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본문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 자들은 그의 종들과 가축을 들에 그대로 두었는데, 여기서 ’그대로 두었더라‘는 원문에서 ’아자브(עזב)‘인데 뜻은 ’버티다‘, ’떠나다‘, ’그대로 두다‘ 등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저들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 망각하게 됩니다. 즉 망하는 길임에도 그 망하는 것을 모르고 그 길에서 버티는 것입니다.
우리는 위의 본문을 통해서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러한 기적적 사건으로 재앙을 내리시는데도 어떻게 믿지 않을 수가 있지? 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적인 생각이며 착각입니다.
저들이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지 못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저들을 버리셨기 때문이며 또한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영광의 도구로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아가는 데 있어서 타락한 자의 생각과 시선을 떼어내지 않으면 그것을 정확하게 알 수가 없게 됩니다.
예수께서 나흘이나 무덤에 갇혔던 베다니의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사건에서도, 죽은 나사로를 함께 조문하고 애곡을 하던 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예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지만 저들은 믿지 아니하였고 도리어 이 사건으로 인해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모의를 하게 됩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망하면서도 하나님을 거부할 것입니다. 즉 저들 마음대로 하나님을 믿거나 믿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한다고 해서 믿지 않는 자가 믿거나 돌아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믿고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있다는 것을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지팡이를 하늘을 향하여 들 때에 여호와께서 뇌성과 우박을 애굽 온 땅의 사람과 짐승 그리고 밭의 채소와 들의 모든 나무들에 내리셨고 불이 함께 떨어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이 거주하는 고센 땅에는 우박이 없었습니다(23~26절). 구별입니다. 하나님께서 낳으신 언약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이삭의 후손들이기 때문입니다. 언약대로 보호하십니다.
민족으로서의 구분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구별은 세상 끝날까지 이어지다가 마무리가 되면 세상이 끝이 납니다.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하고 그리고 한 사람은 들림을 당하여 데려가십니다(마24:40).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지만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하게 됩니다(마24:41).
위의 본문 23절에서 “불을 내려 땅에 달리게 하시니라”는 직역을 하면 ’불이 땅을 향하여 달렸다‘입니다. 이는 하늘에서 불이 맹렬하게 떨어지는 모습을 의인법을 사용해 생생하게 묘사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불의 심판이 애굽에 맹렬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서 ’불‘을 다른 번역 성경에서는 ’번개‘라고도 합니다.
26절의 “이스라엘 자손들이 있는 그 곳 고센 땅에는 우박이 없었더라”고 하시는데 이 구절에서는 ’고센 땅‘이 중심이 아니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중심입니다. 이들 즉 언약 자손들 때문에 고센 땅에는 우박 재앙이 임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곳을 영적으로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라고 합니다. 뜻은 ’세상에서 구분하여 밖으로 불러냄을 당한 자들‘입니다.
멸망의 세상에서 꺼집어 냄을 당하여 밖으로 나온 자들이 있는 장소는 천국입니다. 즉 구별된 자들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비켜 가고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이 충만한 장소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장소를 범하거나 해할 수 없습니다. 언약 자손들로 인하여 고센 땅을 구별하신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약속의 땅인 가나안까지 구별하셔서 언약대로 인도하십니다.
27절부터 35절까지는 바로가 모세와 아론에게 뉘우치고 명대로 한다고 하다가 재앙이 그치니까 바로가 다시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명을 거역하는 내용입니다. 이에 바로는 모세와 아론에게 “이번은 내가 범죄하였노라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나의 백성은 악하도다 여호와께 구하여 이 우렛소리와 우박을 그만 그치게 하라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다시는 머물지 아니하리라”고 하면서 재앙을 거두어 달라고 요청하며 히브리 너희 백성을 보내겠다고 합니다(27,28절).
위의 본문에만 국한한다면 바로는 분명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재앙을 내리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우렛소리와 우박을 그만 그치게 해 주시면 백성들을 더 이상 잡아두지 아니하고 보낼 것을, “너희가 다시는 머물지 아니하리라”고 하며 약속합니다. 하지만 이 또한 잠시 뿐이며 자신의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되고 언약 자손들을 붙잡아 두게 됩니다.
