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10 - 독도 박물관을 구경하고 도동항 바닷가에서 독도 강치를 생각하다.
울릉도 여행 사흘째인 8월 26일 아침에 도동 터미널에서 봉래폭포 에 가서 구경하고는 다시
돌아와 도동 마을에서 케이블카로 독도 전망대 에 오르는데 해무 때문에 독도는
보지 못하고 내려와 독도박물관 으로 들어가 구경하고는 나와 다시 도동항 으로 내려 갑니다.
도동항은 울릉도를 찾아와 배에서 내리는 사람들과 다시 육지로 떠나는 사람들에다가 여기서 다시 3시간
30분 가량 배를 타고 동쪽에 독도 를 다녀오는 사람들로 인해 북새통을 이루니 참으로 활기가 넘칩니다.
우린 다리로 해서 도동항 터미널로 가서는 다시 윗층으로 올르니 여긴 전망대
구실을 하는 곳으로...... 주변을 둘러보고는 해안 산책로 를 잠시 걸어봅니다.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과 일본 양쪽 모두 명칭이 자주 바뀌어 혼란스러운데... 우산국 - 우릉도 -
우산도(태종실록) - 우산도와 울릉도(무릉, 우릉, 동국여지승람) - 우산도와 무릉도
(세조실록) 등으로 이름이 바뀌며, 주민들이 부르던 독섬(돌섬)이 석도(石島) 로 그리고 다시
독도(獨島) 로 바뀌니 일본은 우산도가 울릉도 옆의 죽도라 하고 한국에서는 독도라고 말합니다.
독도의 강치(바다 사자)
독도 주변 해역은 쓰시마 해류와 북쪽에서 오는 리만 해류의 접점이며 어패류, 해조류가 풍부한 어장
이니 일본 이즈(伊豆) 제도처럼 니홍아시카 (ニホンアシカ, 일본강치, Zalophus californianus
japonicus) 의 주요번식지 하나였지만 1951년 독도에서 50~60마리가 확인되었다는 보고가
마지막 (혹은1975년에 몇 마리?) 목격담으로 더 이상의 보고되지 않으니 멸종 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니홍아시카(강치, 바다사자) 는 일본 바다에 많이 서식하고 있었지만, 어획 및 제거, 남획에 의해 멸종됐으며
20세기 초반에는 서식지는 독도 (다케시마) 등 일부 지역으로 좁혀졌으니, 독도의 해식동굴에 서식하고
있었지만 메이지(1868~1912) 와 다이쇼(1912~1926) 연간에 일본인들에 의해 대량 포획 이 이뤄졌습니다.
강치(나홍아시카, 바다사자)는 독도에서 일본 어부들의 의한 남획 외에도 기후 변화와 환경오염,
주일 미공군의 수년에 걸친 폭격 등 군사 훈련과 한국에 의해 독도가 요새화 된 것도
멸종요인의 하나로 지적되는데... 그 외에 포유류는 범고래 등의 고래도 독도 근해를 통과합니다.
서양인들이 부르는 울릉도와 독도 이름
2008년에 우리 외교통상부가 전세계 지도등 3,380건을 조사한 결과 독도로 표기된 것은 1.5%(49건) 에
불과하고 분쟁 지역 2.8%, 다케시마 1.4% 그리고 1849년 독도를 발견(?) 한 프랑스 배의 이름을
딴 리앙쿠르 암초 등이 1.6% 미표기가 92.7% 라고 합니다. 또다른 조사에는 700여개 지도 중에 섬이
표시된 것은 20% 인데, 독도 단독표기는 거의 없고 미국 CIA 처럼 “리앙쿠르 암초” 로 표시한다고 합니다?
독도를 프랑스어로 Rochers Liancourt 영어 Liancourt Rocks 인데 섬을 뜻하는 Island 가 아니고
암초를 뜻하는 Rocks 라고 쓰는 것은..... 국제법상 섬은 밀물시 드러나야 하고 물 이 솟아나야
하며 2가구 이상 주민등록을 하고 섬에서 어업을 비롯해 생계유지가 가능해야 하는데 독도는
결정적으로 생존에 필수인 "물" 이 없기 때문이니 섬이 아닌 바위(Rocks) 라고 한 것이며,
그외 다케시마 단독 표기나 독도/다케시마, 리앙쿠르/독도 등 공동 표기가 10여건씩 입니다.
75개국 353건의 또 다른 조사는 일본해가 74%, 동해가 24% 이나 정부 차원에서는 95% 이상 일본해 로
표기되어 있는게 현실이니 국제수로기구 IHO 에서 오랫동안 “일본해” 로 단독표기 해왔기 때문이고,
미국과 영국이 일본해 단독 표기를 완강하게 주장하기 때문이니 천안함 사태후 미국과 한국이 중국
을 의식해 서해가 아닌 동해에서 훈련을 하면서 미국은 “일본해” 에서 훈련했다고 발표한 것이 현실입니다.
