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좌수사 이대원 신도비명
《약천집(藥泉集) 제17권》 / 〈신도비명(神道碑銘)〉
전라 좌수사 이공(李公) 신도비명 기묘년(1699, 숙종25)
저 옛날 만력(萬曆) 정해년(1587)은 우리 선조대왕(宣祖大王)이 즉위하신 지 20년이 되는 해이다.
이해 봄에 일본의 왜적들이 우리나라 남쪽 변경을 침입해서 우리 백성들을 노략질하여 배에 태우고
연해에 돌아다녔으나, 감히 이들을 막는 자가 없었다.
공이 이때 녹도만호(鹿島萬戶)를 맡고 있었는데 홀로 수하(手下)의 병졸을 인솔하고 배를 정돈하여
왜적을 추격해서 대파하여 적선 20여 척을 침몰시키니, 남은 적들은 도망가고 우리 군사들은 사망하거나
실종된 이가 없었다. 공이 돌아와서 수사(水使)인 심암(沈巖)에게 수급(首級)을 올렸다.
심암은 겁을 내어 당초 왜적을 물리친 일이 없었으나 공의 공로를 빼앗으려고 하여 공을 앞으로 오라고
불러서 귓속말로 이리이리 말하였다. 공이 따르지 않자, 심암은 부끄러워하고 노하였다.
얼마 안 있다가 왜적들이 또 크게 몰려오자, 심암은 공에게 출전할 것을 재촉하였다.
공은 말하기를 “해가 이미 저물었고 병력이 또 적으니, 병력을 규합하고 예기(銳氣)를 모아 날이 밝기를
기다려 싸우겠습니다.”라고 하였으나 심암은 허락하지 않고 위엄을 내세워 협박하였다.
공이 출발하면서 심암에게 뒤따라올 것을 청하였으나 또 허락하지 않았다.
공은 피로한 병졸 100여 명을 데리고 왜적과 손죽도(損竹島) 바다에서 교전하였는데, 반드시 죽기를
각오하고 사력을 다하여 3일 동안 격투를 벌였다. 그리하여 적을 죽이고 부상을 입힌 것이 매우 많았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그러나 심암은 앉아서 보기만 하고 끝내 공을 구원해주지 않았다.
공은 일이 이루어지지 못할 줄을 알고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고 옷을 벗어서 절구(絶句) 한 수를 쓴 다음
가동(家僮)에게 주며 말하기를 “이것을 가지고 고향에 돌아가 장례하라.” 하였다.
시는 다음과 같다.
日暮轅門渡海來 해 저무는 군문에 바다를 건너오니
兵孤勢乏此生哀 군사는 적고 형세는 끊겨 이 인생 가련하네
君親恩義俱無報 군주와 어버이께 은혜와 의리 모두 보답하지 못하니
恨入愁雲結不開 원한이 시름겨운 구름 속에 맺혀 풀리지 않으리라
군대가 패전하여 공은 적에게 사로잡혔는데, 항복하라고 위협하였으나 굴복하지 않자 배의 돛대에 묶어
놓고 사정없이 때렸다. 그러나 공은 죽을 때까지 꾸짖는 소리가 입에서 끊이지 않았다.
공이 처음 첩보(捷報)를 올렸을 적에 관찰사가 이 사실을 장계(狀啓)로 보고하니, 임금은 수사 심암을
교체하고 공으로 대신하게 하였으나 조정의 명령이 도착하기 전에 공이 이미 별세하였다.
변방의 백성들은 심암을 괘씸하게 여기고 공을 가엾게 여겨서 한탄하고 안타깝게 여기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공은 휘가 대원(大源)이고 성이 이씨(李氏)이니, 표덕(表德)은 전하지 않으며 관향은 함평(咸平)이다.
시조는 고려 때 신무위 대장군(神武衛大將軍)을 지낸 휘 언(彦)이고, 7대조는 조선조에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개성 부윤(開城府尹)을 지낸 휘 온(氳)이다. 증조는 군수 휘 석필(碩弼)이고 조고는 진사 휘 인(仁)이며,
선고는 휘 춘방(春芳)이다. 선비 정선 전씨(旌善全氏)는 목사 우성(佑聖)의 따님인데, 가정(嘉靖)
병인년(1566, 명종 21)에 공을 낳았다.
공은 만력(萬曆) 계미년(1583, 선조16) 무과에 급제하여 병술년(1586, 선조14) 선전관(宣傳官)으로 있다가
만호(萬戶)로 나갔는데, 국사를 위하여 죽었을 때의 나이가 22세였다.
집안 식구들은 공의 유명(遺命)을 받들어 혈서로 쓴 옷을 가져다가 양성현(陽城縣) 대덕산(大德山) 아래에
장례하였다.
전취 부인은 동래 정씨(東萊鄭氏)이고 후취 부인은 용인 이씨(龍仁李氏)로
같은 등성이에 묻혔는데 묘소가 다르다.
정해년(1587) 봄은 왜란이 일어난 임진년보다 5년 전으로 바로 일본의 풍신수길(豐臣秀吉)이 이를 갈고
혀를 빼물고서 정예병을 내어서 시험하였다. 이때 공이 마침내 한 작은 보루(堡壘)의 장수로서 위용(威勇)을
세워 적을 세차게 공격하고 큰 공을 세우고도 주장(主將)의 비위에 거슬렸으니, 주장은 공의 재능을 시기하였고
적은 자신들을 괴롭힌 자를 없애려 하였다. 그리하여 묘년(妙年)의 영재(英才)를 장도(長途)에 오르는 초기에
갑자기 죽게 하였다. 그리하여 미처 임진년의 큰 적을 막아서 중흥의 위대한 공을 돕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 어찌 하늘이 공을 탄생시킨 본의이겠는가. 아, 애석하다.
