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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베1900원인관념1901강056
<원인관념(1900-1901 강의록, 2019)> 5강 6강
벩송: 원인관념(L’idée de cause),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00-1901)
- 슈발리에(Jacques Chevalier, 1882-1962), 벩송 강의 수강자. 그의 필기 노트.
- 메이에르-비쉬(Gabriel Meyer-Bisch, s.d.) 편집, PUF, 2019, 부록 pp.197-203(P. 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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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강에서, 원인성이 현실적으로 이어지는 이행은 세 가지의 형식으로 볼 수 있다. 물체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이 관계에서 신체와 물질일 경우에 신체의 감정 같은 움직임이 있고, 움직임을 이행하게 하는 능력도 있다. 이런 과정을 심리학적으로 보면, 능력이 작동하고, 능력이 신체에 영향을 주어 역할을 하게 하고, 그리고 신체와 사물의 관계로 이어진다. 인과성은 내부에서 외부로이행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이행의 시초에 가능성과 같은 추상 관념이 있고 이 추상관념이 물질성을 확보하기 전에 형태적인 이미지를 생성하고, 그리고 형태들 사이의 관계를 설명한다. 벩송은 이런 후자의 방식은 수학적이라 하고, 전자의 방식을 형이상학적이라 한다. 원인성이 여러 갈래로 이행한다는 점에서 원인성이 복잡하고 조화로운 덩어리이다. 이점은 스피노자의 신 즉 자연의 표현(expressio), 즉 압축이 밖으로 풀려남(ex-pression)과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6강에서, 원인 개념은 형이상학적으로 논리에 의한 것 또는 존재론에 의한 것으로 여기기 쉽지만, 전혀 그렇지 않고, 형이심학(深)적이며 경험의 총체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래서 인식론에서 시각과 촉각 사이에 통합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문제 삼는다. 인식론 상으로 원인은 내부에 있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물질과 기억(1896)에서 의식 상태의 내재적 과정(이행)을 다루는 제3장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도식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흐름이 먼저 있고, 기억총체의 흐름이 신체와 접촉에서 이미지를 형성하고, 이 이미지가 신체라는 메카니즘에서 도식을 형성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 강의에서 보면, 이런 발상과 검토를 한 것은, 물론 병리학의 실증적 자료의 검토에서 발견했겠지만, 흄의 인식론을 들여다보면서 당시의 인식론이 원인과 결과의 계열을 도식화 또는 체계화 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지적하려고 한다. 관념들의 연합을 인과론처럼 여기는 과학들은 원인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배열만을 다룬 것이라는 것이다. 흄도 이런 난점을 알고 있었는지 감관들의 관계들과 의식의 연관들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표상들 또는 재현들의 과정을 계속이라는 관점에서 원인 결과를 보았던 것이다. 이에 비해 벩송은 두 항 사이의 연속적인 이행(흐름)의 뉘앙스(음계)는 다른 것이라 한다. 이 뉘앙스의 총체는, 이 강의에서 벩송이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끊을 수 없는 불가분의 연속성이며 덩어리이라 한다. 이런 덩어리가 신체와 접합에서 이미지 또는 회로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의식상태가 즉 영혼이 원인이고, 신체가 귀결인 셈이다. 흄은 인과성의 분석에서 관념의 형성으로부터 시작한 것인데 비해, 벩송은 관념의 형성이전에 활동성(운동)의 흐름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신체와 접촉에서 방식 또는 도식이 생기면서 관념 또는 항들이 규정되는 것이라 한다. 벩송이 원인성과 달리 ‘원인의 관념“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 물론 심리학적이라고 하지만, 삶에서 기나긴 이어옴으로 있는 영혼이 먼저이고, 신체는 영혼의 활동성의 일부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즉 전체 또는 경험적 총체를 다루면서, 총체와 그 부분들과의 관계를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즉 총체에서 수많은 부분들 중에 경과 또는 이행의 길이 꼭 하나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전체와 부분들의 관계는 통로라는 의미에서 비결정성이며, 세분화이며, 회로를 닮았다. 이런 의미에서 벩송은 의식이 미분화가 아니라 세분화로 보았다는 것이다. 삶의 경향과 방향도 세분화이다. (55QMJ)
*** [원인 관념의 기원]
# <원인관념(1900-1901 강의록, 2019)> 5강(197-200), 6강(200-203) [원인 관념의 기원]
* 5강(197-200),
촉각적 감각작용과 시각적 감각작용의 연관(le rapport)은 서로서로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밀접하다. 이 감각작용들은 끊을 수 없을 정도이다. 우리가 행동하려는 경향없이는 볼 수 없다. 우리는 역할을 하거나 또는 내적으로촉각적 지각작용들을 역할을 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시각적 지각작용과 촉각적 지각작용의 분해할 수 없는 통합을 가지고 있다는 의식은 메카니즘의 의식일 뿐이다. 시각상(la vision)은, 우리에게 촉각적 지각작용들이 밝혀주는 한에서, 특히 우리에게 흥미롭다. (197-198)
우리가 시각적 형태와촉각적 형태 사이에서 이런 관계(cette relation)를 또한 객관적으로 정립한다. 시각적 형태와 촉각적 형태 사이의 뗄 수 없는 통합, 그것은 [신체의] 감각-운동의 기능[함수]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관계를 사물들 자체에게 펼치는 방식으로 이끌었다. 한 대상이 다른 대상에 행한 작용은 우리에게 규정된 것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단순히 다른 물체들과 유비적이라는 우리 신체가 규정된 작용들과 반작용들의 용어를 우리에게 부여하기 때문이다. (198)
따라서 이런 관계는 다음과 같은 특성들을 소개한다.
