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처럼 바람처럼 3>
사람 살기 좋은 곳
“뉴질랜드의 어느 원로 교포는 “뉴질랜드 뭐 볼 것 있나? 그저 풍광(風光) 하나지”라고 했다. 그렇다. 풍광 - 그것이 뉴질랜드의 대명사일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환경 중에서 먹는 것 빼고는 풍광이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살기 좋은 외국 땅에서 사는 교포들은 흔히 “서울은 재미있는 지옥이고 이곳은 재미없는 천국”이라고 말을 한다. 내가 보기에 뉴질랜드에 사는 사람들은 재미보다 천국을 택한 것 같다. 그리고 그 천국 속에서 나름대로의 재미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좋은 여행지를 평가할 때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은 곳과 그곳에서 살았으면 하는 곳으로 나눈다지만 나는 뉴질랜드를 저 먼 곳에 건드리지 않고 놓아두었다가 가끔 마음이 꽉 막혔을 때 나 혼자 몰래 찾아가서 묵고 싶은 곳으로 간직하고 싶다.(조선일보 , ‘김대중 기자의 뉴질랜드 紀行’ 중)
나는 50년이라는 세월 동안 여행과 산행을 하면서 우리나라 곳곳을 다녀보았습니다. 그리고 외국의 여러 도시들도 가 보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각 나라 각 지방에는 어떤 특징이 있어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경기가 열리고 있을 즈음, 21박 22일 동안 멕시코를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나는 멕시코 제2의 도시 과달라하라에서 TV를 통해 황영조 선수가 금메달을 따는 장면을 지켜보았습니다. 그 도시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곳이 UN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사람 살기에 가장 좋은 기후를 가진 곳’이라며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때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환경 중에서 기후 조건도 중요한 한 요소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중국 여행을 가면 가이드들이 중국 각 지역의 관광 특징을 다음과 같은 우스갯소리로 나타냅니다. 수도 베이징은 자금성 등 걷는 코스가 많아 ‘다리 아픈 관광’, 중국을 대표하는 역사도시 시안[西安]은 가이드의 설명을 많이 들어야 하므로 ‘귀가 아픈 관광’, 백두산을 둘러보는 옌볜[연변]은 차타는 시간이 너무 길어 ‘허리, 엉덩이 아픈 관광’이라고 합니다. 거기에 비해, 경치가 아름다운 구이린[桂林]은 아기자기한 볼거리가 많아 ‘눈이 아픈 관광’, 장가계는 ‘와와관광’이라고 합니다. 산수경관이 너무나 아름다워 움직이는 곳마다 감탄사 ‘와’가 절로 나온다고 붙여진 말입니다.
계림은 36,000 봉우리의 산들이 대개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봉긋봉긋하게 솟아오른 모습이 여성적인데 비해 장가계의 7,000봉우리는 석영사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불쑥불쑥 치솟은 형상이 웅장하여 남성적인 풍취를 느끼게 합니다. 1992년에는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면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장가계는 수려한 봉우리와 기이한 동굴 그리고 청량한 공기와 계곡물은 이태백과 도연명 등 옛 선인들이 칭송했던 천하절경 무릉도원이 바로 이곳이 아닐까 추정할 정도로 풍광명미(明媚)한 곳입니다. 이처럼 산수의 경치가 맑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그런 여행지에서 버릇처럼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곳에서 살면 행복할까?’ 하는 물음입니다.
젊은 시절 한창 산에 다닐 때, 나는 은퇴한 후 지리산 칠선계곡의 한 언저리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사는 우리의 삶은 행복할 거라는 전제하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칠선계곡 자연의 품속에서 살면 행복할까?’라는 물음에 대해 ‘그렇다’고 100% 확답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칠선계곡은 설악산 천불동계곡, 한라산 탐라계곡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계곡의 하나입니다. 천왕봉에서 북쪽의 함양 마천의 의탄마을까지 장장 15km에 걸쳐 있는 긴 계곡으로, 지리산 10경의 하나로 꼽힐 만큼 계곡미가 빼어나며 크고 작은 폭포와 소, 담 등을 간직한 원시의 계곡 그대로입니다. 천왕봉 정상에 올라 칠선계곡 쪽을 내려다보면 거대한 뱀 한 마리가 은비늘을 반짝이며 꾸불거리는 듯 뻗어나가는 모습이 장관입니다. 지리산의 10여 개 골짜기 중에서 가장 험난한 곳으로 산행 코스의 난이도와 거리 등을 감안할 때 산행 경험이 일천한 사람들은 엄두조차 내지 말아야 합니다.
