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 여행9 - 부자묘 앞에서 인력거를 보며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을 떠올리다!
명 태조 주원장 은 1368년 서달 에게 20만을 주어 원나라 수도 대도를 함락하니 칭기즈칸이
금나라를 격파하고 북경을 점령한지 153년, 거란에 점령당한지는 430년 만의 일로
원나라로 부터 “중화의 회복” 은 군사적, 정치적인 것에 그쳐서는 안된다는 신념이었습니다.
그는 북방민족 특유의 “호복변발”을 금지하고 한족 고유의 옷차림과 머리모양 을 회복
했으며 유교 의 가르침을 장려하고 과거제 를 실시해 사대부 들을 관료로 등용하니
시문 위주 송나라 과거 방식을 팔고문 이라는 답안을 작성하는 방식으로 바뀌게 됩니다.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인재보다 교양과 재치 를 갖춘 사람이 적합하다는 뜻이니 송나라
가 시문 짓기 방식의 과거제도로 엘리트 계급이 유약해져 북방민족에게 졌다고
본 것인데... 중국인에게 푸츠먀오 夫子廟 (부자묘) 는 몇 번 버스가 가느냐고
물으니 가까우니 걸어가랍니다? 제루 체 다오 푸츠먀오 마? 这路 车 到 夫子廟 吗
명나라는 윤리 의식 이 일반 서민들에 까지 퍼져야 한다면서 “육유(六諭)”를 반포했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라, 웃어른을 공경하라, 자식들을 바로 가르쳐라, 이웃끼리
화목하라, 각자의 직무에 충실하라, 옳지 않은 일을 옳다고 하지 마라”는게 "육유" 이지요...
이 교훈은 훗날 일제의 “교육칙어”와 박정희의 “국민교육헌장” 이 본받은 것이기도 한데
“농본억상(農本抑商)”이라는 유교적인 산업정책을 도입해 전국적인 토지 조사사업
을 벌였으니 작성된 토지대장 은 물고기 비늘 같다 해서 “어린도책”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개간과 둔전 사업을 벌이고 치수에 힘쓰는 한편 토지 어린도책 을 철저하게 작성하는
동시에 상업 은 최소한으로만 허용한다는 뜻에서 화폐 유통을 금지 시키고 대외
무역 역시 금지했으니... “한 조각의 널빤지 조차 바다에 띄우지 마라”는 엄명을 내립니다.
바닷길과 초원길 을 상인들이 오가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으며... 자급자족 을 목표로
하는데 성세를 자랑하던 명나라도 세월이 흐르니 부정부패 가 심해지고 환관 이
득세하는가운데 임진왜란시 조선에 7년간 연 30만 대군 을 파견하는 무리수 를 두게 됩니다.
몽고족 후예들의 공격과 민심이반 이 진행되던 가운데 7년 동안 조선에 연 30만대군 의 파견
으로 나라 재정이 파탄나니 적자를 메꾸기 위해 세금을 폭징하자 이를 참지못한 농민
반란 이 일어나니 농민반란 진압을 위해 다시 군대를 늘려야 하는 악순환 속에 통제에
소홀할수 밖에 없었던 만주족 이 점차 힘을 기르니 결국 망하고 청나라 가 들어서게 됩니다.
명나라가 임진왜란과 농민반란에 몰두하는 새에 만주의 여진족들은 기회를 잡은 것이지요?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병하지 않고 압록강변에 대군을 주둔시키고 방비만
굳게하고 만주를 잘 관리했으면... 소수의 여진족 따위에게 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파병 여력도 없는 명이 조선에 개입한건 황제국의 체면 을 위한 것이었으니 허망한 일이지요?
청나라 말기인 1842년에는 아편전쟁 후 난징조약 이 이 도시에서 체결되었고 1852년
태평청국군 (太平天國軍) 이 점령해여 천경(天京) 으로 불렀으나 황폐해졌고
난징 은 1858년 톈진조약에 의해 개항장 이 되었으며 신해혁명(辛亥革命) 의 결과
1912년에 중화민국 (中華民國)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1927년 수도 가 되었던 것입니다.