1. 첫째 항에다가 우리는 둘째 항을 연결한다. 구별된다고 할지라고 이들은 하나의 동일한 사물만을 형성한다.
2. 두 항들 사이에 분해할 수 없는 연결이 있다.
3. 이런 관계는 마치 관계가 모든 대상들에게 펼쳐져 있는 것처럼, 보편화된다.
만일 시각적 형태와촉각적 형태의 관계는 관계자체로 정립된다면, 또 [한편] 우리 삶의 총체적 부분을 이루고, 다른 한편 원인성[인과성]의 모든 특성들[성격들]을 소개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것이 바로 원인 관념의 기원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나는 이런 관념을 조심하라고 할 것이다. 즉 원인성의 이런 용어는, 마치 유비적 용어들처럼, 단순한 용어들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 다른 항들을 원인의 관념에 이끌려지게, 마치 엄격한 틀에 끌리도록, 습관을 들이고 있다. 이런 개념작업보다 더 오류를 범하는 것은 없다. 무지개 속에서 우리는 두세 가지 색깔만을 지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원인의 관념에서 탐구된 중심선의 공간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 이외에도 서로 융합되고 또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많은 뉘앙스가 있다. 시각적 형태와촉각적 형태의 관계는 두 가지 다른 방향으로, 즉 그 바깥에서(au dehors) 사물 안에서든지 그 안에서(au dedans) 의식 안에서든지, 이어질 수 있다. (198)
1) 외부의 이어짐은 가장 단순하다. 운동의 소통은 원인성의 관계의 특별한 형식이며, 바깥에서 원인 관념의 중요한 하위 조화(la harmonique inférieure)이다. (198)
2) 내부의 이어짐들은 보다 더 미묘하다. 우선 충격을 받는 자, 그것은 노력(l’effort)이다.어떻게 노력의 표상[재현]이 원인의 기원적인 우리 표상에 개입하러 오는가? (198-199)
[3)] 우리가 어려움으로부터, 못하게 하는 것으로부터 갖는 감정은 우리에게 노력의 표상[재현]을 부여한다. 우리는 다른 대상들 속에서 우리 노력과 유비적인 노력을 가정한다.
이 세 가지 형식: 시각적 형태와 촉각적 형태의 관계, 노력이라는 감정, 충격에 의한 운동의 소통은 원인의 개념작업을 우리에게 부여하기 위해 서로서로 완전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관념의 상위 조화들(les harmoniques supérieure)을 찾아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세 가지 형식들이 갖는 공통적인 무엇을 분간한다면, 우리는 상위 조화들의 탐구로 우리를 인도할 원리를 가질 것이다. 노력, 그것은 실재적 운동[이미지]으로 전환되기에 이르는 가능한 운동의 이미지이며, [이는] 이미지가 물질화되는 것은 이런 표상들로부터 얻는데 있다. (199)
우리가 시각적 형식으로부터 촉각적 형식으로 이행할 때, 유비적 어떤 것이 생산될 수는 없는가? 촉각적 지각작용은 보다 크고 보다 강조된 물질성의 형식이다.
