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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번 | 종목 | 명칭 | 매체 | 소재지 | 관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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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김제시 | 금산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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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김제시 | 금산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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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김제시 | 금산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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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김제시 | 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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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김제시 | 금산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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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김제시 | 금산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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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김제시 | 금산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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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김제시 | 금산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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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김제시 | 금산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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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김제시 | 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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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김제시 | 귀신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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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김제시 | 금산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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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김제시 | 금산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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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김제시 | 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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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김제시 | 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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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김제시 | 김제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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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김제시 | 김제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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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김제시 | 금산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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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김제시 | 김제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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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김제시 | 김제시 |
* * * 능제 저수지 (菱堤貯水池)
소재지 ;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 만경리
면적 ; 유역 면적 178㏊| 수혜 면적 1,903㏊
농업 관개용 저수지.
[개설] 능제(菱堤)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만경현조에도 능제라고 기록되어 있는 오래된 저수지이다. 능제저수지는 귀[굽이·귀퉁이]가 99곳이나 되는데, 귀가 100곳이 되면 나라에 큰 경사가 일어난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건립경위]능제저수지는 본래 주변 구릉지의 물을 가두는 재래지(在來池)였으나, 1930년 1월 1일 확장 공사를 시작하고 그해 12월 31일 준공되어 운암호의 물을 받아 저장하는 양수저수지(揚水貯水池)가 되었다.
* * * 망해사(望海寺)
소재지 ;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 1004
창건시기 : 642년 (백제 의자왕 2) 창 건 자 : 부설거사
망해사는 김제에서 서북방 약27km 지점에 있으며 심포 어항에 이르기1km 전방에서 오른쪽 언덕바지 기암괴석 벼랑위에 망망대해 서해의 파도가 출렁이고 고군산열도가 내다보이는 곳에 세워져 있어 이름 그대로 망해사이다.
전하는 바로는 이곳은 본시 섬이었다 하여 642년(백제 의자왕 2년)에 부설거사가 까닭이 있어 이곳에 사찰을 개창하여 수도하다가 입적하신곳이라 하며 그 후 754년(경덕왕 13년)에 당나라의 중 중도법사(일명 통장화상)가 중창하였으나 조선조에 들어 많은 수난을 당하였다.
그 뒤 인조대왕 때 만경 불거촌 출신인 고명한 화상인 진묵대사가 재건 복구하여 크게 번창하였는데 그 때가 망해사로서는 최강전성기였으며, 그 후 흥망성쇠를 거듭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 * 낙서전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8호 (지정연도 : 1986년 9월 8일)
망해사 편액은 낙서전에 걸쳐있어 그 역사의 일부를 엿볼 수 있으며, 낙서전은 비록 규모가 작으나 이익공집으로 초가지가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고 구식 한와로 지붕을 덮고 있다.
이 낙서전은 1589년(조선 선조 22년)에 진묵대사가 처음으로 세웠고 그 후 1933년과 1977년에 중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건물의 오른쪽에는 방과 부엌이 딸려 있어서 원래 이 낙서전은 법당 겸 요사로 사용되었음을 짐작케 하고 있다. 낙서전 맞은 쪽에는 노거수가 2그루 있어 망해사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 * * 아리랑문학마을
아리랑문학마을은 일제강점기를 다루는 소설의 배경으로 '수탈당한 땅과 뿌리 뽑힌 민초들'이 민족의 수난과 투쟁을 대변하는 소설 아리랑의 배경을 재현한 곳이다.
'아리랑'이 노동요에 망향가, 애정가이자 만가(輓歌), 투쟁가로 민족의 노래가 되었던 것처럼 소설 속 징게맹갱(김제만경)은 강탈당하는 조선의 얼과 몸의 또 다른 이름이자 끝까지 민족 독립을 위해 싸워나갔던 무수한 민초들의 삶을 배태(胚胎)한 땅이다
* 홍보관 : 쌀가마니와 논의 형상을 표현함(1동)
일본은 왜 수탈의 대상으로 김제를 선택했는가? 지평선을 이루는 징게맹갱 외에밋들, 생명의 쌀이 있는 곳
* 근대수탈 기관 ; 주재소, 면사무소, 우체국, 정미소 (4동)
* 내촌·외리마을
주요가옥 : 감골댁, 송수익, 지삼출, 손판석, 차득보 가옥 등
소설 아리랑의 발원지, 일제강점기 우리 선조들의 수탈과 고난의 삶을 소설 속 주인공의 생활터전을 통하여 느껴보는 공간
* 이민자가옥 : 너와집, 갈대집(2동).
