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bs 역사스폐셜 98회. '외규장각은 왜 강화도로 갔을까?' (2001.01.13.)
98회 : 외규장각은 왜 강화도로 갔을까?
외규장각은 왜 강화도로 갔을까?
방송일: 20010113 조회수 : 1890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역사 스페셜 제 98회 사라진 보물창고 외규장각
김영환 PD
--------------------------------------------------------------------------
비디오 오디오
--------------------------------------------------------------------------
<프롤로그>
- 외규장각 터(16") 인천광역시 강화읍 고려궁지 안의 빈 터. 지금은 흔적조차 찾
을 수 없지만 130여년 전 이곳은 조선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
는 곳이었다.
- 쥬베르 스케치(10) 1866년 11월 19일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해군은 이곳을 철저
히 파괴했다.
- 복원한 외규장각(12) 사라진 조선의 보물 창고, 외규장각은 과연 무엇인가.
--------------------------------------------------------------------------
SUB TITLE 사라진 보물창고, 외규장각
--------------------------------------------------------------------------
V-ST. 1
- 쥬베르 그림(병사들 행군하는)
장녕전 올라가는 입구까지.
MC:여기 이 건물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볼 외규장각입니
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은 이곳에 보관된 360여점의 귀중품
을 약탈한 후 나머지를 모두 불태웠습니다.
그로부터 120여년 간 잊혀져 왔던 이 외규장각이 다시 우리
앞에 등장한 것은 1993년,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한 권의
책을 반환하면서부터 였습니다.
- 휘경원원소도감의궤
내려오고.
MC:휘경원원소도감의궤라는 바로 이 책인데요, 병인양요 당
시 프랑스군이 이곳에서 약탈해간 귀중품 중 하나였습니다.
- 휘경원원소도감의궤
MC:이 책이 돌아왔을 때 온 나라가 축제분위기였지만, 1970
년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는 이 책의 존재는 물론, 외규장
각이나 약탈당한 도서에 대해서 그다지 아는 바가 없었습니
다. 늦게나마 이 책이 돌아오고 외규장각의 존재가 부각되게
된 데는 한 재불 한인 학자의 끈질긴 노력이 있었습니다.
--------------------------------------------------------------------------
VCR1. 외규장각 문서가 발견되기까지.
--------------------------------------------------------------------------
- 규장각으로 들어가는 박병선 (16)
외규장각에서 약탈당한 책 300여 권의 행방이 밝혀진 것은
1978년. 당시 프랑스 국립 도서관의 사서로 근무하던 박병선
박사에 의해서였다.
- 규장각 열람실의 박병선(20)
외규장각의 약탈 도서를 찾는데 일생을 바친 박병선 박사. 외
규장각 도서 반환 문제가 한국과 프랑스 양국 간의 외교문제
로 비화된 이래 줄곧 언론 취재를 피해오던 박씨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박병선 인터뷰 SOV:같은 일하는 분이....동료직원이 왔길래 이런 이런 책이 있
냐고 물었더니 있어 그러더라구요.
- 책 발견 신문기사(23) 외규장각 도서가 강화도에서 약탈당한 지 백여 년,
박씨가 개인적으로 이 책들을 찾아 헤맨 지 20여년 만의 일이
었다.
SOV:정말 눈물 없이는 못 봤어. 그 번호가 나오는데 소름이
쫙 끼치고 말도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구.
-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의궤들.(17)
기록문화로서 세계적으로 자랑거리인 조선의 의궤들은 발견
당시 프랑스국립도서관 베르사이유 별관의 파손도서 창고에
방치돼 있었다.
- 겉표지(9) 겉 표지만 약간 훼손되었을 뿐 보관상태는 양호한 편이었는데
당시엔 중국서적으로 분류돼 일련번호가 붙어있었다.
SOV:책은 완벽한 상태였어요... 번호가 중국 몇 번 이렇게 쓰
여 있었어요....줄 하나 긋고 한국 그대로 넣고 있는 거예요.
- 달레의 교회사(15) 박병선 박사가 외규장각 도서의 행방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인 달레가 쓴 한국천주교회사를 읽으면서부터였
다.
- 복원된 외규장각에 화재(18)
1874년 파리에서 발간된 이 책에는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이
외규장각에 불을 지른 사실과 불을 지르기 전 이곳에서 서적
을 비롯한 360여종의 귀중품을 약탈해 본국으로 우송했다는
내용이 상세히 기록돼 있었다.
-박병선 인터뷰 SOV:거기에 목록으로써 금궤가 몇개고...그러니까 저는 그것을
봤으니까 틀림없이 가져 왔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죠.
- 쥬베르 여행기(13) 외규장각 도서의 행방은 병인양요에 참가했던 프랑스 해군장
교 주베르가 쓴 여행기를 통해 이미 프랑스 국내에 널리 알
려진 바 있었다.
"그 책들의 대부분은- 그 책들 중
어떤 것들은 훌륭한 그림으로
장식돼있는데- 그것은 현재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돼있다." (15)
주베르는 1873년에 '르 뚜어 드 프랑스'라는 잡지에 기고한
여행기에서 약탈한 외규장각 도서들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돼 있다고 밝혔다.
- 경고비(21)
그러나 프랑스군을 물리친 후 승리감에 도취해 쇄국의 문을 더
욱 굳게 걸어 닫았던 당시 조선 정부는 프랑스 측에 어떠한
책임 추궁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외규장각 도서 중 일부가
프랑스로 건너간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 모리스쿠랑의 조선서지(35)
외규장각 도서의 행방을 쫓던 박씨에게 결정적인 단서를 제
공한 것은 19세기 말 모리스 쿠랑이 편찬한 조선서지.