마찬가지로 운동이라는 전달(la transmission)은 물질성을 향한, 현실화를 향한 진행이다.이 세 형식은 우리에게 동일한 원리 앞에 있게 한다. 우리는 거기에 원인성의 진구가 있다고 또한 이어서 이런 길이 우리에게 그것의 중요한 셩식들을 규정하기에 이른다고, 예감할 수 없는가? (199)
산보한다는 생각의 이행, 즉 옷을 갖추어 입는 이미지, 따라가야 하는 길들의 이미지‥…, 이 이행은 원인적 관계의 한 형식이다. 목적인이 있다. 목적인은 효과인에 대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목적의 관념과 수단들의 이미지의 연관은 바로 추상적 관념과 보다 구체적이고 보다 물질화된 형식과 연관이기 때문이다. (199)
우리가 일반명제로부터 개별명제들을 끌어낼 때, 우리는 인과성의 형식, 인과성의 논리적 형식을, 원리로부터 원리의 귀결들로 이행을 갖는다. 우리는 논리적 인과성 그 위에 또한 상위 형식을 발견할 수 있는가? 그렇다. 왜냐하면 예들 들어 원의 관념의 가능성은 원의 관념의 원인이다. 원이 정의되었기에 앞서서 이미 원의 가능성이 있었다.사람들은 수학적으로 가능성이 실재성을 생성하게 하거나 또는 생성하게 할 것 같다고 말할 수 있다. 형이상학적 원인성이 있는데, 덜 실현된 것으로부터 더 잘 실현된 것으로 이행(스피노자의 체계 참조)이 있다. 원인성(인과성)은 닮은 두 사물 사이에 연관 속에 항상 있다. 둘 사물중의 첫째 것은 추상관념으로 더 잘 준비되어 있고, 둘째 것은 물질성의 관념에 더 잘 준비되어 있다. 첫째 항에서 둘째 항으로 이행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지속의 모든 뉘앙스들을, 우연과 필연의 모든 뉘앙스들을 발견한다. 원인 관념은 무한히 복잡한 관념이다. (199-200) (55Q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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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2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 포르투갈계 유대인, 네델란드 철학자. 오성개선론(1661), 윤리학(1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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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강(200-203) [흄의 인식: 관념연합]
나는 오늘 우리의 심리학적 분석에 의해 얻어진 결과물들을 통상적 개념작업(흄의 것)과 또한 진화론적 개념작업과 대조하고자 한다.
흄(Hume, 1711-1776)의 결론은, 원인과 결과가 서로 이어지는 두 이질적 현상이라 한다. 이점에 관해서, 또는 흄이 이런 생각으로부터 끌어냈던 귀결들에서, 사람들은 틀림없이 논의 한다: 경험론자들, 즉 활동성의 철학자들은 이런 귀결들을 비판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마치 계속되는 두 현상들로부터 결과가 나오듯이, 원인의 개념작업을 인정한다. 나는 곧 흄의 이론을 다룰 것이고, 이론 그 자체를 검토할 것이다. 왜 그 이론이 결정적이지 못하는가를 찾는 것이 중요하며, 또한 흄이 자신이 따르길 제안했던 길을 빗나갔던 정확한 점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 오성론(An E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1748), 7부를 연구하자. 여기서는 인과성의 이론이 제시되어 있다. 그에게서 모든 것은 인상들과 관념들에 귀착된다. 따라서 실재성 전체는 무매개적 자료로 환원된다. 우리라 원인의 고유한(sui generis) 관념을 갖을 것이라는 경우에, 이런 관념의 무매개 자료들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200)
이런 무매개적 자료는 우리에게 감관들에 의해 또는 의식에 의해 올 수 있다. 이것들을 계속적으로 탐문해보자. (200)
1) 감관들: 흄은 예로서 두 개의 당구공의 충돌을 다룬다. 그런데 아무것도 힘의 관념이나 필연적이 연결의 관념을 암시하지 않는다. 감관들은 우리에게 무엇이 곧 일어날 것인지를 예견하게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하나의 사실(un fait, 만들어진 것)을 보고, 그리고 앞에 것에 이어 계속하는 다른 사실을 본다. 앞의 관계와 다른 관계에 관하여, 만일 그 관계가 현존했다면, 그 관계는 우리에게 결과를 예견하도록 허락했으리라. 그 관계 자체에 의해 사유는 감관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이런 귀결에 보태야할 어떠한 것도 할 수 없다. (200-201)
2) 의식: 이제 그 안(le dedans)을 연구해보자. 우리는 내적 원인성의 관념을, 즉 효과적 권능의 감정을 갖는가? 그리고 우선 우리가 기관들에 관한 정신의 권능을 파악하는가?분명히 아니다. 의식은 영혼과 신체의 비밀스런 통합도 이것들의 본질도 드러내지 못한다. 해부학은 우리에게 제시하기를, 우리가 우리 사지의 하나를 움직일 때, 그것은 매우 복잡한 과정으로 생산된다. 그런데 의식은 의지와 운동의 완수 사이에 매개들을 모른다. 의식은 무매개적 작용(une action, 행동)을 믿는다. 나는 기관들에게 행하는 정신의 효과적인 능력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정신자체 관한 정신의 작용(행동)을 의식하지 못할 것인가? 아니다[모른다]. 우리는 정신[영혼]이, 관념이, 정신과 관념의 관계들이, 정신의 능력들의 한계들(les limites, 극한들)가 무엇인지는 모른다.따라서 우리가 아는 것은 단지 두 항들(끝점들), 의욕(la volition)과 그 효과이며, 매개적인 것들을 알지 못한다. 나는 정신이 자기 관념들에 미치는 효과적 능력을 의식하지 못한다. (201)
