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밖으로 또는 오를라몽드/ 르 클레지오

[최분임]

세상 밖으로 또는 오를라몽드

르 클레지오

―존재했던 사건들 간의 완전한 유사성은 불가능하다―

아나는 큰 고딕식 창문의 창틀에 앉아 있다. 그곳은 아나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장소이다. 이 세상에서 바다와 하늘이 가장 잘 보이는 장소이기에 그녀는 그곳을 사랑한다. 그곳은 바다와 하늘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곳이다. 마치 대지와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완전히 고립된 채, 아주 높고 매우 비밀스러워 누구도 자신을 찾지 못할 것만 같아 아나는 그곳을 선택했다. 절벽에 매달린 한 마리 바닷새의 놀이터 같았고, 그 바닷새는 온 세상 위로 날아갈 것만 같았다. 아나는 이 장소를 찾아냈던 일에 무척 만족스러워했다. 아주 오래전, 이 년 전. 아마도 오래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가 아프리카에서 돌아왔을 때였다. 그때 피에로는 어지러워서 절벽 아래에 남아 있었고 그녀는 절벽 틈새와 튀어나온 돌을 이용해 돌벽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그녀는 회랑까지 다다랐다. 올라갈 때마다 그녀도 조금 어지러웠지만 동시에 심장이 너무 강하게 뛰어서 도취 상태에 빠졌고, 이것은 그녀의 힘을 배가시켜 꼭대기까지 그녀를 밀어 올리곤 했다.

그녀가 벽 위에 도착했을 때 그리고 손가락 아래로 창문 가장자리를 느꼈을 때 그것은 정말 좋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입구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등을 돌기둥에 기대고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리고 그전에는 한번도 본 적 없었다는 듯 하늘과 바다를 보았다. 조금 완만한 곡선을 한 선명한 수평선, 거품으로 가장자리를 감춘, 움직이지 않는 듯한 파도가 치는 광활한 어둠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아무도 올 수 없는 아나의 방, 아나의 집이었다. 그녀가 이곳에 올 때면 피에르는 절벽 아래의 벽 앞까지 와서는 바위 틈, 잡초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망을 보곤 했다. 때때로 아나는 피에르가 부는 높은 휘파람 소리, 아니 바람결에 실려 오는 신호를 듣곤 했다.

“오오오에……!”

그녀는 피에르처럼 양손을 입에 대고 대답했다.

“오에오에……!”

그러나 그들은 서로를 보지 못했다. 아나가 이곳, 그녀의 집에 있을 때면 하늘과 바다 이외에는 어떤 것도 보지 못했다.

그녀 앞으로 태양이 지나갔다. 햇빛은 알코브(침실 벽을 파서 침대를 들여놓은 곳-옮긴이) 깊숙이 비추었고 바다 위에는 불의 폭포를 닮은 커다란 길이 있었다. 이또한 무척이나 좋았다. 그럴 때면 그녀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고 모든 것은 사라질 수 있었다. 그녀는 잊어버렸다. 정말로 기억하지 못했다. 다른 세계 사람들과 사물들은 더 이상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마치 갈매기가 되어 소란스러운 도시의 도로 위로, 회색빛 집들을 넘어, 축축한 정원들과 학교들, 병원들을 넘어 나는 것과 같았다. 아나는 가끔 도시에 있는 고층 종합병원에 입원해 계신 편찮으신 어머니를 생각했다. 하지만 이곳, 그녀의 집, 바다를 마주 보는 버려진 담장 위에 있을 때는 아픔을 느끼지 않고도 어머니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녀는 파란 하늘과 불꽃으로 덮인 바다를 바라보았고 몸 안까지 들어오는 태양의 열기를 느꼈다. 나중에 이 전부를 입원해 있는 어머니에게 가져갈 것이니까. 그녀는 아주 세계 어머니의 손을 잡았고 그러면 햇빛과 바다색은 어머니의 몸속으로 전해졌다.

“너 학교에서 공부는 잘하고 있니?”