독도 의용 수비대
독도 의용수비대 는 1953년부터 3년 8개월간 독도에 무단 침입한 일본에 맞서 독도를 지킨 순수 민간
조직이니 6.25 전쟁기간인 1953년 일본은 세 차례에 걸쳐 독도에 무단 상륙해 1948년 미군
의 폭격 연습 과정에서 희생된 한국 어부의 위령비를 파괴 하고(?) 독도에 ‘시마네현 오키군
다케시마 (島根縣隱岐郡竹島)’ 라는 나무 표지판을 세우는 등 불법 영토 침략을 공공연히 저질렀습니다.
1953년 4월 한국전쟁에 특무상사로 참전한 경력이 있던 홍순칠(洪淳七) 이 주도해 울릉도에 살고있던
청년들을 중심으로 독도의용수비대가 결성됐으니 33명 으로, 이들은 모금한 돈으로 사들인 무기와
울릉경찰서로 부터 지원받은 박격포, 중기관총, M1 소총 등으로 무장해서는 1953년 6월 일본
오게(大毛) 수산고등학교 연습선 지토마루호를 독도 서도 150m 해상에서 나포해 일본으로 돌려보냅니다.
1953년 7월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이 독도에 접근하자 위협사격을 가해 이들을 격퇴시켰으며 1954년 6월
독도 동도 바위에 韓國領(한국령)이라는 글자를 새겨넣었고, 같은 해 8월 수비대는 다시 독도에 접근한
해상보안청 소속 순시선을 물리쳤으며 11월에는 일본 순시함 세대 및 비행기 한 대와 격렬한 총격전
을 벌여서 승리를 거뒀으니..... 이 전투에서 일본측은 16명의 사상자 를 내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독도 의용수비대는 일본 순시선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무기로 무장한 상태였지만 큰 통나무
에 검은칠을 해 가짜 대포 를 만들어 일본 함선의 눈을 속이는 기지를 발휘해 전투를 승리
로 이끌었으며.... 1956년 독도수비대는 기존의 업무를 경찰에 넘기고 임무를 마쳤으나
독도 방파제 설치를 정부에 건의하는 등 다양한 형태의 독도 지키기 운동을 전개해 나갑니다.
한국산악회 독도 상륙
1953년 10월 서울대 공대생 김연덕씨를 비롯한 한국산악회원 16명이 울릉도에서 독도로
향하는 해군 함정에 몸을 실었으니 국토 구명 학술조사 활동이었는데, 정부는 일본과
외교 마찰을 우려해 군대가 아닌 민간단체의 독도 상륙을 지원했으니..... 출발
4시간 후 독도에 도착해 소형 배 를 띄웠지만 거센 파도에 휩쓸려 뱃머리가 부서집니다.
울릉도로 뱃머리를 돌린지 한시간후 정체불명의 배가 산악회원들이 탄 함정을 추격해왔으니 독도를 순찰
하던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이라, 해군이 전투태세 를 갖추고 일본 영해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자
순시선은 물러갔으며, 이틀후인 1953년 10월 15일 재출항해 6시경 독도 동도 상륙하니 눈에 뛴 것
은 안용복 때 처럼 ‘시마네현 오치군 고케무라 다케시마 (島根縣 隱地郡 五箇村 竹島)’ 라는 나무 말뚝이라?
산악회원들은 말뚝을 뽑아버리고 독도 측량과 탐사에 나섰으니 다음 날인 16일 오후 9시 이들은 울릉도
로 돌아가는 배에 올랐는데, 승선하기 전에 한글로 ‘독도’ 라고 새긴 표석을 구릉지대에 세웠습니다.
주일 미공군 독도 폭격 훈련으로 한국 어선들 피격
광복후 한일 양국 정부는 독도를 놓고 지속적으로 갈등을 벌였으니 일본 정부는 1947∼1953년 주일
미군이 독도에서 폭격 연습을 벌인 것을 근거로 영유권을 주장 했는데, 미국이 한국 정부가
아닌 일본 정부와 합동위원회 를 구성해서 독도를 폭격 연습지로 지정하고 폭격 날자와 시간을
한국(미군정)이 아닌 일본에 통보 하는 과정에서 미국 정부가 자신들의 영유권을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1948년 6월 8일 미 공군의 일본 오키나와 가데나 기지를 출발한 B29 폭격기 24대가 76개
폭탄 을 투하한 폭격 연습으로 독도 해상에서 조업 중이던 한국 어선 20척 가운데
14척이 침몰 했는데, 당국은 14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발표했으니 어선 1척당
한명으로 줄여서 거짓 보도한 것으로....... 어민들은 “희생자가 3백명” 도 넘는다고 말합니다.