그러나 임진왜란에 호남 지방이 유독 완전하여 다시 나라를 일으키는 근본이 되었으니, 이는 공이 먼저
왜적에게 몸을 맡겨서 사람들의 마음을 장려하고 분발시킨 효험이 아니라고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이 수양성(睢陽城)에서 죽은 것이 어찌 곽자의(郭子儀)와 이광필(李光弼)이
삭방(朔方)에서 공을 세운 것만 못하겠는가. 그러나 이 또한 외면을 가지고 논한 것이니, 만약 신하의 본분을
논한다면 국경에 있으면 국경을 지키다가 죽고 군대의 항오(行伍)에 있으면 항오에서 싸우다가 죽는 것이 모두
그 본분이다. 죽음이 그 본분을 얻으면 대의에 맞으니, 또 어찌 이룬 공적의 크고 작음을 따질 것이 있겠는가.
공이 별세한 뒤에 화곡(華谷) 정기명(鄭起溟)이 녹도가(鹿島歌)를 지었는데, 여기에 이르기를
“순수한 충성 지금까지 다 밝혀지지 못하였고, 원흉은 오랫동안 살아 형벌을 피한다.〔精忠至今未盡白
元惡久活違刑章〕” 하였으며, 《고사촬요(攷事撮要)》에는 이르기를 “심암을 잡아다 효시했다.” 하였고,
《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에는 “심암을 처형하고 공에게 증직을 내렸으며 정려를 세웠다.” 하였다.
그렇다면 선을 표창하고 악을 벌주는 법이 애초에는 오히려 분명하지 못하다가 오랜 뒤에야 비로소 정해졌는가
보다. 공의 사당이 본보(本堡 녹도보(鹿島堡) )에 있었는데, 임진왜란에 본보의 만호(萬戶) 정운(鄭運)이
또다시 전사하자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장계를 올려 함께 제향할 것을 청하였다.
금상 때에 본도의 유생이 상소하여 청원하자 쌍충(雙忠)이라고 사액하였다.
공은 유복자(遺腹子)를 두었으니, 이름이 철(鐵)이다.
나이 18세에 중부 참봉(中部參奉)에 제수되었는데 다음 해에 요절하였다.
철이 또다시 유복자를 두니 이름이 준건(俊健)이다. 준건이 두 아들을 두었으니, 석(錫)과 현(鉉)이다.
지난 선왕조 때에 석이 상소하기를 “선조대왕께서 신의 증조부가 국가를 위해 죽은 충절을 가상히 여기시어
증직을 내리고 정려를 세워 주셨으며 또 자손들을 녹용하라는 명령이 계셨습니다. 그러나 임진년 병란이 일어난
뒤에 집에 보관한 문적이 모두 없어지고 외롭고 잔약한 후손들이 겨우 실낱처럼 끊이지 않아, 은총으로 추증한
벼슬이 무슨 칭호인지 알지 못하고 정려를 세웠던 곳에는 다만 유허만 남아 있습니다.
해사(該司)로 하여금 옛 문적을 상고해서 다시 증직의 직첩(職牒)을 내려 주시고 또다시 정려를 세워 주소서.”
하였다. 이 일을 예조에 내려 병조 참판을 추증하고 양성(陽城)의 본가에 정려를 다시 세웠다.
석은 무과로 등용되어 일찍이 부산 첨사(釜山僉使)에 제수되었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국가를 위해 죽은 사람의 후손이니 차마 왜적과 접견할 수가 없다.” 하여 굳이 사양하였다.
조정이 핍박하여 보내자 부득이 진(鎭)에 이르렀으나 끝내 왜국 사신을 만나지 아니하였다.
이 때문에 파직되니 의논하는 자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지금 현재 충청 수사(忠淸水使)로 있다.
석은 4남을 두었으니, 인발(寅發), 진발(震發), 항발(恒發), 세발(世發)이다.
현(鉉)은 아들 지발(之發)을 두었다.
항발은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공의 사적(事跡)의 시말을 갖추어 나에게 신도비명을 청하였다.
아, 옛사람들은 혼을 불러 장례하는 것을 예가 아니라 하였다.
그러나 공의 혈서로 쓴 옷을 묻은 것으로 말하면 없어지지 않을 영혼이 강림하여 사람들을 서글프게 할 것이니,
이곳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그리고 자손들이 봉분(封墳)하고 나무를 심으며 후세 사람들이 감동하는
마음을 일으킬 곳 또한 이곳이 아니면 어디이겠는가.
이에 사양하다가 마침내 서술하고 또 명문(銘文)을 짓는다.
양성현의 / 陽城之縣
대덕산에 / 大德之山
혈서가 있어 / 爰有血書
이 사이에 묻혀 있네 / 埋于其間
옛날 죽은 자들은 / 古之死者
충성이 맺히고 엉겨 / 忠誠菀結
흙 속에서 푸른 옥돌 되어 / 入土化碧
땅을 깎아도 없어지지 않았네 / 剗地不滅
또한 이공이 / 亦言李公
목숨을 바쳐 순국하여 / 以身殉國
굳센 넋이 훌륭하니 / 毅魄爲雄
의탁할 곳이 없겠는가 / 其可無託
남제운(南霽雲)의 손가락을 깨물어 / 斫雲之指
장순(張巡)의 시를 쓰니 / 寫巡之詩
슬픔은 귀원보다 심하고 / 悲甚歸元
장례는 과시와 같아라 / 葬同裹尸
상상하고 우러러보며 사모할 곳이 / 想像瞻慕
바로 이곳이라오 / 此焉其所
돌을 깎아 묘에 표시해서 / 鑱石表墟
후세에 길이 보이노라 / 永眎來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