험난하고 깊숙한 계곡이다 보니 도피자나 은둔자들이 많이 은신하기도 했습니다. 또 지리산의 전설적 인물인 우천 허만수(宇天 許萬壽)가 생전에 “칠선계곡의 어디에선가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지겠다.”는 말을 하고는 실제로 1976년 6월 어느 날, 그렇게 죽음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홀연히 사라져갔습니다. 그래서 칠선계곡은 허만수가 영생의 보금자리를 찾아 사라진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허만수는 홀로 지리산 세석고원에서 30여 년 원시인처럼 살면서 등산로 개척, 조난자 구조 등 봉사활동과 함께 온 몸과 온 마음으로 지리산을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리산 산꾼들에게 ‘지리산을 위해 태어난 사람’ ‘영원한 산사람’ ‘인간 산신령’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선녀탕, 옥녀탕, 비선담, 칠선폭포, 대륙폭포, 염주폭포, 삼층폭포, 마폭포 등이 선경을 빚고 있는데, 선녀탕의 전설은 칠선계곡의 전설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일곱 선녀가 이곳 선녀탕에서 항상 목욕을 했는데, 몰래 목욕 장면을 훔쳐보곤 하던 곰이 선녀들에게 연정을 품어 오다가 하루는 선녀들의 옷을 훔쳐 나뭇가지에 걸어 두었습니다. 목욕 후 선녀들이 옷을 찾아 애를 태우고 있을 때 사향노루가 자기 뿔에 걸려 있던 옷을 가져다주어 칠선녀는 하늘나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선녀들은 사향노루들을 모두 그곳으로 불러 모아 살게 했고, 곰은 그 옆 골짜기인 국골로 쫓아버렸다고 합니다. 칠선계곡의 이름은 바로 이 일곱 선녀의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선경(仙境), 비경(秘境)이란 말 그대로 풍광이 뛰어난 칠선계곡에서 사는 나의 여생이 실제로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인지, 실제로 그곳에서 생활을 하면서 느낄 삶의 만족도는 그런 생각을 할 그 당시로서는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우천 허만수처럼 온 몸, 온 마음으로 지리산을 사랑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곰이 그랬던 것처럼 일방적인 연정만으로는 진정한 사랑의 성취를 이룰 수는 없는 일. 다른 골짜기로 쫓겨난 곰처럼 다시 도회지로 쫓겨날 확률이 크기 때문이었습니다. 흔히 은퇴자들이 풍광 좋은 곳에 미리 별장을 지어 두었다가 막상 살러 가서는 그곳에서 제대로 지내지도 못하고 되돌아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재미없는 천국보다 재미있는 지옥 생활에 길들여져 있었기에 자연을 벗해서 사는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은퇴자들 중 부부가 따로 생활하는 경우도 곧잘 볼 수 있습니다. 남편은 재미없는 천국에서 나름대로의 재미를 만들어가면서 살아가는데, 아내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어 재미있는 지옥을 택한다는 것입니다. ‘영남 알프스’로 불리는 양산 영취산-신불산 줄기와 밀양 재약산 줄기 사이에 배내골이 있습니다. 상류인 경상남도 울산시 상북면 이천리에서 하류인 양산시 원동면, 장선리, 선리, 대리까지 이어지는 골짜기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이 골짜기를 따라 흐르는 시내[川]를 이르는 이름이 배내[梨川]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맑은 개울 옆으로 야생 배나무가 많이 자란다 하여 배내다.’ ‘조선시대 지방순시에 나섰던 어느 감사가 이곳을 지나면서 물 한 그릇을 청해 마시고는 물맛이 배를 씹는 것과 같이 달고 시원하다 하여 배내라고 했다.’라는 등의 지명 어원설도 있고, 원동 영포리에서 넘어가는 배태고개에서 배내골을 내려다보면 강물에 떠내려 오는 배[舟]를 닮아 배내라고 이름 지어졌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러나 ‘배내’는 본래 ‘[光明]+내[壤]’의 ‘내’에서 변한 말입니다. ‘내[壤]’는 땅을 뜻하는 말이므로 ‘내’는 ‘밝은 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배오개’나 ‘배고개’란 지명은 ‘고개’의 음변입니다. ‘’은 ‘배’와 잘 호전되어 사용됩니다. 배티고개, 배태고개, 배치고개라고 할 때의 ‘배티’는 ‘티’로서 ‘밝은 고개’라는 뜻입니다. 배달민족이라고 할 때의 ‘배달’은 ‘달’의 음변입니다.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의 박달재 지명이 박달이란 선비와 금봉이란 처녀의 애절한 전설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원래 여기의 ‘박달’ 또한 ‘달’ 즉 ‘밝은 땅’이란 뜻입니다. 배티고개, 배고개, 박달재 등 ‘’ 계통의 지명들은 모두 ‘빛(안녕과 평화)을 주는 터전’이라는 ‘’ 사상에 연유해서 지어진 이름들입니다. 그러니 배내는 사람 살기에 좋은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마을이름인 것입니다.
