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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단 종 인 사 록 (長湍宗人 私錄) <동섬공의 시조이하 4대 배위 기록문> |
*문제점 1.
* 신묘대보에 시조비-문화류柳씨로 기록-
* 그러나 봉강묘에는위패에 시조 할머니 신위로만 되어 있고 문화류씨가 없음. 중학생 시절 할아버지 손잡고 시조묘제 참여했을때는 시조 할머니 문화류씨 위패를 보고 설명들었음 ,
* 시조할머니 묘소 찾는다고 노력했으나 몾 찾았다는 사실도 알고있음.
* 묘소문제와 위패 문제는 별개라 생각함.
*동섬공의 장단종인사록에도 시조님의 配柳씨로 기록 또한
시조님과 합장운 으로 기록되어있습니.
* 시조할머니 위패를 그냥 시조할머니신위가옳으냐?
시조할머니 문화류씨신위로 해야하느냐?
의논해볼 문제 아닐가요?.
.문제점 2.
신묘대보에 2세 공신공 배위에 나주정丁씨,3세복야공 배위에 무송유庾씨로 기록 하면서 그근거로 장단종인 사록으로 되어있는바,
* 동섬공(이조판서)께서 장단종인사록을 보시고 쓰신글을 찾아서 올려봅니다.
동섬공 께서는(시조님배위는配柳氏,2세 공신공배위는 유(庾)씨,3세 복야공 배위로 정 丁씨,왕 王씨로 기록-2세, 3세 배위가 바뀌어 있습니다.
* (며느리가 시어머니,시어머니가 며느리로잘못 기록)
*무송유씨 대종회에 알아본 결과--유庾검필은 무송유씨 시조이시며 따님한분은 태조왕건의 비로 ,또한분의 따님은 윤문의 先자之자(2세 공신공의 휘)로 출가하셨다.고 답해주셨습니다.
문제점 3.
신묘대보에 시조님의 휘는 신자달자이고,일명휘는 협신으로 기록되어있는바,어려운 한자를 잘못읽어 기록된것입니다.
* 시조 묘제날 하루전에 가서 새로세운 태사공 신도 비문을 (태균 고문님 개인돈 일억으로 건립한)두 눈으로 확인해보니 한자로 일명 화신이요, 옆면에 한글로 번역한 비문에는 협신으로 되어있는바.1971년 구보가세운 신도비문에는 화신으로,시조 태사공약사에는 혜신으로 기록되어있는바, 근래에 비를 건립하시면서, 어려운한자(풀초밑에 힘력3개하고 열십자 한자-옥편에도없음-글자를 올릴 수없음), 인지라 나름대로 읽고 기록하여 왔으니,
*신묘대보에 협신으로 한글로 기록하였기에
*한국고전번역원 이체자 검색시스템, 한자 유니코드 검색시스템에서(http://db.itkc.or.kr/DCH/index.jsp 빛날 화자의 이형자임을 근거제시하고,여러분의 종인들께서 송암집,중봉집,은봉전서에서
*확실한근거자료는 새로만든 홈페이지 건의 사항 28번을 참고바랍나다.24,29번,39번 우리 현종님들
700명 이상 검색하였습나다.대종회의 공식적 대답 이렇게도 저렇게도 ,안쓰기도 해왔으니, 양해바란다고.양해로 끝날일
아니지요.
* 대종회에서 이런 중요한 자료(신묘대보)를 발간하면서 이렇게도 기록되고 저렇게도 기록하고,예전부터 싸왔기에 등.. 애매하게 고압적으로 답변하면서... 잘못씌어진 근거를 대면 반론을 제기 하시든지 ,수긍하고 앞으로 의논하여 대책을강구 하겠다든지 수정하겠다든지 해야할게 공공의 기록 일을 맡으신 분들의 책무 아닐가요?--(대종회 사무실에 해본 말 입니다.)
봉강재 회장 선출에관한 건
* 봉강재를 잘 운영할 훌륭한 일군을 어떻게 선출해 잘해볼가? 보다 어떻게 하면 우리편 누구를 세울가?
