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나는 시각적 이미지와 [신체의] 운동 경향성 사이에 같은 연결(liaison)을 깨닫는다. 즉 구별된 두 사물이 있으나, 그럼에도 하나와 다른 것들은 우리에게 서로 함축되어 있어서, 분해할 수 없을 정도로 연결된 것으로 나타난다. 하나의 습득(une acquisition)인가? 우리는 이런 관계로부터 태생적[천성적] 용어를 갖는가? 전자도 후자도 아니다. 만일 이런 용어가 태생적일 수 있다면, 다른 한편으로 사람들이 그것을 획득적(acquise)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들 삶에 필연적인 것처럼 필연적으로 느껴진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 필연성은 사유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느껴지고, 행위되고 살아온 것이다. 필연성이 개념작업이 된 것은 보다 나중의 것일 뿐이다. (197)
우리가 원인성의 원리를 발설할 때, “모든 현상은 하나의 원인을 갖는다(avoir).”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과(효과)에서 원인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항상 경향성(une tendance)이 있다. 그러나 기원에서 시작하면, 사람들은 원인에서 결과로 또는 행동으로 간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 원리를 이렇게, 즉 “모든 대상은 하나의 원인이다(être).”라고 발언할 것이다. 어린애에게 하나의 대상은 무엇인가? 시각적 이미지이다. 그런데 행동은 무엇인가? 그것은 저항이다. 따라서 원리는 이렇게 되돌아 올 것이다. 즉 시각적 이미지의 현전 앞에서는 규정된[결정된] 촉각적 감각작용의 시도(l’attentat, 습격)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첫 분석에로 되돌아가자. 지각작용의 메커니즘은 우리의 시각적 이미지와 [신체의] 움직이는 메카니즘 사이에 연관 맺기(la mise en rapport)일 뿐이며, 따라서 하나의 기대(une expectative)일 뿐이다. 이러한 것이 또한 바로 원인성 관념의 첫 형식이며, 그러한 것이 그것의 핵심이다. (197)
(6:23, 55QM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