이러한 분석의 결론들은 어떠한 것들인가? 모든 사건들은 서로 서로 떨어져 있다. 우리는 이들 사이의 연결을 관찰하지 못한다. 사건들은 병치되어 있는 것 같으나 그러나 연결되어 있지 않다. 우리의 경험 속에서는 이접적 현상들만이 있다. 우리들의 원인 관념은 착각이라고 결론내어야 하는가? 또한 이런 착각을 정의해야 하는가? 원인이라는 단어 뒤에 감추어져 있는 실재성이란 이와 같다: 두 현상들이 항상 연결된 것으로 나타날 때, 정신은 앞 현상이 생산될 때 뒷 현상을 기대하는 습관의 압축이다. 경험으로부터 오는 예견의 감정은 이런 병치작업에 특별하게 색깔을 입히는 것이다. 이로부터 원인성의 관념이 나온다. (201)
이런 분석은, 분석의 가치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일까? 나는, 사람들이 바깥에서부터 분석에게 행해졌던,반대들을 무시하지 않을 것이다. 학설의 중심에 위치해야만 하고, 흄이 실재성을 잘 파악했는지를 자문해야 한다. 이런 관념[생각]이 따로 분리되어 파악된 외적 경험으로부터도 따로 분리되어 파악된 내적 경험으로부터도 올 수 없다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은 이런 관념이 경험의 두 양태의 조합으로부터도 통합으로부터도 나오지 않는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까? 거기서 이런 관념을 찾아야만 한다: 원초적으로 주체와 대상의 일치가 없다는 것인가? 만일 우리가 원초적으로 의식에 주어진 무엇에 거슬러 올라가기를 원한다면, 거기에서 원인성의 기원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이점에서 사람들은 시각적 지각작용과 촉각적 지각작용의 유일한 연결에서 원인성의 첫 초벌이 나타난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런 관계 속에 우리는 두 사실들이, 마치 사람들이 어떤 의미에서 사실들은 다르고 다른 어떤 의미에서는 일치한다 라고, 또한 사람들이 서로서로 점진적인 변형을 설명하는 매개들에 의해서 한 사실에서 다른 사실로 이행한다 라고, 말할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어떤 두 현상들의 다단순한 병치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두 현상에 내속해 있는 성질이며, 이 성질은 두 현상을 어떤 의미에서 일치하게 한다. 다른 한편으로 매개적인 음계(une gamme d’interimediaires) 전체이다. 이것이 우리 속에서 기원의 점에 위치하면서 우리가 파악하는 것이다. 기원 점에서 주체와 대상은 직접적인 접촉으로 있다. (202)
흄은, 우리가 외적 세계 속에 구경꾼으로 더 이상 있지 않는 순간에, 우리를 다룬다. 그의 분석의 결함은 거기에 있다. 그는 보다 오랜 그리고 보다 깊은 경험을 무시한다. 그 경험에서 우리는 계속적인 항들을 파악할 뿐만 아니라 이 항들을 통합하는 관계도 파악한다.
게다가 내적 경험만이, 초기 경험의 형식아래서, 인과성의 관념을 우리에게 줄 수 있다. ‘팔을 들기’를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간략한 어떤 것, 특별한 어떤 것 자기의 고유한(sui generis) 어떤 것이다. 팔 들기를 원하는 것, 그것은 이 운동을 도식적인 형식으로 이미 표상되는 것이다. 이런 도식은 색깔과 해당하는 감각작용(병리학의 증거들)을 부르는 어떤 소묘와 같다. 우리는 두 사실들을 갖는다. [하나는] 가능한 운동의 표상[재현] 과 실현되는 중인 운동의 표상이고, [다른 하나는] 이 둘[두 재현들] 사이에서 매개적인 음계 전체이다. 이 두 사실은 연속적인(cpntinue) 방식으로 도식에서 이미지로이행을 설명한다.
나는 그의 관념들에 관한 정신의 능력만큼이나 이에 대해 말할 것이다(예를 들어 추억들 또는 이미지들의 소환작용). 단순하게 도식에서 이미지로 이행이 있다. 그것은 사실 자체로 진행되지만 오히려 도식의 형식 하에서 진행되는 것은 동일한 사실이다.
원인의 관념: (202)
1. 두 항들의 관념, 어떤 것이 아니라 오히려 (...) 같은 것(203)
2. 두 항들의 관념, 이들 사이에 매개적 음계 전체가 있다. (203) (55QM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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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1 흄(David Hume, 1711-1776) 스코틀랜드 출신의 철학자, 경제학자, 역사가. 인간 본성론(Le Traité de la nature humaine, 1740), 인간 오성론(An E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fr. L’Enquête sur l’entendement humain, 1748),
(6:14, 55QM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