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 이것은 비판학자들이 대홍수에 대한 성경 기록을 전복시키기 위해서 자주 내세우는 표준적인 반론이다. 그들은 노아가 알래스카와 오스트텔리아로 탐험을 떠난다는 생각을 비웃기를 좋아하며 특별히 노아의 가족들이 방주 속에서 일 년동안 동물들을 먹이며 청소하는 문제를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보수적인 기독교 학자들이 과거에 여러 차례 이러한 반론에 대답한 사실이 물론 종교적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생소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쓰여진 책들을 결코 읽지 않기 때문이다. 창세기 6장 15절은 방주의 크기가 300/50/30큐빗이었다고 기록해 준다. 한 큐빗은 적어도 17.5인치였다. 이런 근거에서 볼 때 방주의 적재 능력은 적어도 철도의 표준화차 522대의 적재 능력에 해당된다.
표준 화차 한대는 양 240마리를 수용할 수 있다. 따라서 방주는 적어도 125,000마리의 양들을 운반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보통 육지 동물들은 양보다 비교적 작으며 큰 동물 이래 봤자 소수에 불과하다. 방주는 물론 육지 동물만을 수용해야 했으므로 포유류와 조류, 파충류 만을 수용하면 되었다. 방주는 3층으로 구조되었으며 각 층은 방들과 둥우리들이 있었다(창6:14).
이것들은 분명히 각종 동물들을 저장하는 새장이나 외양간이었을 것이다. 창세기의 “종류”는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의 생물학 용어인 “종”보다 훨씬 더 융통성이 있는 용어이다. 그러나 설령 이 두 용어가 같다 하더라도 포유류와 조류와 양서류,파충류는 그 종이 별로 많지 않다. 지도적인 조직 생물학자 에른스트 마이어(Ernst Mayr)는 그 숫자를 17,600으로 제시했다.
방주에 매 종류를 두 마리씩 넣고 “정결한”종류는 7마리씩 넣었는데 거기다가 사멸된 종들을 적당하게 보태더라도 방주에는 50,000마리의 동물 정도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쉽 게 운반될 수 있는 125,000 보다 훨씬 작은 숫자이다. 방주에는 식품 저장소와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위한 충분한 거처가 있었다. 사실 방주가 너무 넓어서 홍수가 세계적인 홍수여야만 그 기록이 가능해진다.
방주는 어떤 지역의 동물들을 수용하기에는 너무 넓다. 그런 까닭에 홍수가 지역적 이었다면 방주가 전혀 필요 없었을 것이다. 인간과 동물의 생명을 보존하는 문제는 더 쉽게 해결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위험한 홍수 지대로부터 빠져 나오기만 하면 되었다. 동물을 잡아들이는 문제에 관해서는 주님께서 노아에게 동물들을 보내 주셨으므로 쉽게 해결된다(창6:20).
그래서 노아는 동물들을 찾아 사냥을 나설 필요가 없었다. 동물들은 임박한 기후의 변화 때문에 위험해질 경우에는 특별히 먼 거리까지 이동할 수 있고 또 이동한다. 이와같은 매우 신비로운 “본능”이 주님께서 보존하시기를 원하셨던 동물들 속에도 심겨져 있었다. 주님께서는 동물들로 노아에게 오게 하셨고 그리하여 휘몰려 오는 폭풍우로부터 그들을 안전지대로 옮기셨 다.
일단 그들이 안전하게 승선하du 우리 속에 갇혀서 적당하게 식량공급을 받은 이상 그들은 대개 오랜 기간의 동면에 들어갔을 가능성 이 짙다. 갑자기 몰려온 어두움과 차거운 공기는 하늘의 창들이 열렸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며 동물왕국의 모든 질서가 다소 그렇듯이 그 어두움과 차거운 공기가 동물들을 동면하게 했을 것이다. 사실 동물세계는 불순한 기후조건에 대처하는 데 있어서 이 두 가지 주목할 만한 메카니즘, 즉 이동과 동면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현대 생물학자들이 많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놀라운 능력들의 기원과 작용이 무엇 인지 만족스럽게 설명하지 못한다. 알려진 사실로는 하나님께서 이런 능력을 전달하시되, 그 당시 “유전법칙”에 전달된 새로운 “정보”를, 그가 선택하사 방주로 가게 하신 동물들에게 주신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동물들의 새로운 이동 본능이 그것들로 방주로 가게 했고 그 동물들의 새로운 동면 메카니즘이 그 무시무시한 흥수의 때를, 비교적 조용하고 평안한 가운데 지낼 수 있게 했다.
“방주로부터 나아간” 동물들의 후손들은 그런 능력을 크게, 작게 물려받아, 지금도 필요에 따라 불순한 환경 조건을 그런 능력을 사용해서 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홍수 이전에 전 세계적으로 따뜻하고 쾌적한 기후가 있었을 것 같다. 플라이토신 빙하기 이전 소위 지질 “시대”에 실제로 있었다는 화석들과 침전물들을 볼 때 그런 온후한 기후가 있었다는 것과 성경의 “궁창 위의 물”이라는 기록이 전 세계에 그러한 “온실 효과”를 미쳤을 상층 대기권 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수증기층이 홍수 이전에 있었음을 가리켜 준다는 사실을 블 때 그렇다.
이리하여 홍수 이전에 동물들은 이동과 동면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었고, 모든 종류의 동물들이 전 세계에 다소 단일한 방식으로 흩어 졌던 것 같다. 열기층이 압축되어 홍수 때에 쏟아져 내렸을 때 기후에는 돌연적인 변화가 왔고 그 때문에 마침내 빙하시대가 도래하였고 결국 현재 상태의 기후를 갖춘 세계로 접어들었다. 위에서 지적한 대홍수에 관한 사실들과 그외 많은 사실들에 대한 증거와 기록이 필자의 저서 “창세기의 홍수”에 제시되어 있다.
이것이 소수 과학자들의 견해라고 인정되어 있다(사실 성경적인 기독교인들은 어느 분야에 나 소수이다). 그러나 수 백 명의 자격 있는 과학자들이 그 본질적인 내용에 참으로 동의하고 있다. 어쨌건, 현재에 알려진 범위 내에서 관찰된 사실들은 그 내용에 부합된다. 성경의 어떤 부문(창조, 홍수 등의 이야기가 신약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에 의하여 역사적 사실임이 완전히 확임됨)을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결정은 결코 과학적인 결정이 아니라 하나의 영적인 결정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