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많이 접했지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하나의 연결된 관점으로 읽지 못했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소외된 계층의 재발견,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을 위한 복음으로 느껴졌던 부분은 통독하며 곳곳에 느낄 수 있었다. 누가복음에선 시돈의 사렙다의 한 과부, 수리아사람 나아만의 구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등등 10장 21절에 당시 지혜롭고 슬기로운 이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이들에게는 나타내셨다는 것처럼 순전하게 부르심을 듣고 따르는 새로운 공동체를 떠올리게 되었다. 사도행전에선 사도들이 이방인 선교를 하게 성령의 역사를 보면서 더더욱 그렇게 보였다.
그리고, 지난 두번의 강의에서 누가는 혈통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앞에 듣고 반응하고 실행하며 사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증언했다고 새롭게 보.게 되었다. 누가복음을 읽으며 꼭 주목해야 할 말씀으로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6:36) 이다 들었다. 거룩이 아니라 ‘자비’(compassion)로 대체된 뜻이 지금을 살아가는 많은 크리스쳔들이 가지고 있는 거룩과 믿음의 관념에 과연 하나님과 예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뒤집어서 생각할 부분이 무엇인지 곱씹어본다.
사도행전도 성령의 역사, 선교에 대한 말씀의 관점으로만 보았었는데,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 사이에 ‘분열’이 진행된 2세기의 처음 20년 이라는 시대적 설정에서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살았던 공동체가 어떻게 삶의 질문에 대답했는지 보게 되었다. 티베리우스 황제, 네로황제 때 문제들로 범법자로, 방화범들로 내몰린 기독교인들이 로마제국안에서 어떻게 유대교에서 참된 종교가 될 수 있는지 증언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예수의 무죄성을 논했듯이 바울의 무죄성도 함께 증언하면서 말이다.
사도행전에선 회심이후 바울은 처음부터 이방인의 사도가 아니었다. 그의 전도여행을 통해 거의 무죄를 변증하고, 그가 유대인을 대상으로 선교하다가 어떻게 이방인의 사도를 자처하게 되었고,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 운동은 불법도 아니고 로마제국에 위험을 가져 오는 것도 아님을 증언하고 있다.
누가 행전에 나온 이방인들 가운데는 사회적으로 유력한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고, 비폭력 저항을 해온 그들 중 일부 또는 다수가 크리스천이 되었다면 누가-행전 시대의 교회가 예수나 바울 시대의 교회처럼 반(反)로마제국이나 반(反)제국신학을 전면적으로 주장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들었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새로운 질서 였고, 그런 침노하는 하나님 나라는 모든 사람이 차별없는 생명으로 치유와 사랑으로 회복되는 나라로 보았는데, 로마 기독교로 타협했다는 말씀에 석연치 않았다.
그부분이 성령의 역사의 관점으로 보는 부분과 충돌되어 잘 정리되진 않지만,
내가 믿는 신앙과 현실사이에서 나는 얼마나 타협하고 사는지 질문하며 돌아보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