에 혈안이 되어있었어요.
(시골 면 초등학교 급식소,화장실보다 못한 시설,설비 새벽에 화장실 가니...숙소에서는 한쪽에는 뜨거워서 ,한쪽에는 냉골이라 밤새 뒤척이고 냉탕,온탕을 왔다갔다 잠못자고 돌아와 3일간 감기몸살에...시조 참배 종인들의 거의 대부분은 방안애 회장실 ,부엌이 있어요 .내집사람이 시조묘제에와서 새벽에 밥하고 ,몇시간 배식하고,찬물에 설거지 하고...포항 부녀회에서 세분이 오셔서 봉사해 주셨는데 -내년에는 안오실거야 아마 아마-- 파평윤씨 대단한 양반집안인줄 아는데 집안여자들은 전혀 생각안하는가봐 하셨을거에요.우리의 내자들이 가서 제물 준비하고 손님 식사준비하고 설거지하고 한해만 해봤으면 어떠하리라 상상해보셨어요?진정 봉사하고 존경받을 인물을 회장으로 발굴할 수 있을 텐데 판이 이상하게 돌아가는겄 같아요.)
*울산종친회장님의 간곡한 당부에 희망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신도비문등에 잘못 씌어진데 대한 것은 대종회의 책임이 없으나 (신묘대보에 잘못 씌어진것은 책임있다고 사려됨),교통 정리해주시면 좋지않을가요?
* 동방예의 나라에-- 상경하애(上敬下愛)--정신이 있잖아요.윗 어른을 공경하고,나이 어린 아랫사람을 사랑해주라. 서로 조금만 더 참읍시다요.
*2500년전에 명현 공자님께서 -청년에는 혈기가 부실하니 性을경계하면 장년,노년에뒷탈이 없고,장년에는 혈기가 왕성하니 싸움(다툼을)경계하면 후회하지 않고,노년에는 혈기가 쇠퇴하니 탐욕(욕심을) 접어두면 패가망신 않느니라.서로 자기를 돌아보며 현명하게 살아갑시다요.나 부터
*건의사항
대종회에서 여러분들과 협의하여 이렇게 결정하였다 ㅡ발표해 주시면 따르겠습니다.
*동섬공 게서 쓰신글을 올려봅니다.현종님들 잘 읽어 보십시요.(이조판서를 하시면서도 종사에 힘쓰 주시고 1710년에 출생하시고 83세 수 하셨네요.존경합니다.)
*또한 댓글을 달아서 현종님들의 의견을 많이 써 주십시요
시조 태사공 묘는 재경주(在慶州) 기계현(杞溪縣) 벌야동(伐冶洞) 구봉산하(九峰山下) 유좌지원(酉坐之原)하니 公이 이동경유수(以東京留守)로 卒 우관(于官)하여 인장경주(因葬慶州)하고 배류씨(配柳氏)도 합장운(合葬云)이요. (高麗太祖王妃와 申壯節公 夫人이 皆柳氏云) 2世 벽상공신공(壁上功臣公) 墓는 벽상공신공(壁上功臣公) 南25里 증택지상북(甑澤之上北) 인좌지원(寅坐之原)하니 公이 질유(質留) 송경(松京)이라가 급졸(及卒)에 장인향경주(將引向慶州)할새 유괘감령(踰掛龕嶺)이라가 구차중절(柩車中折)하여 잉정장운(仍停葬云)이요. 配는 유씨운(庾氏云)이라. 3世 좌복야공(左僕射公) 墓는 상동운(上同云)인데 속칭 윤금릉(尹金陵)이요.(윤쇠능) 동원(同原)이다. 配는 정씨(丁氏) 왕씨운(王氏云)이니 각장(各葬)이라. 4世 소감공(少監公) 墓는 재파주(在坡州) 분수원건해용(焚修院乾亥龍) 임좌원운(壬坐原云)이요. 혹운(或云) 연안(延安) 신성면(新城面) 소식리(少息里) 개현하(介峴下) 자달동(紫達洞)이라 하니 未詳이라.(丁卯尋護) 配는 김씨(金氏)니 父에 은설(殷說)이요. 