이 책에는 약탈한 외규장각 도서의 상세한 목록과 함께 그것
이 프랑스국립도서관에 보관돼 있다는 사실이 언급돼 있었다.
박씨는 이 같은 자료를 근거로 20여년 간 프랑스국립도서관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도서관 어디에서도 책을 찾을 수 없었
다.
SOV:번호까지 있는데 실물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거냐. 저는 생각하기를 1차나 2차대전 때 분실된 걸로 알았
어요.
- 파리국립도서관의 박병선, 책 (18).
그러던 중 프랑스 국립 도서관 베르사이유 별관에 근무하던
동료의 귀뜸으로 운 좋게 이 책들의 행방을 알아낸 것이다.
이때부터 프랑스 도서관에 있는 의궤들과 한국에 남아있는 의
궤들을 비교 연구한 박씨는 그 결과를 한 권의 책으로 발표
했다.
- 노태우에게 보낸 문서.(19)
한편 박씨는 한국정부에 이 책들의 반환 협상을 촉구했다. 그
결과 그는 프랑스국립도서관측에 밉보여 사직을 강요받았다.
SOV:그러니까 불란서 사람에게는 반역이 되었구요 한국 사람
들한테는 머리카락 잡혔죠. 그런 것을 발표 안해줬으면 이렇
게 복잡할 것도 없고 머리 아플 것도 없는데 왜 이 일을 말
들어놓고 남 못살게 구냐고 그러죠. 그래서 욕도 바가지로 먹
었어.
- 외규장각 도서 반환요청 기사(13)
그러나 박씨의 노력이 헛되지 않아 외규장각 약탈 서적의 반
환을 위한 노력이 다각도로 진행되었다.
- 미테랑의 의궤 전달 자료화면.(13)
1993년, 당시 한국의 고속철도건설 사업권을 놓고 일본, 독일
과 경쟁을 벌이던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은 외규장각 약탈
도서 중 한 권을 들고 와 협상에 임했다.
- 휘경원원소도감의궤(18)
상하 두 권으로 만들어진 '휘경원 원소도감의궤', 1822년에 사
망한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묘소 휘경
원 조성 사업을 기록한 이 책 한 권이 돌아오기까지의 역사
는 이렇게 길었다.
--------------------------------------------------------------------------
---------------------------------------------------------------------------------
V-ST 2
- 서재 세트.
MC:당시 미테랑 대통령은 휘경원원소도감의궤 뿐 아니라 프
랑스가 보관하고 있는 나머지 외규장각 도서들도 반환하겠다
고 언급했습니다. 그런데 고속철도 사업권을 따낸 후 프랑스
측은 무조건 반환은 있을 수 없다며 동등한 가치의 문화재와
교환하자는 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 의궤 한권 떨어지고
이게 바로 한국과 프랑스간에 외교 마찰을 빚고있는 문제의
의궤인데요, 우아한 장정에 특이한 손잡이...우리가 흔히 봐
온 여느 고서와는 다른 점이 많습니다.
- 한 장 넘기면
잘 쓴 글씨에 화려한 그림까지 곁들여있는 이 책, 의궤란 도
대체 무엇일까요? 대체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 물건이기에
국가 정상간의 합의까지 깨어가며 한사코 내주기를 거부하는
것일까요? 외규장각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이 책의 가치부터
알아야 합니다.
--------------------------------------------------------------------------
VCR 2. 둘도 없는 보물, 어람용 의궤
--------------------------------------------------------------------------
- 규장각, 서고 (15)
현재 우리 나라에 전해지고 있는 의궤는 모두 3500여 권. 그
중 정신 문화원의 장서각 서고에 보관되어 있는 일부를 제외
하고, 대부분의 책이 규장각 서고에 보관돼 있다.
- 가례도감 의궤(30) 조선전기부터 제작되기 시작한 의궤는 왕과 왕비의 책봉, 왕실
의 혼인과 장례, 왕과 세자의 책봉, 궁중 잔치, 궁궐 건축 등
다양한 국가 행사의 전말을 기록한 책이다.
- (상여) 의궤에는 행사의 절차가 예법에 적합한지를 사전에 왕에게 보
고한 내용과 왕의 지시를 받고 이루어진 행사의 전말을 글과
그림으로 상세히 기록했다.
- 가례도감의궤(CG)(21) 가례 도감 의궤 첫 장에 나오는 구절을 보면 의궤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이번 가례 시에 거행할 일을 전례에 따라 이렇게 이렇게 마
련했는데 이대로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이렇듯 의궤는 국가 행사를 앞두고 국왕에게 미리 보고한 행
사의 도상연습이기도 했다.
SOV:의궤는 한자어로 의식과 궤범이라는 뜻입니다. 즉 중요한
의식이 있으면 그것을 하나의 본보기로 삼아서 그 다음에 행
사가 있을 때 좀 저 그 모범적인 전례를 따라서 그대로 국가
의 의식을 치를 수 있게 하기 위한 목적에서 의궤가 편찬되
었습니다.
- 의궤의 그림(24) 행사가 끝나면 의궤청이라는 별도의 관청이 설치되어 행사에
동원된 인원과 물자 및 경비, 유공자의 포상, 설계도 등 구체
적인 내용까지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소중한 자료인 것이다.
의궤 자체의 값어치도 크지만 우리가 프랑스와 외교마찰까지
감수하며 굳이 외규장각 의궤의 반환을 요청하는데는 또 다
른 이유가 있다.
