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많은 애국지사들은 각처에 의병학교를 세워놓고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환인현에 동창학교 홍경현에 흥동학교를 설립하고 민족투사를 양성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만해는 그들과 친교를 맺고 의병학교에 가서 독립정신을 일깨워주고 또 격려하며 만주 각지를 순방했다.
많은 독립지사들과 교분을 나눈 것도 이때부터였다. 특히 김동삼과 신채호, 우제 이시영과 단주 유림 등과의 접촉은
후일 그의 생애를 통하여 일관된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고 실천하는 시금석이 되었다.
만해가 통화현에 갔을 때다.
무슨 이상한 불안이 감격과 희망 속에 뒤범벅이 됐다.
조밥으로 연명하면서도 밤이면 관솔불을 켜고 조국독립을 논하던 우리 동포들이었다.
때문에 본국에서 나온 사람들을 처음에는 불안으로, 그 다음에는 의심으로 대하는 경우가 일쑤였다.
심지어 생명을 빼앗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만해도 같은 맥락에서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긴 적이 있었다.
통화현에서도 두메인 산촌에서 자고 나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만해를 바래다 주겠노라며 2∼3인의 청년이 따라나섰다.
그들은 모두 20세 전후의 한국청년들이었다. 길이 차차 산골로 접어들어 굴라재 라는 고개를 넘게 됐다.
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이 우거져 대낮에도 하늘이 보이지 않는 그런 산길이었다.
해는 기울어 어둠살이 산그늘을 적실 때까지 만해는 청년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길 걸음을 재촉했다.
그때였다. 뒤에서 따라오던 청년이 총을 쏘았다. 총소리가 나자 귓전이 섬뜩했다.
두 번째 총소리가 들리자 아픔이 온 몸으로 번졌다.
또 다른 총소리가 귓전을 스쳤을 때는 암살자들에게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려 했다.
여러 번 목청을 돋워 꾸중의 말을 하려했다. 그러나 말은 단 한 마디도 나오질 않았다.
혀가 굳어 더 이상의 신음소리도 내지를 못했다. 피가 무섭게 쏟아졌고 격렬한 아픔이 전신을 휩쓸었다.
그러다 종국에는 통증도 사라지고 편안함만이 온몸에 그득히 고였다. 의식을 잃은 혼수상태에 빠진 것이었다.
이윽고 만해 앞에 관세음보살이 나타났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반듯이 누워 있던 만해에게 엷은 미소를 던지고 있었다.
"그대 생명이 경각에 달렸는데 어찌 이대로 가만히만 있는가?"
번득 정신이 든 만해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어두웠다. 눈은 희미했고 온몸에는 선혈이 축축이 젖어있었다.
총을 쏜 청년은 만해의 행장을 조사하고 다른 한 명은 큰 돌을 움직이고 있었다.
만해는 속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청년들은 만해의 죽음을 확인한 듯 돌을 굴려 만해의 몸을 가린 뒤 걸음을 재촉하며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만해는 젖은 몸을 움직여 산을 넘었다. 거기엔 중국인 마을이 있었다.
마침 계를 하는 집이어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만해가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에 놀란 주민들은 응급치료를 해주었다.
얼마 뒤에 총을 쏜 청년들이 만해를 추격해왔다.
만해는 신음소리를 감추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이 놈들, 쏠 테면 또 쏴봐라."
청년들은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하고 중국인들에게 쫓겨 달아나고 말았다.
만해는 당시 치명상을 입은 상태라 한국인마을로 건너와 대수술을 받아야 했다.
의사는 매우 아플 터이니 마취 후 수술을 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만해는 굳이 마다하고 생수술을 받기로 했다. 생 뼈를 깎아내는 소리가 빠각빠각 들렸다.
그러나 만해는 이를 악물고 아픔을 속으로 삭였다.
의사는 만해를 두고 '생불이군, 이 분은 사람이 아니라 활불이오'라고 말했다.
의사는 수술이 끝나고 치료비도 제대로 받지 않았다.
첫댓글 <불새님 댓글> [추천글 보기 10.09.17. 19:16]
전에 책에서 읽은적이 있어요. 신심을 본받아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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