祖에 경순왕운(敬順王云)이라. 5世 문숙공(文肅公) 墓는 재파주(在坡州 南24里 분수원상(焚修院上) 간좌지원(艮坐之原)하니 전유교자총(前有轎子塚)하고 청용외(靑龍外)에 유전마총(有戰馬塚)이라. 配는 소성이씨(邵城李氏)니 墓는 재연안(在延安) 자달동운(紫達洞云)이라. 6世 문강공(文康公) 墓는 문숙공(文肅公) 墓와 동원(同原)이니 재상심상지원지묘(在上沈相之源之墓) 용미후운(龍尾後云)이라. 7世 이부시랑공(吏部侍郞公) 墓는 재임단석주원(在臨湍石柱院) 남향운(南向云)이라. 8世 서경유수공(西京留守公) 墓는 재임단석전곡(在臨湍石田谷) 유좌지원가대후(酉坐之原家垈後)하니 유입암(有立岩)하니 부인김씨(夫人金氏) 사비설매(使婢㐥梅)로 적석어동중(積石於洞中)하여 이표석뇌운(以表石磊云)이니 서유장곡(西有長谷)하고 북유장곡(北有長谷)하니 구수합갑파(溝水合甲破)라. 거석주원(距石柱院) 南5里요. 자문현공(自文顯公) 墓로 서거십리운(西距十里云)이라. (좌기종인사기<左記宗人私記>에 云 금위우원주묘계체의운<今爲禹原州墓階砌矣云>) 9世 녹사공(錄事公) 墓는 上으로 同이니 一云德峴南1리자좌(一云德峴南1里子坐)라. 10世 감찰어사공(監察御使公) 墓는 上으로 同하니 매송현상운(梅松峴上云)이라. (上同은 卽 同郡이요 비동록야<非同麓也>라)
『余昔年에 得見 長湍宗人 私錄 一紙하니 記 始祖 太師公 以下 10代 墳山及 4代 配位 頗詳而以其無考據로 不敢深信이러니 後來에 杞溪 汾水院 兩山之說이 相符하니 雖若이나 可信하여 亦意其附會譜牒所記而巳러니 今豊德兩世邱墓之重尋也에 其地名道里坐向俗稱이 與所錄으로 無一差爽하니 始覺其爲有稽之信籍也라 苟有能執是錄而竭誠求訪則少監公以下諸墓를 亦 安知無次第復尋之道乎아 今以豊山墓文으로 追刊於譜冊할새 仍以是錄으로 附之하야 以爲後人慿據之資云爾라 聖上5年 辛丑8月 下浣에 東暹은 謹識하노라.』→→
(解) 『 내가 옛날에 장단 종인 사록 한 장을 얻어 보니 시조 태사공 이하 10대 분산과 4대 배위를 자세히 기록하였으나 고증이 없어서 깊이 믿지 아니 하였더니 뒤에 기계와 분수원의 양산지설이 부합하므로 비록 약간이나마 믿음직하여 족보에 부쳐 기록이나 해 둘까 마음먹었더니 이제 풍덕의 안세묘를 다시 찾으매 그 지명과 도리와 좌향과 속칭이 그 사록대로 하나도 틀림이 없으니 비로소 그것이 증거가 뚜렷한 신적임을 깨달았노라. 진실로 이 사실을 가지고 정성을 다하여 찾으면 소감공 이하 모든 묘를 어찌 차례대로 다시 찾지 못하겠느냐. 이제 풍산묘문으로써 다시 보책을 간행할재 이 사록과 함께 부쳐 기록하여 후인에게 증거로 삼으라 이르노라. 성상5년 신축 8월 하완에 동섬은 근식하노라』
東暹公(27世, 號는 八無堂) 서기 1710 경인생, 1737년 太師심묘(28세), 1763년 문숙공심묘 및 계미보(54세), 1779년 공신공 복야공심묘(70세), 1781년 장단종인사록을 보첩에 기록 유훈(72세), 1792년 서거(83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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