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지리소고」는 먼저 산악이 많고 평야가 부족한 것이 조선의 가장 큰 결함이라는 주장의 타당성을 검토하고 반론을 제기한다. 지리학자답게 세계 지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동원하여 한반도 지리와 비교하고 분석한다. 김교신은 먼저 한반도의 ‘부족한 평야’ 문제를 짚는다. 한반도에 산악이 많고 평야가 부족한 편이긴 해도 ‘2천만 인구가 살아가기에는 넉넉하다’라는 게 김교신의 주장이다. 중국의 양쯔강, 러시아의 볼가강, 미국의 미시시피강, 이집트의 나일강 유역처럼 비옥하지는 못해도, ‘젖과 꿀이 흐른다는’ 팔레스타인 지방보다는 훨씬 풍족하다고 지적한다.
김교신의 지리학 담론은 경제적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교사로서 평소 학생들에게 ‘(중국의) 산둥반도에서 생산하는 철과 석탄과 농수산물이 많다고 하나 공자 한 사람의 귀중함에 비길 것이 못’ 되며, ‘인도의 산물 중의 산물은 오직 간디’라고 강조했다. 지리적 환경이 어떤 물질적 결과를 가져왔는지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지역이 ‘위대한 인물’과 ‘큰 사상’을 얼마나 배출했는가 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땅은 그저 인간의 물질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에 그치지 않는다. 그 땅이 ‘고귀한 정신’을 배출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인물 위주의 지리, 인간 위주의 과학’을 강조한 김교신의 면모를 여기서 본다. 그 첫 사례가 황폐한 자연환경 속에서 위대한 예언자를 많이 배출한 이스라엘이다.
선지자의 나라 이스라엘의 역사는 황무지 같은 광야를 말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다.
그뿐인가. 영국의 ‘가장 고귀한 정신적 산물과 위대한 인물은 거의 다 척박한 산악지대인 스코틀랜드 출신’이다. 미국의 ‘건실한 신앙인, 고귀한 사상가, 심원한 예술가, 웅건한 정치가’는 ‘애팔래치아산맥 동북쪽 돌덩이 뒹구는 산골 마을’에서 배출되었다. 따라서 ‘우리의 반도가 산악의 강산이라 하여 비관할 것은 하나도 없다’라는 게 김교신의 입장이다.
그러면 이런 반론이 나올 수 있다. ‘한반도에 산맥이 있으나 히말라야처럼 웅대한 것이 없고, 후지산(富士山)처럼 높은 것이 없다’라고. 한반도에 산이 많다고 하지만 세계 수준에서 보면 규모가 크지도 않고 해발고도가 높지도 않다는 반론이다. 이에 대한 김교신의 답변이 이어진다. 웅대한 산맥을 자랑하는 히말라야 기슭에 자리 잡은 ‘인도로부터 서남아시아 지방에는 불건전한 종교가 성행하며, 어쩌다 기독교를 믿는다고 할지라도 신비화하고 미신화해서 이상한 형태로 발전’한다. 해발 3,776m 높이의 후지산을 자랑하는 일본은 어떤가. “화산과 지진이 많은 나라에는 소위 종교심이 깊은 경향이 농후하여 언뜻 보기에는 종교적 국민인 듯이 보이는 수도 있다. 그러나 저들은 예배할 대상조차도 분변하지 못하는 경향도 많다. 생식기를 받들어 제사를 지내고 생선 뼈다귀에도 최고의 경건으로써 예배하는 환경에서 참된 신을 발견하며 고결한 사상에 도달하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히말라야와 후지산을 한데 묶어 두 지역의 종교적 불건전성을 지적함으로써, 반도를 낮춰보는 일본 열도의 시각에 제동을 건다. 환경결정론으로 조선을 멸시하려 드는 일본제국에 신랄한 비웃음을 날린 것이다.
산이 높기만 하다고 대단한 게 아니라는 증거는 또 있다.