SOV:프랑스 해군이 가져간 외규장각 도서 가운데 의궤는 왕
실보관용으로서 왕이 직접 본다고 하는 어람용 의궤라는 것
입니다. 국내에도 의궤는 많이 남아있습니다. 물론 파리에 있
는 것보다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국내에 있는 것은 지금 용
어가 비어람용,분상용이라고 합니다만 대게 관련 관청의 보관
용입니다.
- 의궤 분산 CG(20) 의궤는 보통 예닐곱 권씩 만들었는데 그 중 네 권은 4대 사고
에 하나 씩 보내고, 한 두 권은 예조 등 관련 관청에 비치되
었다. 특히 국왕 전용의 어람용 의궤는 임금이 열람한 후 규
장각에 보관하다 1782년 외규장각이 설치되면서 그 후부터
강화도에 보내져 특별히 관리되었다.
- 의왕영왕책봉의궤(20) 따라서 병인양요 이전에 제작된 어람용 의궤는 모두 프랑스
에 가 있고, 국내에 있는 의궤는 거의 사고와 관련 부서에 보
관되어 전해진 소위 분상용인 것이다. 내용은 같지만 어람용
의궤와 분상용 의궤에는 차이가 있다.
- 표지비단 비교(6) 우선 겉표지만 하더라도 어람용은 비단으로 장정을 해 삼베를
표지로 쓴 분상용에 비해 호화로웠다.
- 경첩 고리( 15) 장정도 어람용은 화려한 문양의 놋쇠 물림에 다섯 개의 국화
모양의 정을 박았는데 분상용은 무쇠 물림에 세개의 정을 박
는데 그쳤다. 고리 또한 확연히 구분된다.
- 종이(6) 종이 또한 어람용은 최고급 초주지를 사용한 반면 분상용은
일반 닦종이를 사용했다.
- 그림(15) 내용물을 기록하는데도 어람용은 당대 도화서의 최고 화원이
그림을 그린 반면, 분상용 의궤의 그림은 그 정교함에서 차이
가 난다.
- 인찰(15) 특히 어람용 의궤가 분상용에 비해 공을 들인 부분은 글씨를
쓰기 위해 줄을 그은 주홍색 인찰이다,
SOV:어람용의 경우 인찰작업을 할 때 화원이 당주홍이라고
하는 붉은 색 안료를 써서 일일이 손으로 긋는 수작업을 하
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냥 목판으로 쭉 인찰장을 찍어내는 것
하고는 정성과 들어가는 재료면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
이죠.
- 남문현, 물시계 부품 (40)
보관 장소로 가는. 어람용 의궤라는 점 외에도 외규장각 의궤에는 또 다른 중요
한 사항이 있다. 건국대 전기공학과 남문현 교수. 그는 외규
장각 의궤 때문에 천당과 지옥을 오간 적이 있었다.
1980년대 중반 남교수는 세종 때 만들어진 두 종류의 물시계
를 복원하는데 골몰하고 있었다. 당시 그가 재현하려 했던 것
은 장영실이 만든 보루각 물시계와 흠경각의 옥루라는 자동
물시계.
SOV:요즘 말하자면 컴퓨터 기능을 갖는 제어회로가 들어있
어...경점을 자동적으로 알려주던 시계죠.
- CG 세종실록(18) 다행히 보루각 물시계는 현재 실물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고,
실록에도 상세한 기록이 있어 복원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지
만, 흠경각 옥루는 실물도 없고, 실록에도 간단한 기록밖에
없어 복원할 방법이 없었다.
SOV:흠경각의 옥루라는 시계는...굉장히 애를 먹었습니다.
- 정조실록 (20)
기록이 없어 고심하던 중 남교수는 정조실록에서 결정적인 단
서를 발견했다.
실록에 따르면 정조가 흠경각 물시계의 중건을 지시하며 시계
만드는 법을 상세히 기록한 옛날 문헌을 읽어보았다는 것이
다.
SOV:정조께서 그런 책을 봤다면 그 책이 어디엔가 있지 않겠
는가? 이렇게 생각한거죠.
- 외규장각 형지안
"흠경각영건의궤,보루각수개의궤 (20)
남교수는 그 문헌의 존재여부를 사학계에 문의했고, 확인 결
과 광해군 때 보루각과 흠경각을 중건할 때 제작된 두 종의
의궤가 외규장각에 보관돼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제작
과정과 설계도를 상세히 기록하는 것이 의궤이기 때문에 그
것만 찾으면 흠경각 물시계 재현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SOV:그러나 이 보루각하고 흠경각 수개의궤는 부본이 없었어
요....프랑스군이 약탈한 의궤 목록에 이 의궤는 없었다. 그렇
다면 병인양요 당시 불탔다는 것.
- 두 의궤 불타는 장면(17) 당시 외규장각에 보관된 의궤 중 부본이 전해지지 않은 유일
본이 275책. 그 중 40여 권이 약탈당하고 235권이 소실됐는데
남문현 교수가 찾던 책 또한 그 중 하나였다.
SOV:지금와서 생각해보면....참 분통터지는 일이고.
--------------------------------------------------------------------------
V-ST. 3
--------------------------------------------------------------------------
- 서울도성도에 선 MC
MC:외규장각에 보관됐던 병인양요 이전의 어람용의궤는 모두
불타거나 약탈당했습니다.
- 옆에 경모궁의궤 떨어지고
그런데 어떤 셈인지 이 경모궁 의궤 한질 만은 화를 면해 국
내에 전해오고 있습니다.