* 하얼빈역사 : 1910년경 실존건물을 토대로 60% 정도로 축소 복원
표현 : 1909년 중국 하얼빈역에서 당시 조선 통감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의 푸른 영혼이 살아 숨쉬는 역사적 현장이다. 1909.10.26 하얼빈역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저격 사살
* * * 김제 벽골제
소재지 ;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월승리 119-4
종목 ; 사적 제111호 (1963.01.21.)
규모 ; 187,473㎡
시대 ; 삼국시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쌓아 만든 최고의 고대 저수지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흘해왕 21년(330)에 “처음으로 벽골제를 만들었는데, 둘레가 1천 8백보”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이 지역이 신라 땅이 아닌 백제의 땅이었으므로 나중에 연도를 고쳐서 신라가 만든 것처럼 보이도록 해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실제로 만들어진 때는 백제 11대 비류왕 27년(330)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이후 신라 원성왕 6년(790)과 고려 현종 및 인종 21년(1143)에 고쳐 쌓은 후, 조선 태종 15년(1415)에 다시 쌓았다. 그러나 좋은점보다 나쁜점이 더 많다고 하여 없어지고 말았다.
- 지금 유적에는 일직선으로 약 3㎞ 정도의 제방이 남아있는데, 1925년 ‘동진토지개량조합’에서 이 둑을 농사짓는데 필요한 물을 대는 통로로 고쳐 이용하면서 그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리게 되었다.
- 제방의 북쪽에는 조선시대에 벽골제를 다시 쌓고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 세운 비석이 있는데, 닳아서 글을 알아보기 어렵다. 1975년에는 저수지 물의 양을 조절하던 수문이 있던 자리 2곳을 발굴조사하였는데, 그 결과 대규모의 높은 수준의 측량기술이 이용된 공사였던 것이 밝혀졌다.
- 벽골제는 단순히 우리나라 최초의 저수지라는데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당시에 이미 이러한 저수지 축조가 가능할 정도의 고도로 발달된 토목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입증해 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과학기술사에서도 획기적인 사실을 제공해 주는 유적이다.
* * * 김제 금산사 일원
소재지 ; 김제시 금산면 모악15길 1, 일원 (금산리)
종목 ; 사적 제496호(2008.12.18.)
규모 ; 202,304㎡
백제시대에 창건한 사찰로 전해지고 있는 김제 금산사는 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의 중창불사 이후 14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미륵신앙의 본산으로 법맥을 이어오고 있으며, 후백제 견훤의 유배지로도 알려진 사찰이다.
고려시대에는 혜덕왕사가 법상종 관련 불서의 간행 및 유포에 힘쓰는 한편 금산사를 중창하였으며, 임진란 당시에는 호국사찰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국보 제62호인 미륵전을 비롯하여 고려시대 석조문화재 및 조선후기의 목조건축 등 다량의 국가지정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는 호국사찰로 역사적·문화사적 의의 등 학술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 * * 김제 금산사[ 金山寺 ]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모악산(母岳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사적(金山寺事蹟)』에 의하면 600년(무왕 1)에 창건되었으며, 백제법왕이 그의 즉위년(599)에 칙령으로 살생을 금하고, 그 이듬해에 금산사에서 38인의 승려를 득도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1492년(성종 23)에 쓴 「금산사오층석탑 중창기」에 의하면 과거불(過去佛)인 가섭불(迦葉佛) 때의 옛터를 중흥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금산사의 터전에 오랜 불연(佛緣)이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금산사가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된 시기는 진표(眞表)가 중창을 이룩한 경덕왕대 이후로 보고 있다. 762년(경덕왕 21)에 시작하여 766년(혜공왕 2)에 중창을 끝낸 진표는 미륵장륙상(彌勒丈六像)을 조성하여 주불(主佛:법당의 중심이 되는 부처)로 모셨고, 금당(金堂:법당)의 남쪽 벽에는 미륵보살이 도솔천(兜率天)에서 내려와서 그에게 계법을 주던 모습을 그렸다.
이 절은 미륵장륙상을 주불로 모심으로써 법상종(法相宗)의 근본 도량이 되었으며, 고려시대에도 법상종에 속해 있으면서 『법화현찬(法華玄贊)』·『유식술기(唯識述記)』 등의 법상종 관계 장소(章疏)들을 간행하였다.
진표의 중창 이후 후백제견훤의 보호를 받아 부분적인 보수가 있었으며, 법상종의 대종사이자 왕사인 혜덕(慧德)이 1079년(문종 33)금산사 주지로 부임하여, 퇴락한 절을 보수하고 새로운 법당을 증축하여 대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현존하는 금산사의 중요 석물인 석련대(石蓮臺)·오층석탑·노주(露柱) 등은 모두 이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또 절의 남쪽에 광교원(廣敎院)을 설립하여 간경(看經:경전을 읽음)·법석(法席:법회) 등을 주관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금산사는 규모가 큰 도량이 되었다.