1950년 6월 8일 피격 2주년에 조재천 경북지사등은 “독도에 희생자 위령비” 를 세웠는데 반미감정 이
대두되는 것을 꺼렸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비석은 감쪽같이 사라졌지만, 분위기는 진상 조사나
비석을 세우기 힘든 시대라 유야무야 넘어갔는데,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독도 탐사팀이
수중을 촬영하다가 우연히 저 비석이 발견 되었고.... 3년 후에는 시민단체들이 위령제 를 올렸습니다.
미군은 특별 조사단을 독도로 파견하고 “어선을 바위” 로 착각해 폭격했다는 낯간지러운 허위 조사결과 를
발표하고 사과는 전혀 없이 쥐꼬리만한 보상금 으로 대충 떼우고 넘어갔으니 “약소국의 운명” 을 탓해야
할른지... 하지만 미공군은 1952년에도 9월에만 세 차례에 걸쳐 미 공군 폭격기가 독도 해상에 폭탄 을
투하했으니, 그달 22일 학술조사단 36명을 독도로 파견한 한국산악회는 대경실색해서 상륙을 포기합니다.
우리 어민들이 많이 사망한데다가 민간인들의 상륙까지 불발되자 한국 정부는 1952년 11월 10일 주한
미대사관을 통해 주일미군의 독도 폭격 연습 중단 을 요구하니, 이듬해인 1953년 3월 19일 미국과
일본 합동위원회는 주일미군의 폭격 연습지에서 독도를 제외 하기로 했는데.... “한국산악회의 독도
상륙 기록은 민관이 힘을 합쳐 독도를 지키려고 노력한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는 중요 사료” 라고 봅니다.
이런저런 옛날일들을 회상하고는 다시 우리가 예약했던 펜션으로 올라가서는 아침에
맡겼던 (여긴 13시에 배가 들어오는지라 체크아웃이 아침 09시임) 배낭을 찾아
메고는 도동 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시계방향으로 달려서 사동항 에 내립니다.
2024년에 경비행기가 착륙할수 있는 공항을 만드는지라 좀 어수선한데 그냥 터머널로 들어
가다보니 여기 마을에 있다는 생태지질 탐방객 센터 와 울릉자생 식물원 은 보지 못합니다.
터미널로 들어가서는 배표를 받은 다음에 멀미약 을 출항 한시간 전에 먹고는 그래도 못미더워 키미테
를 사서 붙이고는 나와 옆 건물로 가서는 4층에 카페 로 가서 빵과 음료수로 늦은 점심을 떼웁니다.
이윾 4시 50분에 배가 출항하는데 올 때 날씨가 좋지 않아 파도 가 엄청 높게 치는 바람
에 배멀미 를 심하게 했으므로 도동항에서 포항 가는 3시간 40분 걸리는 표를
취소하고는 사동항에서 후포로 가는 2시간 30분 걸린다는 배표를 새로 예약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날씨가 하도 좋은지라 정말 거짓말처럼 바다에 파도가 하나도 없는게 마치 산속
에 잔잔한 호수 를 가는 것 같으니 전혀 배멀미를 하지 않고 무사히 후포 에 도착합니다.
해가 지는지라 바다에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며 노을이 지는지라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에서 보았던
노을 이 생각나는데 김랑이 쓴 "크로아티아 블루" 에 노을 포드스트라나 Podstrana 라는 시가 있습니다.
길 위에서 하루가 이렇게 저물어 갑니다. 등 뒤에선 여물지 않은 달이 오릅니다.
여물지 않은 내 마음 같이. 하늘 위에서 어쩌다 마주친 당신.
흔한 말이지만 인연이 아니면 무엇으로 설명할까요.
설익은 마음이야 사랑이라고 말못해. 그렇게 놓쳐버린 마음이 얼마나 될까요.
어긋난 인연을 얼마나 다시 기다려야 하는지 압니다. 이제 내가 알아 봤으니 된 것이지요.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은 이미 사랑이겠지요. 붉게 타들어가는 노을이 온몸에
퍼집니다. 당신은 어느 하늘을 날고 있나요. 그곳도 이렇게 따뜻하게 노을이 지고 있나요?
그런데 우리 자가용이 포항의 여객선터미널 주차장 에 있는데 문제는 여기서 포항 가는
시외 버스가 없는 것 같으니 지금 시간이 오후 7시가 넘은지라 택시 를 타야 하나
걱정했더니..... 마침 한켠에 셔틀버스 가 있어 올라타는데 운전수는 요금도 받지 않네요?
첫댓글 독도구경 잘 햇습니다.나오실때는 바다가 잔잔해서 고생을 않하셧어 너무 다행입니다.
예! 천만 다행인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