이것은 어머니가 항상 묻는 질문이었다. 아나는 그녀에게 익숙한 미소가 나타날 때까지 어머니의 얼굴을 불안하게 살피면서 열이 있는 야윈 손을 세게 붙잡고는 고개를 끄덕여 “네.”라고 말했다. 아무도 아나가 바다와 하늘을 보러 가려고 석 달 동안 거의 매일같이 학교를 결석했다는 사실을 어머니에게 말하지 않았다. 어린 소녀의 얼굴은 깃 구운 빵 색깔이었고, 눈은 기이한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피에르만은 아나가 숨어 있는 곳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얻어맞는다 할지라도 아무에게도 사실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오른손을 들고 왼손으로는 아나를 붙잡고 맹세했다. 매일 방과 후에 피에르는 바다를 따라 무너진 바위 더미까지 달렸다. 누군가 볼 때를 대비해 피에르는 재빨리 잡초 사이로 숨어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고 기다렸다. 그 후 엄지와 검지 사이로 휘파람을 불었다. 날카롭게 쏘는 듯한 휘파람은 폐허가 된 낡은 극장의 바닥까지 메아리쳤다. 그는 뛰는 가슴을 붙잡고 기다렸다. 잠시 후 그는 절벽의 꼭대기에서 부는 바람으로 인해 약해진 아나의 휘파람 소리를 들었다. 아나에게 두 손가락과 입술로 휘파람을 부는 법을 알려 준 사람은 피에르였다.

꽤 오래전에 이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오늘 끝날 수 있을까? 긴 창문 위에 앉아 있다. 뜨거운 겨울 태양에도 아나는 떨고 있고, 이빨이 신경질적으로 부딪히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다른 누구도 그녀와 함께 있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죽음을 기다렸던 것 같다. 예전에 그는 죽음을 기다리는 일이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저 자갈처럼 둔하고 무심하기만 하면 되는 거라고, 두려움이 침입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 은신처에서 그녀는 홀로 온몸을 떨고 있다. 적어도 피에르라도 있다면 아마도 좀 더 용기가 날 텐데, 그녀는 휘파람을 불려고 했지만 너무 심하게 떨고 있어 불지 못한다. 그래서 소리를 질러 신호를 보낸다.

“오에에!.”

그러나 그녀가 부르는 소리는 바람결에 사라진다.

그녀는 철거반 사람들이 도착하는 순간을 알려고 온 힘을 다해 귀를 기울인다. 그들이 누군지는 몰랐지만 오를라몽드의 벽을 부수러 이제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아나는 온 힘을 다해 귀를 기울인다. 그녀는 돌로 만든 아치들 밑, 텅 빈 커더란 방 안, 철로 된 구조물들 속에서 바람이 만들어내는 기이한 소리를 듣고 있다. 그녀는 버려진 극장 안으로 처음 발을 들여 놓았을 때를 떠올린다. 그때 그녀는 시멘트 복도를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바다와 하늘의 온갖 빛을 본 후였으므로 어두운 공기는 그녀를 숨 막히게 했다. 그전에 그년가 이 유령의 집에 들어갔을 때는 대리석과 회반죽으로 된 계단을 올라갔고, 동굴의 희미한 빛이 비추는 안뜰 안에서 멈추었고, 허물어진 장식물들, 깨진 스테인드글라스를 떠받치고 있는 나선형 장식의 주랑들, 말라버린 분수의 돌로 만든 수반을 보았다. 그리고 마치 처음으로 테베의 비밀을 침해한 것처럼 떨었다. 처음으로 그녀는 누군가가 숨어서 보고 있는 듯한 이상한 인상을 받았다. 처음엔 이 시선이 두렵게 했지만 적대적인 시선은 아니었고, 오히려 꿈처럼 부드럽고 아련한 시선, 단번에 도처에서 다가와 그녀를 둘러싸고, 그녀와 뒤섞이는 시선이었다. 그녀는 버려진 극장의 천장 위 철조 구조물에 부딪힌 바람이 신음하는 듯한 소리에 이끌려 뒤쪽으로 돌아갔다. 삐걱거리는 느린 음악은 그년에게 저 밖으로까지, 하늘의 찬란함 속으로 날아가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 사람들이 오고 있다. 그 사람들은 올 것이다. 오를라몽드는 이미 판자 울타리로 둘러쳐져 있었다. 그 사람들은 무슨 지령 같은 끔찍한 단어들이 적힌 표지판을 달아놓았다.

