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족의 일어나고 짐에 관해 말하자면야 누르하치의 시대부터가 시작이지만, 전중국을 아우르는 청제국의 치세를 말하자면 지금껏 강희, 옹정이라는 거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모두는 각자 강렬한 개성을 지녔으며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제국을 통치했습니다. 이제 건륭의 시대였습니다. 그 역시 마찬가지로 개성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조금은 재미없는 면모도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건륭은 불확실성이 있던 선대와는 달리 준비된 상태에서 제국의 지배자가 되었고, 제국 역시 안정화 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강희 시절의 정복 전쟁이나 옹정 시대의 대개혁같은 전대미문의 대사업이 벌어질 여지는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가장 위협적인 적이라면야 물론 준가르인데, 건륭은 우선은 옹정 시대부터 이어진 준가르와의 어중간한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이쪽도 급진적으로 상황이 변모하진 않았습니다.
내부의 상황으로 보면, 늙은 오르타이나 명망 깊던 장정옥 모두 손쉽게 젊은 건륭의 손에 나가떨어졌습니다. 황권에 심각한 도전을 가하는 세력도 없었고, 환관의 횡포도 없었으며, 황태후, 외척, 붕당, 변방 모든 세력들이 소멸되거나 잠잠하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건륭은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국가가 백년을 이어와 풍족함을 더하고, 흥성이 거듭된 것이 오늘에 이르렀으니, 승평무사하다 말 만하다."
하지만 건륭은 의욕에 넘쳐 있었습니다. 건륭이 보기에 그의 하아버지 강희는 '관대'를 기조로 정사를 다스렸고, 아버지 옹정은 '엄격함'을 통해 승리를 얻었습니다. 건륭이 보기에 이미 옹정제의 엄격함은 승리를 거두었기에, 이제는 다시 '관대' 로 돌아갈 차례라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그는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방식에 손을 대기 시작합니다. 다만, 바로 댈 수는 없었습니다. 선대의 제도를 곧바로 바꾸는것은 선조에 대한 모독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에 건륭은 옹정제 시절, 엄격하게 정치를 할 수 밖에 없는 '특수성' 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제 다시 제도를 바꾸는것이 '선친의 뜻' 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정책의 시정은 큰 반발에 부딫히기 마련 입니다. 하지만, 건륭의 '개혁' 같은 경우에는 대다수 사람들이 옹호하는 입장이라 강력한 저항에 부딫히지도, 부딫힐 이유도 없었습니다.
시대가 변하고, 기풍이 변하고 있었습니다. 옹정 연간에는 정부에서 소금의 사적 소유를 엄격히 금지했었는데, 건륭 시대에는 백성들이 소량의 식염은 휴대하거나 구입해서 다른곳에 팔 수도 있었고, 40근 이하의 소금을 가지고 있다면 체포할 수 없게 법이 변경되었습니다. 건륭 스스로도 관대함 같은 말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건륭이 '관대한' 사람이었는가를 말하자면, 그는 작은 일에 대해서는 관대했지만 커다란 일에 대해서는 오히려 옹정보다도 잔혹했습니다. 나중에 말하게 될 것입니다.
어찌 되었건, 집권 초기의 건륭은 의욕적으로 정치에 임했습니다. 청조는 내부적인 여건이 충분했고, 집행자인 황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으므로 건륭이 마음만 먹는다면 단기적인 폐단에 대해서는 적절하게 대처가 가능했습니다.
전대 옹정 황제의 개혁 등은 다양한 방면에서 효과를 거두었지만, 본래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제모습을 잃기 마련입니다. 이를테면 매년의 작황을 파악하여 대처하려던 정책은, 실질적으로는 농사를 짓지도 않는 지방 토호세력들의 손에 좌우되었습니다. 직례성에서는 부분적으로 정전제를 사용해서 어려움에 처한 팔기들의 생계를 돌보려 하였으나, 농사 짓기를 꺼려하던 팔기의 자제들이 관부의 소를 훔쳐서 팔거나, 땅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자를 놓아 정전제의 취지를 무색하게 했습니다.