위의 본문에서 바로가 자신의 범죄에 대한 반성과 여호와를 향한 찬양을 하는 것은 방편적인 것으로서 자신과 애굽에 닥친 크나큰 위기를 속히 모면해 보려는 술책일 뿐입니다. 죄인된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영접하고 입으로 시인한 상태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고백해야만 진실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 자신이 주의 피조물이며 예수를 나의 구주로 받아들이지 아니한 자는 입으로만 ‘주여!’하고 흉내 내며 면피용으로만 반성할 뿐 진실성이 없습니다.
이에 대한 분별이 흐려지면 마음이 약한 성도들은 자주 악한 자들로부터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지 않는 자들의 입술은 간사하며 오직 자신만을 위한 입술일 뿐입니다. 악인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들을 인간적인 감정에서 받아들여서는 안되며 늘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나라와 의의 편에서 듣고 판단하고 분별해야 시험에 들지 않게 됩니다.
바로의 요청에 모세는, “내가 성에서 나가서 곧 내 손을 여호와를 향하여 펴리니 그리하면 우렛소리가 그치고 우박이 다시 있지 아니할지라 세상이 여호와께 속한 줄을 왕이 알리이다 그러나 왕과 왕의 신하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아직도 두려워하지 아니할 줄을 내가 아나이다”(29,30절)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바로가 전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가운데 반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께 재앙이 물러가도록 간구합니다. 이는 모세가 하나님의 언약, 즉 장자 재앙을 통해서만이 바로가 언약 백성들을 내보낸다는 것을 깨닫고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위의 본문에서 모세는 여호와께서 애굽에 내린 우박 재앙이 그치실 것을 예고하며 “세상이 여호와께 속한 줄을 왕이 알리이다”라고 말합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애굽에 재앙을 내리시고 그리고 또한 마음대로 그치게 하시므로서, 온 세상이 여호와께 속해 있다는 것을 왕이 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온 세상이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역 안에 있음을 뜻합니다.
이를 조금 확대하여 영적으로 정리하면, 죄의 권세나 천사의 권세도, 천국이나 지옥도 모두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뜻합니다(롬8:38~39 참조). 그러므로 애굽이 여호와께 속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며 이 또한 여호와의 영광을 위한 도구이며 과정일 뿐입니다.
그리고 30절에서 모세는 바로와 바로의 신하들이 아직도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두렵다는 ‘야레(ירא)’라고 하는데 이는 심리적으로 무서운 감정을 갖게 될 때 사용되지만 본문에서는 문맥상 ‘경외하다’, ‘공경하다’, ‘존경하다’란 뜻입니다. 즉 ‘야레’가 신에게 사용될 때는 예배의 대상에게 갖는 경외심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당시 바로는 애굽의 신적 존재로서의 왕입니다. 그런데 그가 만약 신하들 앞에서 저들이 종으로 데리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을 인정하고 경외한다고 하면 그가 애굽에서의 신적 존재로서의 자격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바로는 여호와를 믿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인정하는 것도 죽기 직전까지 하지 않습니다.
모세는 왕과 왕의 신하들이 아직도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애굽의 삼과 보리는 상하게 하셨으나 밀과 쌀보리는 상하지 않게 하셨으므로(31,32절) 바로는 아주 절망적인 상태가 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밀과 쌀보리까지 먹지 못하도록 다 상하게 하셨다면 바로가 마음을 완악하게 가질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데도 여호와께서 모세로 재앙을 그치게 하는데, 그것은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케 하여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33~35절).
지금까지의 재앙을 되돌아보면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을 통하여 이스라엘 언약 자손들을 애굽에서 해방하실 것을 약속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와 같은 여러 재앙과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실 일들에 대하여 같은 말씀으로 여러 번 반복하시면서 이어 가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는 첫째로,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를 여러 과정으로 보여 주심으로 말미암아 모세를 비롯한 이스라엘 언약 자손들로 여호와가 믿어지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10:17)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둘째는, 때와 기한이 정하신 하나님께 있음을 밝히면서 여호와의 주권을 드러내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솔로몬은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다’(전3:1)고 교훈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이 시공(時空)의 주인이시며 주권자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