- 물림쇠 복원
초록색 비단으로 장정한 이 책, 아쉽게도 물림쇠가 떨어져 나
갔지만 원래는 바로 이와 같이 아름다운 모습이었을 것입니
다. 이 의궤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추모하기 위해 경모
궁을 세운 전말을 기록한 책인데요 이 책이 화를 면하게 된
데는 재미있는 사연이 있습니다.
- 창덕궁에서 경모궁으로 이동.
MC:이곳이 바로 이 의궤를 참고해서 복원한 경모궁입니다.
한번 들어가 볼까요?
- 경모궁으로 들어가서.
1782년 정조는 그 당시까지 전해오던 모든 어람용 의궤를 외
규장각으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사도세자와 관련된 경
모궁 의궤만은 별도로 이곳에 보관했습니다. 아버지가 생각날
때마다 와서 보기 위해 그랬다는데 정조의 효심이 이 의궤를
살린 셈입니다.
그런데 정조가 이 책을 뺀 나머지 어람용 의궤들을 모두 강화
도로 옮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
VCR 3. 외규장각은 조선 왕조 최고의 보물창고였다
--------------------------------------------------------------------------
- 탕평비(13) 18세기 영,정조 시대에 조선이 최고의 문화 전성기를 누린
배경에는 탕평책을 기반으로 한 강력한 왕권이 있었다.
- 정조초상(8) 특히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파 싸움의 결과로
이해했던 터라 즉위 초부터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 규장각 실사(20) 1776년 스물 다섯 살에 왕위에 오른 정조는 즉위 즉시 규장각
설립을 명했다. 창덕궁 후원에 주합루라는 2층 건물을 지어
규장각의 중심 건물로 삼도록 했다.
SOV:아버님이 죽음을 당하고 나서...세손으로서의 위치가 아주
불안했다.근데 왕위에 오르고 나니까 자기의 지지기반이 필요
했던 거죠....이미 숙종때 세운 규장각이라는 것을 빌어서 새
로운 정치기구를 만들어 낸 것이다.
- 주합루 2층+1층(10+8) 정조는 이 건물 2층에 주합루란 간판을 달아 신하들과 학문과
정사를 논의하는 장소로 썼다.
아래층은 규장각이라는 편액을 달고 자신의 왕권을 상징하는
물품들을 보관하기로 했다.
- 주합루 간판(20) 원래 규장이란 제왕이 지은 시문이나 조칙 등의 글을 가리키
는 용어인데, 정조가 이곳에 자신의 글과 인장, 서책 등 왕권
을 상징하는 물품을 보관하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SOV:규장각이 그런 유학을 중요시하는 그런 기구로서 만들어
진 기구지만 실제로는 정조에게는 자기가 정적을 타도하는
그런 기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초기에는 정치기구의
성격이 확실하다.
-동궐도(30) 규장각에 자신의 글과 책, 인장, 서류 등을 보관한 정조는 주
합루 서남쪽엔 봉모당을 두어 역대 선왕들의 유물을 보관케
했다.
또 열고관, 개유와, 서고 등 도서관을 지어 젊은 신하들이 이
곳에서 정책을 개발하도록 해 이들을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키웠다.
- 건물(15) 국왕 자신의 상징물을 보관하고 국내외의 수많은 서적들을 망
라해 정책을 수립하고 결정했던 이곳 규장각은 강화된 왕권
의 상징이자 정조시대 핵심 권력기관이었다.
- 강화도/
외규장각 현장(37)
통치체제를 정비한 정조는 1872년 이곳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설립했다.
외규장각은 규장각에 보관되었던 책들과 왕실의 유물들 중 영
원히 보존할 가치가 있는 상징물들을 보다 안전하게 보관하
기 위해 건립한 특별서고였다. 정조6년 건물이 완성되어 왕실
의 책보, 어필, 주요 서책 등 762종 4892책이 이곳으로 봉안
되었다.
SOV:정조의 정치는 파벌을 억제하고 백성들에게 직접 호소하
는 정치. 왕실의 권위에 관련된 물품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
해서 외규장각 설립을 명했다.
-------------------------------------------------------------------------
--------------------------------------------------------------------------
V-ST 4
- 강화부 궁전도 F.S 앞
MC가 서 있다.
MC:바로 옆에 보이는 이 건물이 외규장각입니다. 우리가 살
펴봤듯이 외규장각은 조선왕조의 근본이 될만한 중요한 물품
들을 보관하기 위한 만든 일종의 보물창고였습니다.
-MC,외규장각 대문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 내부에 옥책,금보,의궤 등
떨어지고
MC:왕이나 왕비의 책봉사실을 옥에다 기록한 옥책, 그리고
왕권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금보, 또 국왕 전용의 어람용
의궤 등 왕실 차원에서 영원히 보존할 가치가 있는 물품들을
보관했던 것입니다.
MC:정조가 죽은 후 창덕궁의 규장각은 단순히 도서를 관리하
는 기구로 전락했지만 이곳 강화도의 외규장각만큼은 그 역
할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조선 왕실이 이토록 귀중한 물건들을 서울이 아닌 이
곳 강화도에 보관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
VCR 4. 최고의 보장처, 강화도
--------------------------------------------------------------------------
- 바다(35) 고려시대 몽고군의 침입에 맞서 근 40년 간 항전한 역사를 가
지고 있는 강화도. 수도 서울과 60km 밖에 떨어지지 않은데
다 한반도의 남과 북을 잇는 해로상의 요지라는 점에서 일찍
부터 국왕의 피난처로서 주목을 받았다.
