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골목
윤 여 정
오랜만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내가 사는 아파트 주변의 풍경을 바라본다. 길가 잡풀 속에 노랑 꽃잎으로 얼굴을 내민 애기똥풀이 발걸음을 머물게한다. 가벼운 미소가 번진다.
골목을 걸으며 나지막한 굴뚝에서 밥 짓는 연기가 새어 나오는 상상을 한다. 애호박을 썰어 넣은 된장국의 구수한 냄새가 나는 듯하다. 담과 벽이 이어지는 길, 한 사람이 들어서는 좁은 길을 걷는다. 이웃들이 마주 보며 숨 쉬는 공간 속에. 방문 열면 틈새로 하늘이 보이고 앞집의 낡은 문고리가 보인다.
집집마다 색은 달라도 모양이 같은 철 대문, 어떤 집은 덧칠한 페인트가 벗겨져 빨간 색이 드러나 있다. 철 대문이 한 뼘 열려 있어 고양이 한 마리가 제집처럼 드나든다. 대문 안을 들여다보니 담벼락 위에 고양이가 웅크려 앉아 있다. 고양이의 눈이 반쯤 감긴 걸 보니 낮잠을 즐기려나 보다.
초등학교 앞, 오래된 문방구 간판은 받침 한 개가 떨어진 지 오래다. '무방구' 괜히 웃음이 나온다. 빛바랜 추억들이 가슴에 아련하게 스며든다. 문턱이 닳을 만큼 드나들었던 코흘리개 아이들이 그렸을 법한 담장 그림에 시선을 멈춘다. 삐뚤빼뚤하게 씌인 담벼락 앞에서 보물 찾듯, 아이들이 놀았던 흔적을 찾는다. 구석에 '우염해'라는 글씨가 보인다. '위험하다'라는 뜻일 텐데 아이들에겐 그렇게 들렸을 수도 있겠다. 그 시절 아이들의 재잘대는 소리가 귓전에 울리는 것 같다.
다시 가파른 돌계단으로 올라갔다. 숨이 차다. 어느덧 이 동네로 이사온 지 삼십 년이 되었다. 동네 꼭대기에 있는 골목은 다시 새로운 좁은 길로 이어지고 있다. 동네 사람들이 해가 저물면 약속이나 한 듯 모두 펑퍼짐한 옷차림으로 대문을 열고 나오는 모습이 눈에 아른거리곤 한다. 아낙네들은 골목길의 담벼락 밑에 쭈그리고 앉아 자식 자랑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넘실대는 웃음소리, 입이 귀에 걸려 왁자지껄한 웃음소리, 같은 얘기를 백번도 더 들었다는 표정들, 옆집 이웃은 손으로 허공을 휘젓는다. 그만 자랑하라는 몸짓으로 알아듣고 입을 다문다. 그런 시끌벅적한 소리가 아련하다.
이발소의 나무 간판이 삼각형의 형태로 길가에 세워져 있다. 벽의 타일이 군데 군데 떨어진 모양으로 50 여년전 건물로 보인다. 주인도 머리칼이 희끗희끗한 노인이 되었다.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그 옛날 건물 지었던 방식 그대로였다. 머리 감는 통의 안쪽은 작은 정사각형의 하얀 타일로, 겉은 파란 색의 두꺼운 배수구가 보였다. 이발소 벽면의 액자 속 사진은 이미 바래졌다.
옆 골목에는 재래시장이 그대로 자리잡고 있다. 천정은 눈비를 피하도록 아치형으로 둥글게 막혔다. 중앙 통로를 걸었다. 한 줄로 걷는 길이다. 양쪽엔 한 평 남짓한 점포들이 다닥다닥 붙었다. 시장통 한 가운데에 우물이 있었다. 깊고도 맑은 우물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옛날 나비 떼들이 모였다 사라진 큰 바위 옆 둥근 입구의 샘물, 내어주고 또 내어주어도 솟아나는 맑은 물의 기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가던 길 멈추고 우물가 의자에 앉아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펴본다.
눈썹마저 하얀 늙은 총각, 처녀의 까만 머리결이 꽃잎처럼 흩날리던 밤,
서로의 얼굴엔 웃음꽃이 빛나던 동네 연애 장소였다. 마음에 치유 장소가 되어 준 곳이 우물가. 바닥에 놓여 있는 두레 박 줄을 잡는 처녀에게 남자의 손길이 포개지는, 두 사람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재밌는 상상을 하며 저절로 미소를 머금는다.
길이 좁아 한 줄로 걷는 모습은 달팽이 걸음만큼이나 느린 시간 속에 각기 다른 사연을 담고 있다. 높은 지대에 올라오니 아랫동네의 지붕들이 보인다. 비바람에 지붕이 날아가지 않도록 파란색 방수 포장재를 덮여 있다. 그 위에 무거운 기왓장을 눌러 놓았다. 평지의 길을 걸을 때와 또 다른 개인의 역사가 기억되는 살아 있는 풍경이었다.
직장관계로 가족을 떠나 삼십년 전, 처음에 대전에 홀로 왔었다. 아무도 모르고 발을 들여놓았을 때 막다른 골목처럼, 답답하고 당혹한 느낌이었다. 동네에 살면서 이웃들을 사귀고 나의 삶도 이 골목처럼 연결이 되어 안정되고 평안하다. 지금 내가 걷는 골목은 소소한 일상의 풍경을 담아낸다. 골목은 나의 삶과 비슷하다. 오래 전 왔던 길이 이제는 제2의 고향처럼 골목과 골목이 서로 연결되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지금 바라보는 삶이 평화롭다.
동네를 안다는 것은 작은 차이를 발견하는 일이다. 그 차이는 세상의 존재들이 각기 다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골목에는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고 다름에서부터 관심과 애정이 생겨난다. 여러 가지 삶의 모습을 발견해 본다. 골목이 집과 집 사이를 연결하듯, 나의 삶도 사람과 사람 사이를 다정한 길로 연결하는 그런 골목을 닮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