또한 옹정이 자신의 권한을 강화시키기 위해 상서로운 징조등을 이용했던것 때문에, 지방 관리들은 황제의 기호에 맞추어 끊임없이 상서로운 말만 가득한 상소문을 올려댔으며 옹정이 비교적 불교, 도교에 호의적이었던것 때문에 각지에서 땡중과 사이비 도사들이 출몰하여 사람들을 미혹했습니다.
건륭은 즉시 승려와 도사들을 우대하던 정책을 바꾸어, 승려와 도사에게 승첩등을 발행하는 제도를 부활시켜 그들의 숫자를 억제했습니다. 또한 사찰이 소유하고 있던 논밭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사찰이나 사당을 마구 짓는 행위를 제한하였으며, 가짜 도사와 승려들을 잡아서 환속시키고 사찰의 재산은 필요한 최소한만 남기고는 모두 공공재산으로 돌려 어려움을 겪는 양민들의 구호기금으로 사용했습니다.
또한 건륭은 확고한 제국의 행정력을 이용, 중국 각지의 토지 측량을 시도했습니다. 본래 토지 면적의 추산은 전대부터 이루어졌으나, 이 과정에서 엉터리로 조사된것이 많아 땅부자가 땅이 없는것처럼 되어 세금의 대상이 아니게 되기도 하고, 제 땅도 없어 하루하루 간신히 연명하는 소작농들에게 있지도 않은 땅이 있는것처럼 되어 어거지로 세금을 물어야 하는 기막힌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건륭은 담당자를 처벌하고 좀 더 제대로 된 조사에 임했습니다.
또한 중국의 인구는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으므로, 더욱더 많은 땅을 얻기 위해 옹정 시대부터 황무지를 개간하는 작업이 시도되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각지의 총독들은 황무지 개간 작업은 손도 대지 않으면서, 터무니 없이 많은 황무지를 개간했다고 속여 조정에 보고하는 사기를 치기도 했습니다. 일단 조정에 '더 많은 땅이 생겼다' 고 보고 했으니, 그 땅만큼의 세금을 거두어 조정에 거두어야 합니다. 즉, 백성들은 있지도 않은 땅의 몫만큼의 세금을 더 내어 조정에 올려야 했습니다. 간간히 이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워낙 중국 전역에서 올라오는 개간 보고가 눈부시다 보니 대체로 무시되었습니다.
건륭은 역시 관련 책임자들을 하나하나 처벌해가면서 이를 시정했습니다. 또한 통행세 등의 잡다한 세금을 다시 조사하여, 이 과정에서 함부로 돈을 유용하던 사람들도 처벌했습니다. 전체적으로 건륭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황무지의 개간이었습니다. 제국의 넘쳐나는 인구를 부양하려면 더욱 많은 땅이 필수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각종 비리등을 적발하는데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건륭은 적극적으로 이러한 정책을 실시했고, 건륭 즉위 후 얼마 되지도 않아 20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사천으로 이주하여 땅을 개간하게 되었습니다. 건륭은 이들을 사천의 호적에 편입시켰습니다.
인구 증가와 더불어 다른 큰 문제는 식량 문제입니다. 수억명이 넘는 인구를 적극적으로 부양하지 못한다면 커다란 비극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데, 식량이라는것은 많이 나는 곳은 오히려 남게 되고, 부족한것은 턱없이 부족한 법입니다. 어느 한곳에서는 식량이 남아도는 현상이 발생할 정도인데 다른곳은 정부 기관에서 필사적으로 겨울마다 구호 활동을 벌여야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건륭은 제국의 식량을 조절하는 일에 크게 관심을 보였고, 상인들의 식량 교역을 격려하는 여러 특별 조치들을 제정했씁니다. 건륭은 재해 지역으로 운송하는 식량에 대해서는 과세를 완전히 면세해주고, 나중에는 재해 지역뿐만 아니라 중국 전역에 걸쳐 면제받을 수 있게 했습니다.