- 해안. 개펄(24) 특히 물살이 급한 해로와 드넓은 개펄이 강화도를 천연적인
요새로 만들었다. 조선 초기만 해도 강화도에서 배를 댈만한
곳은 북쪽으로 지금의 승천보 쪽과 동쪽으로 갑곶 등 두어
곳에 불과했다. 이런 이유로 강화도는 조선초기부터 확실한
보장처로 꼽혀왔다.
SOV:보장처란 전란시에 왕이 조정이 있는 도성을 떠나 의지
하여 수비하면서 난을 극복해 낼 수 있는 곳이란 뜻으로 최
후의 안전지대란 의미.
- 정족산 사고(29) 더구나 강화도는 임진왜란 때에도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전쟁 후 선조가 4대 사고 중 유일하게 불타지 않았던 전주
사고의 서적들을 이곳 정족산 사고로 옮긴 것도 강화도가 비
교적 안전하기 때문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 강도지도(19) 이후에도 강화도는 보장처로서 구실을 톡톡히 했다. 후금의 등
장으로 북방 정세가 복잡해지자 광해군은 강화도에 태조의
어진을 모셨다. 정묘호란 이후 인조는 또 다른 화가 닥칠 때
를 대비해 강화도에 임금의 임시 거처인 행궁을 세웠다.
- 강화주행. 넓은 들판들(11) 보장처로서 강화도의 위상을 한층 높여 준 것이 이곳의 비옥
한 토지. 특히 강화도는 개펄이 넓고 해안의 굴곡이 심해 간
척사업에 최적지였다.
-고려사절요 "좌둔전 우둔전 설치"(17)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이미 간척이 시작되어 고려
고종 때 제포,와포에 둑을 쌓아 좌둔전을, 이포, 초포에 둑을
쌓아 우둔전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 지도상에 간척지 CG로 표시.(21)
이렇게 국가 주도로 강화도에 처음으로 간척을 한 것은 고려
때부터다. 강화도로 임시 수도를 옮기면서 몽고군과 장기전을
펼치면서 군량 문제를 자체적으로 해결하려는 목적에서 시작
됐다.
그 뒤 임진왜란이후 강화도 간척은 본격적으로 이뤄진다..
당시만 해도 마니산은 강화도와 떨어진 섬이었는데, 숙종 무
렵 간척이 활발해지면서 지금처럼 하나의 섬으로 연결되었다.
당시 간척사업의 규모를 여실히 보여주는 곳이 이곳 선두평.
- 간척지, 선두포 축언 시말비
강화 유수 민진원이 숙종의 명으로 만든 이 선두평은 간척지
주위가 무려 30리에 이르렀다.
현재 도로로 사용하고 있는 이곳이 숙종 당시에 조성한 선두
포 제방이다.
그런데 간척사업으로 토지는 크게 늘었지만 문제가 생겼다. 개
펄이 줄어들어 지형이 변하면서 배가 정박할 수 있는 곳이
늘어난 것이다.
SOV:그 전 만해도 뻘이 상당히 넓은 지역이었는데....이제 예
전과 같이 상륙하지 못할 지역은 아닌거죠. 이미 청의 침략에
의해 가지고 이미 경험했으니까요.
- 현종실록 권8(효종실록) (19)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가 청나라 군대에 함락된 이후 배를 댈
곳이 많이 생겨 방어에 문제가 생겼다는 지적은 꾸준히 제기
되었다.
"만약 적이 조강으로부터 배를
이용하거나 혹 떼를 타고 흐름을
따라 내려온면 어느 곳이고 배를
댈 수 있어 방어하기가 어려울 것"
- 외성의 흔적들(20) 이같은 문제점 때문에 북벌 정책이 논의되던 효종 때에는 만
일의 사태에 대비해 동쪽 해안선을 따라 외성을 쌓았다.
- 바다(12) 또 숙종 때에는 강화해안 전역에 각 부대의 감시 초소에 해당
하는 돈대를 설치했다. 오삼계의 난으로 청나라의 정세가 혼
란해지자 강화도의 중요성이 한층 강조된 것이다.
- 돈대 실사(23) 망루와 포대의 기능이 결합된 돈대는 임진왜란 이후 불랑기
라는 신 화포가 중국에서 도입하면서 생긴 새로운 전술개념
이다. 조준사격이 가능해진 대포가 등장하자 예전처럼 해안을
따라 성곽을 축조하지 않고 해안선에 일정 간격으로 원형 형
태의 작은 성곽인 돈대를 세우는 게 방어하기에 효율적이라
고 판단한 것이다.
SOV:돈대는 애초엔 척후의 개념...그런데 정확한 화포가 개발
되어 교차사격으로 해안을 방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
다.
- 돈대(12) 숙종 5년 49개의 돈대가 만들어졌는데 특히 북쪽 조강 유역과
김포를 마주보는 염하 일대에 집중적으로 세워졌다.
- 돈대의 사격라인 CG (20)
돈대의 포구는 굴곡이 심한 강화해협의 특징을 잘 이용해 설
계되었다. 만으로 상륙하는 적에 대해 돈대와 돈대 사이에 교
차사격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 강화 지도에 12진보 이동,
통어영 이동 표시(29)
요새화 작업과 함께 통합 방어망도 정비되었다. 인조 때는 남
양만 화량에 있던 경기수영을 강화도로 옮긴 뒤 삼도수군통
어영으로 확대 개편했다. 북벌을 준비하였던 효종 때에는 영
종진과 초지진, 제물진,승천보 등 원래 경기도 서부 육지 쪽
에 있었던 진과 보를 강화도 가까이로 속속 재배치하였다.
