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식 꽃, 쌀 한 가마 값… '퇴폐 풍조'로 엄금…
남학생에게 꽃다발 준 여고생 '풍기 문제' 퇴학
1953년 3월 28일 졸업식을 막 끝낸 서울의 어느 남자고등학교에서 졸업생 상당수가 갑자기 난투극을 벌이기 시작했다. 인근 여고 학생들이 꽃을 들고 축하하러 오자 남학생들이 서로 "내가 받을 꽃"이라며 다투다 싸움으로 이어진 것이다(경향신문 1953년 3월 30일 자). 졸업생에게 꽃다발을 주는 유행이 시작된 1950년대 초, 꽃다발이란 주로 '이성 친구'가 특별한 마음을 담아 건네는 선물이었다. 중·고교 졸업생 사이에는 '꽃다발 세 개 이상 못 받으면 바보'라는 말이 돌았다. 꽃 줄 사람 없는 졸업생들은 오빠나 누이보고 사 가지고 오라고 졸랐다.
1971년 고교 졸업식을 마친 학생들이 꽃다발 몇 개를 화환처럼 엮어 목에 두르고 선글라스를 낀 채 서울 번화가를 활보하자, 신문은 사진을 찍어“기막히는 졸업 풍경”이라고 보도했다(경향신문1971년 1월16일자).
서울 시내에 꽃집이 25곳밖에 없을 만큼 화훼 산업이 황무지 상태이던 1960년대엔 꽃다발이 오늘보다 훨씬 비쌌다. 1969년의 경우 졸업 선물용 화환 값은 5000~1만원이었다. 당시 쌀 한 가마 값(약 5100원) 수준이니 요즘 물가로 약 16만원 선이다. 졸업생이 꽃을 들고 있느냐 여부로 가정 형편을 짐작할 정도였다. 신문은 "졸업식 날짜가 다가오면 없는 집은 꽃다발 걱정에 근심이 한다발"이라며 "꽃다발을 받을 수 없는 불우한 졸업생들에게는 좋지 못한 심리적 충격을 준다"고 비판했다. 어느 여고는 남학교 졸업식에 가서 어떤 '오빠'에게 꽃다발을 준 재학생을 '풍기 문제'로 퇴학시키기도 했다. 쌀이 모자라 밀가루를 더 먹자던 시대에, 시들면 버릴 꽃에 쌀 한 가마 값을 들인다는 것 만한 사치가 없었다. '허영'이란 말로는 모자라 '퇴폐 풍조' '광태(狂態)'라는 단어들이 꽃다발 비판에 동원됐다.
1950년대부터 당국은 졸업식장 꽃다발을 금지하기는 했다. 그러나 평생 못 잊을 하루를 만들려는 청춘들이 하루아침에 꽃을 버리지 않았다. 좀 '놀던' 남학생들 사이에선 졸업식 뒤 꽃다발을 엮어 화환처럼 목에 걸고 택시 타고 질주하는 게 유행했다(동아일보 1957년 3월 6일 자). 유신 체제 아래서 졸업식장 꽃엔 철퇴가 내려졌다. 유신 선포 뒤 첫 졸업식인 1973년 2월, 상당수 학교는 교문에서 학생과 학부형들을 '검문'하며 꽃 반입을 원천 봉쇄했다. 식장에선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합니다"라고 노래했지만 진짜 꽃다발을 선사하지는 못했다. 1973년 초 서울시교육위원회가 지목한 '4대 졸업식 퇴폐 풍조' 중 첫째가 '화환·꽃다발 증정'이었다. 둘째는 '졸업생 몸에 테이프 감기', 셋째가 '몸에 밀가루 뿌리기', 넷째는 '교복 찢기'였다.
사연 많던 졸업식 꽃다발이 매년 많이 줄어든다는 소식이다. 얇아진 호주머니 사정 때문이라고 한다. 어떤 대학생들은 5000원짜리 헝겊 띠에 축하 문구를 써서 몸에 두르고 '인간 화환'이 됐다. "돈도 안 들고 재미도 있다"는 반응이 있다는데, 띠만 달랑 두르고 찍은 졸업 사진은 어딘지 좀 쓸쓸하다. 옛 시절엔 당국의 금지로 할 수 없이 '꽃 없는 졸업사진'을 찍었는데, 오늘엔 아무도 금지하지 않지만 형편이 빠듯해 꽃을 생략한다. 이래저래 꽃의 운명은 가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