공사 현장 출입 금지

사망 위험

폭약 폭발 위험

그들은 노란색 기계들을 가지고 왔다. 바람 속에서 흔들리는 거대한 팔을 가진 기중기, 압착기, 불도저 또한 검고 커다란 공을 쭉 뻗은 팔 끝에 달고 있는 기계도 가져왔다. 도시에서 비슷한 기계를 본 적이 있었던 피에르가 벽을 허무는 데 쓰이는 기계라고 말해 주었다. 공을 흔들어서 집 쪽으로 던지고, 집들은 먼지로 만들어진 양 쓰러진다고.

며칠 전부터 기계들이 거기 서 있었고, 지금 아나는 그녀의 집 큰 벽 위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녀는 알고 있다. 그녀가 죽으면 철거반원들은 기계를 작동시킬 것이고, 모든 벽을 허물 것이라는 것을.

그녀는 그녀 위로 울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그들은 대로를 통해 오를라몽드의 영토로 들어와 가시덤불과 들고양이가 살고 있는 테라스 정원을 가로지른다. 아나는 시멘트로 된 지붕 위에서, 버려진 극장 복도 안에서 울리는 그들의 장화 소리를 듣고 있다. 그녀는 도망치는 고양이와 목을 꿈틀거리면서 벽 틈 끝에서 움직이지 않는 도마뱀을 생각한다. 그녀의 심장은 아주 빠르고 아주 강하게 뛰기 시작한다. 도망가서 절벽 아래 숲 속에 숨고 싶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꾼들이 그녀를 볼까 두려워서 감히 움직이지 못한다. 아나는 몸 아래쪽으로 다리를 집어넣고 파카 주머니에 양손을 숨긴 채 앙코브 깊숙이 들어가 최대한 몸을 웅크린다.

철거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눈을 반쯤 감은 채 아나는 새와 파리와 거미집으로 뒤덮이는 걸 좋아했던 하늘을 보았다. 멀리 보이는 바다는 단단하고 매끄럽고 번쩍이는 철로 된 합판 같다. 바람이 불고 있다. 소녀의 몸을 얼게 하고 눈물로 눈을 흐릿하게 하는 차가운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 그녀는 기다리며 떨고 있다. 그녀는 무언가 터지기를, 거대한 노란 기계가 마침내 턱과 팔과 부리를 열고, 낡은 벽을 향해 무시무시하게 겁나는 덩어리를 던져 움직이기 시작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다. 단지 모터가 내는 매우 악하고 작은 방울 소리와 테라스 어딘가에서 나는 굴착기 소리뿐이다. 태양이 겨울날 정오의 위치에 오자, 아나는 다시 친구를 부른다. 손가락 사이로 휘파람ㅇ을 불고 소리친다. “오에에……!”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아마도 다들 피에르가 그녀를 다시 만나러 올 거라는 것을 알고 있을 거고, 다들 학교의 높은 벽 안쪽 교실 안에 그 애를 가두겠지. 아마도 다를 피에르한테 물어볼 거고 그 애는 알고 있는 걸 전부 말하겠지. 하지만 그 애는 오른손을 들고, 왼손으로는 소녀를 붙잡고 맹세했었다. 아나는 그 애가 말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다.

공사 현장에 침묵이 다시 찾아왔다. 정오이고, 철거반원들은 식사하는 중이다. 어쩌면 그 사람들은 영원이 떠나버린 걸까? 아나는 기다리는데 지쳐서, 또 추위와 배고픔 때문에 자기 몸 위로 조금 미끄러져 고개를 오른쪽 어깨에 기댄다. 태양은 바다 위에서 수백만 개의 별이 되어 빛나고 있고, 불길을 열어 그 위로 사람들이 미끄러져 사라진다.