1985년경, 30대 후반 시절이었습니다. 은퇴 후에 들어가 살만한 곳을 찾아볼 요량으로 친구 이영민과 함께 조용한 산골을 찾아다니던 적이 있습니다. 배내골은 그때만 해도 오지마을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나 발걸음을 했던 곳입니다. 요즘은 전원주택들이 많이 들어섰고 유흥음식점, 전문 민박집, 노래방까지 들어와 도시화가 많이 되었습니다. 당시엔 도로 포장이 안 돼 있어 비온 후 대형 트럭들이 지나가면 트럭 바퀴에 푹 파인 땅이 그대로 굳어 있기도 해서 일반 승용차들이 다니기엔 많은 무리가 따랐습니다. 그런데도 그때 친구의 승용차를 타고 양산 원동에서 언양 석남사 쪽으로 이어지는 좁고 험한 비포장도로를 계속 달려 배내골 골짜기 전 구간을 답파했던 것입니다. 여행이 끝난 후 차는 정비공장으로 직행해야만 했습니다.
차를 타고 양산 배내 어느 지점을 지나고 있는데, 한 노인이 손을 들어 언양 배내까지 차를 좀 태워달라고 하였다. 요즘도 그렇지만 버스는 양산 배내의 경계지점 가까이에 있는 장선마을이 종점이라 언양 배내로 가려면 반대 방향의 먼 거리에 있는 언양 터미널이나 석남사 정류소에서 출발하는 차를 타야 했습니다. 그래서 낮술에 약간의 취기가 있는 노인은 그 먼 길을 걸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양산시와 울산시의 경계를 지나 언양 배내지역인 이천(梨川)마을에 도착하니 차를 태워준데 대한 보답을 해야 한다며 자기 집에 가자고 이끄는 데, 아무리 사양해도 막무가내였습니다. 마루에 앉아 사발에 따라주는 소주를 억지로 마시면서 수많은 벌통이 놓여 있는 넓은 마당으로 고개를 돌리며 괴로운 표정을 감추어야만 했습니다. 함께 낮술에 취해가면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노인은 부산 D고등학교에서 생물교사로 근무하다 정년퇴직했다고 하였습니다. 퇴직하기 전에 세워 두었던 계획에 따라 이곳에서 양어장을 하려고 했습니다. 자연생활을 즐기면서 여생을 보내려 했는데, 몇 가지 차질이 생겼다고 하였습니다. 첫째 양어장 허가가 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어 벌을 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은 자기가 꿈꾸던 것이 아니라 하였습니다. 둘째, 아내가 산골에서의 노후생활을 거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큰아들은 검사, 작은아들은 의사인데, 자녀들도 모두 반대한다고 하였습니다. 천국 같은 도시생활을 놔두고 왜 지옥 같은 산골생활을 하느냐, 지금이라도 빨리 돌아오라 한다고 했습니다.
특히 아내가 산골생활을 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로 내세우는 것이 여러 계모임에 나갈 수 없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계모임의 친구들과 떨어져서 외롭게 살 수 없다며 끝까지 반대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혼자 들어와 홀아비 생활을 한다며 웃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다시 도시로 돌아갈 마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청산맹약(靑山盟約)의 시’라고도 하는, 최치원 입산시(入山詩)처럼 세상 인연을 다 떨치고 살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다시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노인의 결심도 언젠가는 허물어지고 말지 모를 일입니다.
중아, 산이 좋다는 그대 말 빈말이 아닌가./ 정말 산이 좋다면 무슨 일로 산을 다시 내려오느냐/ 두고 보게나, 내가 산 속 깊이 들면/ 세상 인연 다 떨치고 나오지 않을 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