산이 높은 것으로서 대단하다고 한다면, 후지산(3,776m)보다 221m가 더 높은 대만의 신고산(新高山, 3,997m) 아래에서 영웅호걸이 더 많이 배출되었을 것이다. 아프리카 킬리만자로(5,895m)와 북미 알래스카의 매킨리(6,194m)와 남미의 아콩카과(6,959m) 등의 산들은 모두 우리 백두산(2,744m) 위에 백두산을 더한 것보다 더 높지만, 그 아래에서 현인과 철학자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못 들었다.
백두산 높이의 두 배가 넘는 매킨리와 아콩카과 기슭에서 ‘위대한 인물’과 ‘큰 사상’이 배출되지 못했다고 꼬집는다. 이에 비해 공자의 고향에 있는 태산은 높이가 겨우 1,532m에 불과하며 금강산 비로봉(1,638m)보다도 106m나 모자란다.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시내산은 2,285m이며, 예수 그리스도 탄생지 베들레헴 근방에는 서울의 북한산보다 높은 산이 없다. 산이 높다고 해서 위대한 인물이나 큰 사상을 배출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환경결정론에 대한 통렬한 반격이다.
교회주의와 무교회주의도 같은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전반기 조선 인구 2천만 가운데 기독교 신자는 30만 명이었다. 무교회 기독교 신자는 200명 남짓이었다. 30만 명 대 200명이다. 1,500 대 1이다.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든가 숫자가 많은 게 무조건 좋다고 말해선 안 된다. 그 열매로 판단해야 한다. 어떤 인물을 배출했는지, 그리고 김교신의 「조선지리소고」와 함석헌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와 같은 정신적 열매를 얼마나 맺었는지를 봐야 한다.
이제 김교신은 방향을 틀어 일본이 선망해 마지않는 서양 선진국으로 향한다. ‘세계에서 ‘국민적 자부심이 가장 심한 백성’은 영국인이고, 그중에서도 스코틀랜드인이 특히 그런 경향이 심한데, 그들이 자랑하는 벤네비스 산은 스코틀랜드 지역의 주봉(主峯)이자 섬나라 영국 전체에서 가장 높은 산이면서도 높이가 1,343m에 불과하다. 미국 뉴잉글랜드는 어떤가. 북미의 대표적 인물을 독점적으로 산출한 지역이지만 거기엔 조선의 지리산보다 높은 봉우리를 찾아볼 수 없다. 이제 김교신은 한반도로 돌아와 대표적인 산들을 열거한다.
백두산(2,744m), 관모산(2,541m), 북수백산(2,522m), 묘향산(1,909m), 금강산(1,638m), 지리산(1,915m), 한라산(1,950m) 등의 수려한 봉우리들을 가진 우리는 독립문이 빈약함을 부끄러워할 수는 있어도 반도의 산악이 평탄한 것을 한탄할 것은 없다. 하물며 산세와 평야의 배열과 균형의 아름다움을 논하자면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화에다 비할까? 뉴욕 부두에 높이 솟은 자유의 여신상에다 비할까?
백두산, 금강산, 한라산 등의 아름다운 산봉우리를 가진 우리는 ‘독립문이 빈약함을 부끄러워할 수는 있어도’ 높은 산이 없는 것을 아쉬워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글이다. 언중유골(言中有骨)이 느껴지지 않는가. 독립문은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1897년에 세운 문이다. 영은문은 조선 초기부터 중국에서 오는 사신을 맞이하던 문이다. 대한제국 시절 독립협회의 서재필 등이 부수고 이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김교신은 독립문의 규모가 빈약해 부끄럽다고 했다. 반도의 산이 낮다고 한탄할 일이 아니라, 독립문을 더 크고 높게 짓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산의 높이가 아니라 사람의 높이가 중요하다고 한다. 독립문 하나 웅장하게 세우지 못한 조선 백성의 나약함을 비판하는 말이다. 독립의 기개와 포부 없는 조선 민족을 매섭게 꾸짖는 김교신의 의도가 느껴지지 않는가.
그러나 총독부 검열관의 매서운 눈길을 피하려는 듯, 김교신은 얼른 말문을 돌려 본론으로 들어간다. 아무리 산세가 아름다워 보여도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이나 ‘자유의 여신상’의 아름다움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강조한다. 자연환경보다 중요한 건 역시 사람이란 뜻이다. 환경결정론보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요시하는 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