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인의 마음에 뿌려진 기독교 정신은 이제 공동체 안에서 그 모습이 드러나야 한다. 어떤 형태로든지 마지막 결실은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맺어져야 할 것이다. 서구 교회의 경험을 인도가 어떻게 받아들이든 전적으로 그들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인도인들이 그들의 교회를 세우고자 할 때, 그들은 서구 교회의 경험을 그대로 적용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오로지 인도인의 생각에 달려있다.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다 배워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교회가 서구의 복제품이 되지 않도록 예수를 창의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이것이 그들의 작품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위험부담을 안고 있다. 어쩌면 인도의 고아원에서 하는 것처럼 인도인을 일정한 테두리 안에 가두고, 그들을 어떤 기준에 맞추어 변화시키는 것이 훨씬 쉽고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가장 쉽지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사실 어떤 선교사들은 그들의 사역을 할 때, 철저하게 이 방식을 따르기도 했다. 선교지에 신학교를 설립하고 현지 학생들에게 엄청난 지식을 주입했다. 그리고 그 학생이 교회로 나가면 그 엄청난 양의 지식을 거기에 쏟아놓았다. 교회에서 목사들은 같은 문구에 대해 설교하고 같은 성서구절을 본문으로 선택한다. 그들은 3년 주기로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설교한다. 그렇게 성서일과로 설교하는 것은 나름대로 좋은 점이 있다. 이것은 목사가 의도적으로 본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이 목사를 선택하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 현지의 상황에서 창의적으로 선택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형식적으로 빠져 일률적으로 고착화될 수가 있다. 이것은 완벽을 가장한 실수가 될 수 있으며 규칙적이지만 얼음처럼 차가울 수 있다. 예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상황 속에서 말씀을 해석하시며 자신을 사람들에게 주셨다. 그들이 생명을 얻게 되면 그들은 적당한 옷을 만들어 입는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생명은 의복 그 이상을 의미한다. 그 의복이 새로운 삶이 되는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인도인들이 그들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표현할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무엇을 생각한다면 어떤 것을 버리고 취해야 하겠는가? 그들은 가장 적은 일로 교회의 분열을 초래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한 우리의 중심은 하나이다.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주는 것은 그리스도이며 우리는 분열시키는 것은 교리이다. 무엇을 믿는가 하는 질문은 저마다 다르고 서로 모순적일 수가 있다. 그러나 누구를 믿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모두가 하나가 될 것이다. 기독교에 접근할 때 무엇이란 것을 강조하기 시작하면 분열이 시작된다. 그러나 누구를 믿는가를 강조한다면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에게로 이끌려 간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중심이 될 것이다.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지 말자. 중심을 생각하며 그 안에서 하나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