이러한 '자원의 이동' 을 적극적으로 고려하여 얻은 성과등을 보려면, 1759년의 사례가 있습니다. 봄이 다가올 무렵, 간쑤의 농민들은 지난 겨울에 파종한 곡식이 아직 싹이 트지도 않았는데 여름 파종을 위해 밭을 갈아야 하는 시기에 직면했습니다. 농민들은 가진게 없고, 이를 구호해주는 관에서도 지난 4개월의 겨울 동안 곡물을 구호해주느라 곡물 비축량이 바닥에 가까웠습니다. 곡물 비축량이 바닥에 가까워지니까 당연히 가격이 치솟게 되었습니다. 관리들은 가지고 있는 곡물을 최후에 최후까지 쥐어짜서 시장에 공급하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가격을 조정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효과가 없고 한 석당 가격이 4냥 이상으로 미친듯이 폭등하기 시작하자 관리들은 상인들에게 기대를 걸게 되었습니다. 간쑤와 맞닿은 지역에 120만 석을 비축하고 있는 산시성의 곡물을 40만 가량 간쑤로 이동시켜 간쑤를 돕는겁니다. 그런데 이때 청나라 관리들의 생각이 꽤 재미있습니다.
"가격이 올라갈 때는 운송비가 높더라도, 작은 행상과 짐꾼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곡물을 보유하고 있는 가계는 높은 가격에 대한 소문을 듣고, 곡물을 매물로 내놓아 가격을 안정시켜 백성들을 돕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산시의 상인들에게 간쑤에서 곡물을 비싸게 팔 수 있을것이라고 기대 심리를 주어서 팔게 하는 셈입니다. 문제는 그렇다면 역으로 산시성의 비축분이 떨어져서 곡물의 시장 가격이 높아질 우려가 있고 이에 대해 산시의 현지인들이 반발하여 역으로 산이세 문제가 일어날 우려가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관리들은 처음부터 이번에는 사천성에서 산시성으로 보급을 할 계획을 세워놓고, 사전에 이를 공표하고 곧 있으면 사천에서 곡물이 도착한다고 말하여 기대 심리를 조작함으로서 소요사태를 막고 곡물가격을 낮게 유지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또한 각지의 지방관들은 자기네 성의 여유분들을 지키려고 하는 심리가 있었는데, 건륭은 이것이 교역을 금하게 하는것이라고 여기면서 관료들에게 감봉 정책을 취해 이러한 상황을 막았습니다.
건륭 대의 활발한 각 성들의 교역 상황으로 인해 광동, 복건, 절강, 강소 등 동남연안 지역의 면방직을 위주로 하는 특화된 수공업 제품과 안휘, 강서, 호광, 사천, 광서 등의 내륙 지역의 잉여 미곡이 교환된다는 시스템 ─ 소위 '베와 쌀의 교환' 시스템 ─ 은 Chuan Han-sheng와 Richald Kraus 등의 학자들이 집중하였고, 이들은 청대 물가의 장기동향등을 연구하여 '청대 중국에 통합적 시장이 존재했을 가능성에 대한 암시' 를 남겼습니다. 소위 시장경제라고 하는것이, 이미 당대 청나라가 하나의 거대한 시장이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왕업건이라는 사람은 15개 성의 1개 도시의 1738년 ~ 1740년 사이 양가(糧價)에 대한 비교 연구에 들어가서
장강 삼각주 ~ 안휘, 복건, 광동 ~ 사천,호광, 광서 에서 양가가 일정한 격차를 보였는데, 이는 장강 상류로부터 장강 하류로 이동하는 미곡 유통의 특성상 운송비로 인한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따라서 장강 상, 중, 하류 지역의 양가 간에는 강한 연동성이 확인되다고 하면서, 청대 후기로 갈수록 미곡 시장의 통합도가 증대되었음을 논증하면서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장강을 중심으로 한 중국시장의 통합 정도가 동시대 유럽의 그것에 비해 높은 수준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Chuan Han-sheng와 Richald Kraus하고 비슷한 시기에, William Skinner라는 연구자는 주로 주요 하천과 수로를 통해 형성된 명, 청대 중국의 시장권 전체에 대해운송비용과 기타 변수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해서 8개의 대구역으로 구분하고 지역 구조 모델(regionla system model)이란것을 제시해 중국 경제사 연구의 '적절한 단위'(proper unit)를 제시하여, 학자들은 한 성이나 그 하위 행정구역에 대한 집중적인 사회경제적 분석에 집중했습니다. 즉 스키너는 중국 전체가 통합된 시장의 모습을 보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회의적으로 보면서, 거대한 8개의 시장으로 구분되어 있었다고 하였는데, 아무래도 이는 '봉건 할거론' 과 같은 느낌이 남으로 대만이나 중국의 연구자들은 이에 대해 반발하는 편입니다.