SOV:삼도수군통어영은....유수가 경기,충청,황해 일대 해안방
어를 총괄함으로써해 강화도는 보장처일 뿐 아니라 수도 외
곽 방어의 총본산으로 그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
- 나무(20) 이렇게 막강한 방어체계를 갖춤으로써 조선의 왕들은 강화도
는 어떤 경우에도 함락되지 않을 땅이란 확신을 가졌다.
이런 강화도이기에 1782년 정조는 이곳에 외규장각을 세웠던
것이다.
--------------------------------------------------------------------------
--------------------------------------------------------------------------
V-ST 5.
- 강화도 고지도에서
문수산성을 바라보며.
MC:제가 서 있는 이 곳이 바로 강화도의 갑곶입니다. 조선의
역대 국왕들이 강화도를 얼마나 중시했는가 하는 것은 저기
김포 쪽에 바라보이는 문수산성 성벽을 보면 잘 알 수 있습
니다. 최후의 보장처인 강화도를 지키기 위해 성벽을 서울 쪽
을 향해 쌓았던 것입니다. 또 특이한 점은 성문입니다. 보시
는 것처럼 성문을 강화도와 마주한 바다 쪽에 낸 것입니다.
유사시 군대의 비상 통로로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외곽에다 성을 쌓고, 천험의 요새에 진과 보를 설치한
데다, 외성과 돈대까지 쌓은 후 비로소 외규장각을 세운 것입
니다.
- 돌아서서 행궁터쪽으로
걸어가는 MC
MC:여기에서 강화 행궁까지는 10리 길.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외규장각에 왕권의 상징물을 보관했다고 하는데 그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물품이었을까요? 그리고 그 귀중품들
은 어떻게 보관돼 있었을까요?
--------------------------------------------------------------------------
VCR 5. 영상복원, 외규장각
--------------------------------------------------------------------------
- 외규장각 터(17) 강화군은 5년 전부터 외규장각 복원을 위한 발굴 조사를 시작
했다. 외규장각의 정확한 위치를 찾기 위해서이다.
- 벽돌(7) 현재까지 세 차례에 걸쳐 발굴 조사를 했지만 외규장각의 정
확한 위치를 아직 밝혀내지는 못했다.
- 담장 뒤쪽으로(20) 원래 이곳은 고려시대에는 고려궁이, 조선시대에는 조선 행궁
이 있던 곳이다. 외규장각 이외에도 이곳에는 여러 건물이 있
었던 데다 병인양요로 불탄 이후에는 이곳에 주민들이 살아
건물의 배치를 가늠하기가 힘들다는 게 발굴 관계자의 설명
이다.
SOV:여기는 아마 취사를 위한 조그만 부속건물이 있었던 자
리가 아닐까.
.
- 우물 (10) 현재 발굴 팀이 외규장각의 유력한 추정지로 꼽고 있는 곳은
70년대 조성한 고려궁지 뒤쪽이다. .
SOV:지금 현재 이 담장들이 담장의 뿌리만 남아있거든요. 이
담을 제거해야만 담장이 어떻게 끝나는지 알 수 있고 아마
이 안 쪽에 외규장각지가 남아있을 것으로 생각해.
- 담장의 뿌리부분 벗기고(20)
고려궁지 뒤편에 옛 담장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70년대 고려
궁지를 성역화하면서 졸속으로 세운 담장 때문에 발굴 작업
이 어려움에 부딪쳤다. 이것을 철거하고, 그 안쪽을 발굴해
보면 외규장각의 일대의 건물 배치를 알 수 있다.
- 강화부지의 외규장각 위치.(14)
1783년 강화유수 김노진이 편찬한 '강화부지'는 행궁 일대를
복원하는 중요한 자료다. 이 책에서 외규장각은 행궁의 동쪽,
진전으로 표기된 장녕전의 서쪽에 세워진 것으로 되어있다.
- 강화부 궁전도1,2(48) 외규장각의 위치를 확인해 줄 또 하나의 자료는 국립중앙도서
관에 소장돼 있는 강화부궁전도이다.
고종 18년 강화 행궁 일대를 복원하려는 목적에서 그린 이 지
도에도 행궁의 오른 쪽 아래 외규장각이 들어섰음을 보여주
고 있다.
정면 6칸의 외규장각 건물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 강화부궁전도 CG 모두 네 장으로 이뤄진 궁전도를 합성하면 행궁 일대의 건물
배치가 한 눈에 들어온다.
- 강화행궁 터에 각 건물의(35)
위치를 표시. 그렇다면 이 건물들의 실제 위치는 어떻게 될까?
언덕 위 큰 나무 뒤편에는 영조의 영정을 모시던 만녕전이, 그
리고 지금의 명위헌이 있던 자리가 장녕전이 있던 곳이다.
그 옆으로 빈터가 바로 외규장각이 있었다.
서쪽 끝으로 인조때 세운 행궁이 자리하고 있었다.
- 행궁터 마지막 PAN하며 그런데 외규장각 내부에는 어떤 물건들이 어떻게 보관돼 있었
을까?
- 외규장각 형지안(25) 1857년에 작성된 외규장각 형지안.
외규장각 소장품 목록 격인 이 책에는 보관됐던 물품의 명칭
과 숫자, 그리고 보관 위치까지 상세히 기록돼 있다.
- 형지안 넘어가고 봉안장 관련 장(13)
예를 들어 한 가운데에는 봉안장이 있어 왕과 왕족의 신분을
상징하는 금보, 옥책, 교명, 옥보, 죽책 등을 보관했다.
- 영상복원 외규장각 (2'03)
외규장각 형지안에 따라 130년 전 외규장각 내부를 복원해보
자. 우선 외규장각 내부 한 가운데에는 봉안장이라는 장이 하
나 있었다.