아마도 그녀는 꿈꾸고 있는 것 같았다. 눈부시게 반짝이는 길 끝에 어머니가 연한 푸른색 여름 드레스를 입고서 아나를 기다리며 서 있고, 빛은 어머니의 검은 머리카락 위에서, 벗은 양어깨 위에서 반짝인다. 어머니는 해변에서 돌아왔을 때 바다 물방울이 반짝이면서 팔의 살갗 위로 반짝이면서 천천히 굴렀던 예전처럼 나긋나긋하게 아름답고, 행복하다. 아나가 여기, 그녀의 은신처, 절벽 위로 온 것은 어머니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 이후로 아나에게 이 시선이 따라다닌다. 아나가 알지 못하지만 이곳에, 이 해변에 사는 한 남자의 시선이다. 처음에 넓은 바다 전체가 보이는 고딕식 창문까지 아나를 이끌었던 사람이 바로 그 남자다. 그는 다른 곳, 조용히 먼 곳에 있다. 또한 조금 슬픈 모습의 그는 아나에게 항상 바다를 보여준다. 아나는 그녀에게 쏟아지는 그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을 좋아한다. 이곳에서, 주변 도처에서, 낡은 시멘트 벽 위로, 무너진 테라스 위로, 개밀과 아칸서스가 무성해져 침입이 금지된 정원 위로 쏟아지는 그의 시선을 느끼길 좋아한다.

왜 그 사람들은 전부 부수고 싶어 하는 걸까? 아나가 피에르에게 분명 죽는다 할지라도 저 위에 있는 그 집에 머물 것이라고 말했을 때 피에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그녀는 피에르에게 사람들이 때리더라도, 촛불로 그의 발바닥을 지진다 해도 절대로 아무에게도 그녀의 은신처를 밝히지 않도록 맹세하게 했던 것이다.

이곳은 그녀의 것이었고,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돌 하나, 백리향 덤불 하나, 가시나무 하나하나를 일일이 안 지는 꽤 오래되었다. 처음에 그녀는 오를라몽드를 두려워했다. 그곳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황폐한 곳이었고, 버려진 낡은 극장은 유령이 나오는 성 같았기 때문이다. 피에르 그 아이는 결코 여기에 오지 않았다. 그는 흙더미 안에 숨어 망을 보며 밑에 남아 있는 것을 더 좋아했다. 철거반원들이 처음 왔을 때 아나에게 소식을 알려 준 사람이 바로 피에르였다. 한번은 아주 빠르게 그것을 말해 주었고, 그 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소녀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는 엄청난 한기를 느꼈고, 머리가 빙빙 돌기 시작했다. 곧 기절할 것 같았다. 그 후 오를라몽드까지 달려갔고 판자 울타리와 철책, 포지판과 도로변에 서 있는 무척 높고 징그러운 곤충을 닮은 거대한 노란 기계들을 보았다.

갑자기 그녀는 폭발음 듣는다. 돌로 된 장벽 안에서 울려 퍼지면서 아나의 머리카락 위로 먼지를 떨어뜨리는 끔찍한 충격이다. 빗자루질을 하는 팔 끝으로 주철덩어리가 무겁게 날아 낡은 극장 벽 위로 떨어졌다. 아나는 그것을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무서워서 소리지르지 않을 수 없다. 온 힘을 다해 그녀는 창틀에 매달려 성벽에 달라붙어 있다. 그러나 폭발은 길게 간격을 두고 일어나고, 너무 강해서 소녀의 몸이 튕겨 나가 고통스러울 정도이다. 첫 번째 벽이 무너지는 소리는 무시무시하다. 매캐한 먼지 냄새가 공기 중에 떠다니고, 하늘과 바다를 뒤덮고 태양을 숨 막히게 하는 회색 구름이 인다. 아나는 모든 것을 멈추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두려움에 질려 소리 지르는 것조차 하지 못한다. 진동이 그녀를 멍하게 만든다. 떨어지는 벽의 파편이 지금은 너무 가깝다. 거대한 팔 끝에 달린 검은색 구가 왔다 갔다 하다가 떨어졌다 올라가고 다시 떨어진다. 그들은 아마도 땅 전체를, 바위들을, 산들을 완전히 부수어버릴 것이고, 잔해와 먼지 아래에 바다와 하늘을 묻어버릴 것이다. 아나는 창문 테두리 위에 누워 그녀를 짓누르고, 그녀가 사랑하는 집을 부수어버릴 일격을 기다리며 울고 있다. 폭발은 빈번해진다. 너무 가까이에서 일어나서 그녀는 먼지 가루와 유황 냄새를 맡고 빗발치는 불꽃들을 본다. 바로 그녀의 아래쪽에서 묵직한 덩어리가 여기저기 마구잡이로 부딪히고, 집요하게 몰아쳐 벽을 무너뜨리고, 바닥에 구멍을 내고, 삐걱거리는 철조물을 휘어뜨리고, 바다와 하늘 앞에 서 있는 돌 성벽을 향해 조금씩 나아간다.