일본군에게 점령되어 왕자오밍 (汪兆銘 왕조명) 정권이 수립되었다가 국민당 정부 가 복귀
하였으나... 1949년에 중국 공산군에 의해 점령되는데 현재는 장쑤성의 성도(省都) 로
양쯔강에 면해 있고 무푸산, 쯔진산, 서쪽에 칭량산 등이 솟은 군사상 요지 이기도 합니다.
구시가를 둘러싼 성벽은 높이 13∼25m, 주위 34km 에 달하여 도시를 둘러싼 성벽으로는
세계 최대 로 알려져 있으며 1968년 양자강에 6,700미터 창장대교 가 개통되었고
난징대학과 박물관에 쑨원의 묘소인 중산릉 과 명나라 홍무제의 무덤 효릉 이 있습니다.
공자의 사당 이 있는 푸츠먀오 夫子廟 (부자묘) 에는 큰 대문이 우리 부부를 맞이합니다.
대문을 들어서니 양쪽으로 가게들이 밀집한 것이 관광지임을 알게해 주는데
걸으니 오른쪽에 진회하 라는 운하가 보이고 건너편에 용 두 마리 가 강열한 인상을 줍니다.
운하에는 노랑색 유람선 들도 보이니 한번 타 보는 것도 가히 나쁘지는 않으리라?
그리고 여긴 역시 노랑색 옷을 입은 인력거 꾼 이 많이 보이는데
첨원 이며 지하철 역 으로 이동할 때 이용할만하나 요금은 틀림없이 비싸겠지요?
인력거 를 타는 사람이라고는 없으니 저 사람들 입에 풀칠이나 할까 주제넘은 걱정을하다
마침내 어렵게 한쌍이 타는걸 보니 불현듯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이 떠오르네요?
비가 “추적추적” 오는 어느 날, 재수가 옴 붙어 근 열흘동안 돈 구경을 못한 인력거꾼
김 첨지에게 행운 이 불어닥치니 아침 댓바람에 손님을 둘이나 태워 80전을 번 것이다.
며칠 전부터 앓아 누운 마누라 에게 그렇게도 원하던 설렁탕 국물 을 사줄 수 있으리라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려던 그를 1원 50전으로 불러 세운 학생 손님 까지 만난다.
엄청난 행운 에 신나게 인력거를 끌면서도 가슴을 누르는........
“오늘은 나가지 말아요.” 하던 마누라 말이 계속 마음에 켕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님과 흥정하여 또 한 차례 벌이를 한 후 이 “기적”
적인 벌이의 기쁨을 오래 간직하기 위하여 길가 선술집 에 들른다.
선술집의 분위기 속에서 얼큰히 술이 오르자, 김 첨지는 마누라에 대한 불길한 생각을
떨쳐버리려 건주정 을 하며 “원수엣돈” 을 팽개치기도 하고 미친 듯이 울고 웃는다.
취기 오른 김 첨지가 "설렁탕 국물" 을 사들고 집에 들어오자..... 이미 "숨진
마누라" 와 빈 젖꼭지 를 빨고 있는 개똥이 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
그러고 보니 내 어릴 때 쌀 이라고는 구경도 못하고 시커먼 보리밥 마저 세끼를 먹지못해
무우밥이나 감자나 고구마 로 점심을 떼우던 시절이 생각나서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쇠고기국에 쌀밥 한그릇이면 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던게 국민학교 시절인데 중국 난징이라니?
그리고 운하 맞은편인 광장 왼쪽에 고풍스러운 기와집 이 보이는데...
푸츠먀오 夫子廟 (부자묘) 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부자묘 는 공자의 사당 인데 주변에 옛날풍 번화가 가 조성되었으며
파란 벽돌 기와와 창이 진회하에 그림자를 비추니
운치있는 거리로 文德橋(문덕교) 에서 바라보는 야경 이 좋다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