봉안장 안에는 왕과 왕비의 책봉 사실을 옥에 새겨서 기록한
옥책과
왕자나 공주 등 왕족을 책봉할 때 대나무 쪽에 기록한 죽책이
있었다.
백철로 주조하고 황금으로 도금해 만든 임금의 인장 금보,
왕의 친필 등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품목 등이
이 장 안에 보관돼 있었다.
- 장의 문이 하나 둘 열리면
장에서 옥책,죽책,금보,옥보, 등이
하나씩 나온다.
- 봉안장→ 좌 우 탁자 복원.
봉안장 좌우에는 두 개의 탁자가 있었다. 왼족 탁자에는 병풍
과 탁본, 서화 등 족자류가 보관됐고 오른쪽 탁자 위에는 귀
중품을 담은 4개의 상자가 올려져 있었다. 이 안에는 정조 윤
음과 어제 등 역대 왕들의 유물이 보관돼 있었다.
- 동탁 1,2 및 소탁 복원 동쪽에는 큰 탁자가 있어 고금의 중요한 서적들이 보관돼 있
었다.
- 북좌우탁, 서탁 복원 북쪽에는 큰 탁자가 두 개 있었는데 바로 이곳이 의궤를 보관
하던 곳이었다.
단일 품목으로는 숫자가 가장 많았던 의궤는 북탁을 채우고
모자라 서쪽 탁자까지 이어졌다.
- 완성된 외규장각 내부
SK 1866년 이곳에는 왕실관련 귀중품과 의궤, 일반도서 등 총
5067권의 도서가 보관돼 있었다.
--------------------------------------------------------------------------
--------------------------------------------------------------------------
V-ST. 6
- 복원된 외규장각 안에서 MC
MC:병인양요 당시 이곳에 보관돼 있던 귀중품들은 하나 하나
가 국보급 가치를 갖는 물건들이었습니다. 금보나 옥인, 옥책
과 같은 물건은 물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물건들이었고 왕
의 친필서한이나 주요 문서 또한 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게
다가 바로 저기에 보관되었던 어람용 의궤 중에도 부본이 없
는 유일본이 무려 275권이나 됐습니다.
- 외규장각 사라지고
쥬베르의 강화성 함락도
MC:그런데 19세기 들어 이양선이 출몰하면서 이 천험의 요새
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개항을 요구하던 열강들이 한
결같이 수도 한양의 관문 격인 강화도를 주목했던 것입니다.
결국 강화도는 1866년 로즈사령관이 이끌던 천여명의 프랑스
극동함대에 의해 허망하게 무너졌습니다.
--------------------------------------------------------------------------
VCR 6 외규장각은 왜 그렇게 쉽게 불탔나?
---------------------------------------------------------------------------------
- 침범로 CG(10) 1866년 10월 11일 프랑스 극동함대 로즈 사령관은 조선의 프
랑스인 신부 처형을 구실로 군함 7척에 1460명의 병력을 싣
고 중국 산동성 체푸를 출발해 강화도를 침범했다.
- 쥬베르 그림(15) 3일 후 그들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강화도 제 1의 군사
적 요충지인 갑곶에 상륙한다.
- 리델사진(12) 이때 길잡이로 동행했던 리델 신부의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강화도는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오죽했으면 프랑스군이 조선
이라는 나라를 걱정할 정도였다고 전했다.
- 리델문서1. 2차보고서 (24)
도착 즉시 프랑스 장교 몇이 뭍에 올라가서 요새를 둘러보았
다. 이들은 요새 안에서 포가도 없고 녹이 슨 보잘것없는 대
포 몇 문을 발견하고는 이 불쌍한 민족이 방어를 제대로 해
낼까 도리어 걱정스러울 정도였다고 리델 신부는 적고 있다.
- 쥬베르 그림(16) 갑곶에 상륙한지 이틀째인 10월 16일 프랑스군은 강화 남문을
공격해 단 한 명의 피해도 없이 손쉽게 강화 유수부를 점령
했다.
- 갑곶돈대(12) 당시 강화도를 지키던 조선군 병력은 육해군 합쳐서 2000 여
명. 하지만 이는 명부상 숫자에 지나지 않았다.
- 남장포대(26) 수대에 걸쳐 외성과 내성을 쌓고 거기에다 돈대까지 쌓은 강
화도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진 이유는 무엇일까?
SOV:당시 정규군은 훈련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사격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그런 상태.
- 쥬베르의 프랑스군 행진도 그림.(13)
강화읍을 점령한 프랑스군은 강화 일대에 정밀 수색을 실시했
다. 이들은 화약과 대포 그리고 소총이 만여 자루나 보관된
엄청난 규모의 무기고부터 접수했다. 점령군은 한 창고에서는
대량의 은괴까지 발견하였다.
- 로즈 보고서(35) 당시 로즈 사령관은 은괴를 수습하고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본국에 보고했다.
한 창고에서 은괴 18개 상자를 발견했습니다. 본인은 즉시 위
원회를 구성해 그것을 정확히 계산하고 숙영지로 운반케 했
습니다. 위원회는 그것이 195,217프랑의 가치가 있음을 인정
하였습니다.
프랑스군이 발견한 이 열 여덟 상자의 은괴는 어떤 용도로 마
련된 것이었을까?
SOV:비상시에 사용할 돈은 봉고은이라 그래서 은으로 마련하
고 있었습니다. 봉고라는 것은 이건 딱 도장을 찍어놓고 궤짝
에 넣어놓고 도장을 종이로 발라서 도장을 찍어버립니다. 그
러면 허가 없이는 누구도 열 수 없죠.