그 후,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모든 것이 멈춘다. 두렵고, 고통으로 가득한 고요가 다시 찾아온다. 폭발 후처럼 먼지가 떨어져 내린다. 비명과 부르짖음이 있다. 철거반원들은 성볏 아래까지 내려와서 창문가를 본다. 아나는 피에르가 그녀를 배반했음을 안다. 피에르는 말해버렸고, 사람들은 그녀의 은신처까지 안내한 것이다. 지금 그들은 그녀를 부르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녀 앞에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사닥다리로 올라왔고 창문가에 기대어 있는 그녀를 본다.

“거기서 뭐 하니?”

그는 부드럽게 말하며 그녀에게 손을 내민다.

“자, 보렴. 넌 여기 있을 수 없어.”

아나는 고개를 젓는다. 너무나 목이 말라서 말을 할 수 없다. 파괴의 무시무시한 소리가 그녀의 몸 내부에 남아 있고, 마치 이제는 절대로 말할 수 없을 정도인 것 같았다. 남자는 몸을 기울여 소녀를 팔 안에 안는다. 그는 매우 강하고, 푸른 작업복은 먼지와 파편들로 덮여 있다. 노란 작업모가 태양에 반짝인다.

이제 아나는 무척 심한 피곤을 느끼고, 곧 잠들 것처럼 눈이 저절로 감긴다. 아나와 남자가 사다리 아래에 다다르자 그는 그녀를 땅에 내려놓는다. 일꾼들은 거기서 움직이지 않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고, 그들이 쓴 작업모는 무척 강렬하게 반짝거린다. 피에르가 그들 옆에 서서는 그녀가 바라보자 찡그리는 듯한 묘한 미소를 짓는다. 아나는 고통스럽지만 웃고 싶다.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생각한다. 정말이지 다른 걸 잘 찾아봐야만 한다.

뜨거운 태양과 메마른 먼지에도 불구하고 아나는 추위에 떤다. 노란 작업모의 남자는 그녀의 어깨 위에 작업복과 웃옷을 걸쳐주려 했지만 그녀는 몸을 빼내어 거절한다. 거기 있는 남자들 중에 지나치게 커다란 짙은 갈색 정장을 입은 사람이 있다. 아나는 학교 감독관임을 알아본다. 그들은 절벽 위를 향해 함께 걸어간다. 거기서 파란 경찰차가 도로에서 기다리고 있다.

아나는 그녀가 이제 말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무것도 절대로 얘기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경찰차로 향하는 좁은 길을 오르며 아나는 잠깐 뒤돌아 마지막으로 돌벽과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본다. 오를라몽드는 이제 존재하지 않고 빛바랜 잿빛 폐허만이 남아 있다. 꺼져버린 불의 남은 연기 같은 나이 든 남자의 시선은 이미 멀어진다. 그러나 바다에 쏟아지는 태양의 그림자는 소녀의 얼굴 위로, 어두운 눈동자 속에서 반짝인다. 분노로 꺼지지 않는 빛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