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갑산의 고장, 청양(靑陽) 땅을 밟으며/전성훈
올해 도봉문화원 마지막 역사문화탐방은 충청남도 청양 지역이다. ‘콩밭 매는 아낙네야....’라는 가사로 한 많은 사연을 애절하게 노래하여 뭇사람의 심금을 울린 ‘칠갑산’, ‘충남의 알프스’라는 별명이 붙은 칠갑산의 어머니 청양 땅을 처음으로 밟으니 가슴이 뭉클하다. 이른 아침 도봉문화원을 출발한 전세버스는 평일임에도 구리시를 지나서부터 한 동안 길이 막혔다. 미세먼지와 함께 새벽안개가 피어올라 창문 밖이 희뿌옇게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늦가을에 미지의 세계로 떠난다는 설렘에 마음은 즐겁고 얼굴에는 슬며시 미소가 저절로 피어올랐다.
청양에 도착하여 대한제국 애국지사로 존경 받고 있는 면암 최익현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모덕사(慕德祠)를 먼저 찾았다. 함께한 역사탐방객들은 잠시 머리를 숙이고 그 분의 높은 뜻을 기렸다. 면암 선생은 일본제국의 강제적인 조선 찬탈에 대항하여 의병을 모아 싸웠으나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당했다. 선생은 적군이 주는 음식을 먹을 수 없다며 단식하다 순국하셨다. 묵념을 하면서 내 삶을 뒤돌아보았다. 감히 면암선생 그림자를 밟을 수는 없지만 오늘의 시대상에 부합하는 성숙한 시민의식조차 갖지 못하고 허둥대며 쫓기는 듯이 사는 내 모습에 자괴감이 들었다. 조금은 무거운 마음을 안고 얼굴을 들어 모덕사를 둘러 싼 자그마한 산을 바라보니 감나무한 그루가 홀로 담담하게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감나무에는 제법 많은 단감이 열렸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높이에 주렁주렁 달려있는 단감들, 추운 겨울날 까치나 산새의 먹잇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이 푸근해지고 따뜻해졌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길은 아주 소소한 곳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말씀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모덕사 앞에 있는 작은 저수지, 오랜 가뭄으로 쩍쩍 볼품없이 갈라져 흉물스럽게 밑바닥 속살까지 들어난 지 이미 오래된 듯 싶었다. <이곳에서 낚시를 하지 말라>는 경고 팻말 하나가 저수지에 덩그렁 을씨년스럽게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띠었다. 바로 옆에 있는 제법 큰 오목저수지에는 다행히 어느 정도 물이 들어 차 있었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모습에 취하여 사진을 몇 장 찍고 발길을 칠갑산 품 안에 살포시 안겨있는 장곡사로 돌렸다. 장곡사(長谷寺)는 마치 어머니 자궁 속에 들어앉은 아기처럼 포근하게 칠갑산에 둘러 싸여있다. 조금 물러나서 절집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이토록 아담하고 고즈넉한 모양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자태에 정말 아름답구나 하는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작은 것은 아름답다는 의미가 바로 이런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장곡사에는 다른 절집과는 다르게 두 개의 중심 법당이 있어서 상대웅전, 하대웅전이라고 부르는 유일한 사찰이라고 한다.
이제 겨울 3개월 동안은 역사문화탐방이 없다. 내년 꽃피는 3월이 되어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 나서게 될 때까지 추운 겨울철에 웅크리지 말고 가슴을 펴고 지내야겠다. 그동안 만났던 자연의 냄새와 인간의 향기를 곳간에서 곶감을 꺼내듯 기억의 바다 건너편 보물창고에서 겨울 내내 하나씩 꺼내 음미하면서 마음의 양식으로 삼아야겠다. (2015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