- 쥬베르의 그림 중 집안에서
글을 쓰는 양반 그림. (27)
무력으로 손쉽게 강화읍을 점령했지만 당시 프랑스군은 조선
사람들의 문화수준에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프랑스 해군장교 주베르는 귀국 후 쓴 조선 여행기에서 다음
과 같이 기록했다.
- 잡지 '세계일주' 중 주베르의 글(14)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또 한가지는 아무리 가난한 집
에라도 언제든지 책이 있다는 것이다.
- 스케치, 규장각 건물(17)
가정집의 책을 보고 자존심이 상했던 프랑스군인들이 의궤를
비롯한 외규장각의 책들을 봤을 때 어떤 느낌을 가졌을까?
- 리델문서2. 보고서(18)
리델신부는 보고서에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이 책들의 뛰어난 인쇄술과 양피지로 만든 것과 같은
종이, 글자를 금으로 상감해 만든 수많은 책들과 구리 경첩에
구리로 된 죄는 쇠붙이로 장식한 제본술을 보고 감탄했다.
- 약탈 목록(40) 로즈는 위원회를 구성해 물품들을 수습하고 본국 해군성 장관
에 목록을 보고했다.
가철된 큰 책 300권, 가철된 작은 책 9권, 그리고 흰색 상자에
든 소책자 수십 여 권과 한중일 지도 하나, 천체도 하나, 그
리고 족자 7점, 옥책 3점과 옥책함 3점, 갑옷과 투구 등 모두
359점. 이들은 보고서에는 이때 이미 약탈품들을 자기 나라
국립 도서관에 소장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고하기도 했다.
가철된 300권 표시(9) 가철된 300권, 이것이 바로 현재 반환문제의 전면에 떠오른
의궤들이다. 로즈가 특히 의궤를 주목한 이유는 무엇이었을
까?
SOV:제일 먼저 장정이 잘 돼 있죠....이건 중요한 고문서다 그
렇게 생각하고 가져갔을 거예요.
- 불타는 외규장각 (15) 11월 9일 정족산성 전투에서 양헌수 부대에 일격을 당한 로즈
사령관은 이튿날 황급히 철수하면서 조선 행궁 일대를 모조
리 불태웠다. 이로써 조선의 보물창고는 외규장각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 프랑스 국립도서관(15) 약탈품 가운데 가장 먼저 소재가 정확히 확인된 것은 의궤.
300권의 의궤 중 박병선 박사에 의해 297권이 먼저 확인되었
고 나머지 두 권은 일반도서로 분류되어 프랑스국립도서관에
보관 중인 사실이 학자들에 의해 추가로 밝혀졌다.
- 서류를 뽑는 이태진 300권의 의궤 중 나머지 한 권의 행방은 이태진 교수에 의해
확인됐다.
SOV:이게 영국에 가 있는 기사진표리진찬의궤라는 겁니다.
- 의궤 사진들(8) 1992년 이 교수는 영국에 유학 중이던 한 한국학생과 이야기
를 나누다가 결정적인 제보를 받았다.
SOV:그 학생한테 의궤 이야기를 했더니...제가 귀가 번쩍 띄어
서.
- 기사진표리진찬의궤(52) 곧바로 런던의 국립도서관에 달려간 이 교수는 기사진표리진
찬의궤라는 이 책이 외규장각 도서 중 마지막 한 권임을 확
인하고 직접 사진을 찍어와 공개했다.
1809년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의 회갑연을 맞아 옷감과 음식
을 올리는 의식에 대한 전말을 기록한 의궤였다. 이 의궤에는
회갑잔치에 동원된 사람들의 배치는 물론, 악대의 배치와 동
원된 악기의 모양과 명칭 등 회갑 잔치의 이모저모가 화려한
그림과 함께 상세히 기록돼 있었다.
SOV:그림을 보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최상품이었다.
- 영수증(30) 프랑스군이 약탈한 이 책이 어떻게 영국까지 건너가게 되었을
까? 런던 대영 도서관에는 그 경로를 알려주는 영수증이 남
아있었다. 영수증에는 그것이 조선의 왕실 의식을 기록한 책
이라는 점과 1894년 10월 14일 대영박물관이 파리의 한 치즈
상회로부터 10파운드에 구입했다고 적혀 있었다.
- 이태진(T13-2 38:35)
SOV:누군가가 파리 국립도서관에 들어간 의궤 중에 하나를
빼낸 것입니다. 돈이 될 거라고 생각한 겁니다.
--------------------------------------------------------------------------
V-ST 7
- 복원된 외규장각에서 걸어나온다.
외규장각 도서들은 이렇게 프랑스 뿐만 아니라 영국에 있는
것도 있습니다. 또 프랑스가 약탈해간 360여 점 중에는 의궤
외에 아직까지 행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 많습
니다.
이런 것들도 행방이 밝혀져 아울러 반환을 받도록 노력해야겠
지만, 프랑스는 소재가 밝혀진 의궤 조차도 쉽게 내주려 하질
않습니다. 남의 문화재를 약탈해 갔으면 당연히 돌려줘야 하
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지만 국제사회에서 이런 상식도 통하
지 않나 봅니다.
정조가 만들었던 강화도의 외규장각-
120여년 전 프랑스 군에 의해 불탔던 외규장각은 이제 아픈
역사를 잊고 복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가 진정 복원 되길 원하는 것은 단지 건물 만은 아닙니다.
그곳에 있었던 소중환 문화 유산들도 원래의 자리에 놓여져야
할 것입니다.
- 불타고 있는 외규장각 부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