왕업건등의 주장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반론은 미곡이라는 단일 품목의 가격 연구에만 의지한 시장통합도의 측정이 과연 타당한가라는 이야기가 있고, 스키너에 대한 반론은 장강 상류와 장강 하류간의 활발한 장거리무역의 존재로 인해, 각 대구역의 시장들이 자급자족적 자연경제권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주장이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양측 모두 어느정도 논리상의 허점이 있지만, 적어도 그 중간으로보면 당시 청대의 사회경제적 지도는 비록 완전한 시장통합에는 이르지 못하였더라도, 8개 대구역보다는 더 앞선 중간적 형태로 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또한, 적어도 이런 상황에서 청나라가 온갖 방법을 이용한 구호 시스템의 확등에서 볼 수 있는 행정력의 체계는 18세기의 어느 국가들과 비교해도 떨어지는 부분이 아닙니다. 다른 내지 시장들과의 연계 개선, 민수용 곡창의 비축, 가격, 수확, 강우량 등에 대한 매우 체계적이고 방대한 분석, 집약적 농업, 경제개발, 투자, 방대한 상평창 망이 가격의 변동을 줄이기 위해 시장의 곡물을 팔고 그러기 위해 항시 공급분을 채워넣는 등등, 심지어 기근을 만난 농민을 "노역에 이용해서 구제한다." 는 방식으로 공공 근로와 의례 행위에 동원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모든 일은 기본적으로 청대의 인구폭발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건륭은 이렇게 말한바 있습니다.
"백성은 더욱 늘어나는데, 풍족해지기는 더욱 어렵다. 국가의 태평이 백여년 동안 이어져 사람들이 태어나 평생 전쟁을 보지 못했다. 매년 호구는 날로 늘어나는데, 이는 천고 이래로 보기 드문 일이다."
건륭은 이에 상인들에 대한 지원도 착수, 그들이 동남해안에서 많은 쌀을 수입해오고, 베트남 상인들이 복건성이나 광동성에 오게 권장하여 외국의 쌀을 수입하는 일에도 열중했습니다. 건륭 시대의 이주민들과 정부의 정책으로 인해, 동북, 몽골, 신장 등 각지에서 농작물이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동북은 본래 봉금령이 내려 일반 백성들이 이주할 경우 만리장성에서 잡혀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건륭은 이에 '동북으로의 이주를 권장은 하지 않더라도, 만일 사람들이 살길을 찾아 이주하면 못본척 해주는' 방식을 취해 동북지역으로 대규모 한인들의 이주를 유발했습니다. 건륭 57년에 이르면 아예 봉금령이 폐지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건륭 시기에는 광업 역시 눈부신 발전을 했습니다. 옹정시대까지만 해도 광업에 대해서 시선도 좋지 않고 별 이득도 없을 것으로 여겼지만, 건륭은 광산 개발과 광업에 대해 적극적인 지원과 채굴에 대한 지지를 표시함으로서 광업 성장률은 이전의 왕조들이 비해 엄청난 속도로 증가했습니다.
첫댓글 흐음...... 나라가 워낙 넓다보니 옹정제같은 워커홀릭 황제라도 못보고 지나치는 것도 어쩔수 없이 발생했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