그러나 1598년(선조 31) 임진왜란 때 왜병의 방화로 모든 건물과 산내의 40여 개 암자가 완전히 소실되었다.
1601년 수문(守文)은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1635년(인조 13) 낙성을 보았다.
유물·유적 중 일부 석조물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임진왜란 후의 조형들이다.
- 국보 제62호로 지정된 미륵전은 신라시대부터 미륵본존을 봉안했던 금당이다. 신라 때의 형태나 규모는 알 수 없지만, 현존하는 거대한 불상의 좌대 아래에 있는 철수미좌(鐵須彌座) 등의 형태로 보아 임진왜란 전에는 거대한 미륵존상을 봉안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대적광전은 금산사 내에서 단층 건물로는 가장 웅장한 건물 수계(受戒)·설계(說戒)·설법(說法) 등의 법요를 진행했던 곳이다. 이 법당은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뒤 1635년(인조 13)에 중건하여 총 28칸의 큰 불전을 이루었으나, 1986년 12월에 화재로 소실되어 1992년 복원하였다.
- 대장전은 본래 미륵전의 정면 우측에 위치하여, 미륵전을 장엄하게 하던 정중(庭中) 목탑이었다. 1922년 이 건물을 현 위치로 옮겨 지었지만, 지붕에는 전대 목탑의 잔영이 그대로 남아 있어 복발(覆鉢)과 보주(寶珠) 등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전 내에는 석가모니불과 가섭·아난(阿難)의 제자상이 봉안되어 있다.
- 명부전은 명부시왕(冥府十王)을 봉안한 당우로서 1857년(철종 8)에 비구니 만택(滿澤)이 재건하였으며,
- 나한전은 방등계단(方等戒壇) 바로 옆 북쪽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 계단을 참배할 수 있으므로 일명 계단예배전(戒壇禮拜殿)이라고도 한다. 나한전의 내부 중앙에는 석가여래삼존불과 16나한상(十六羅漢像)을 봉안하였다.
- 방등계단 앞에는 1998년에 적멸보궁을 지었다.
- 일주문은 1975년에 고평용이 건립하였으며, 금강문은 절로 들어가는 두 번째 산문으로서 절을 수호하는 금강역사의 화상을 안치한 곳이다.
- 보제루는 절로 들어가는 세 번째 문루 구실을 하는 건물로서 법요(法要:법회의식)와 강설당(講說堂)으로 이용되고 있다.
- 이 밖에도 현존하는 당우로는 성렬이 1939년에 신축한 종각과 1940년에 신축한 중향각(中香閣), 1943년에 신축한 칠성각, 연대 미상의 송대향각(送大香閣)이 있다. 또한 1999년에 금산사 내의 성보문화재를 보관 전시하는 성보박물관을 경내에 지었다.
- 석조유물 중 미륵전 우측에 있는 방등계단에는 석종부도가 있다. 이 계단에 부도가 있으므로 탑으로 잘못 아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수계의식을 집행하는 계단이라는 데 특징이 있다.
- 방등계단 앞에는 오층석탑이 있다. 일반적으로 계단 앞에는 석등을 안치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으나, 이곳에 석탑을 건립한 것은 불전의 정중탑(庭中塔)을 건립하는 방식으로 불탑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 * 김제 금산사 미륵전
종목 ; 국보 제62호 (1962.12.20.)
규모 ; 1동
시대 ; 조선시대
미륵전은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조선 인조 13년(1635)에 다시 지은 뒤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거대한 미륵존불을 모신 법당으로 용화전·산호전·장륙전이라고도 한다. 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彌勒殿)’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건물 안쪽은 3층 전체가 하나로 터진 통층이며, 제일 높은 기둥을 하나의 통나무가 아닌 몇 개를 이어서 사용한 것이 특이하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웅대하고 안정된 느낌을 준다.
* * 김제 금산사 노주
종목 ; 보물 제22호 (1963.01.21.)
규모 ; 1기
시대 ; 고려시대
이 노주는 금산사 대적광전에서 서남쪽에 위치한 대장각으로 가는 길의 중간에 있는데, 그 이름을 노주(露柱)라고는 하였으나 실제로 무엇으로 사용한 것인지 그 용도를 알 수 없는 보기 드문 유물이다. 꼭대기에 놓인 꽃봉오리모양의 조각만 없으면 불상을 얹는 사각형의 대좌(臺座)처럼 보인다.
절이 창건된 때가 통일신라시대라고는 하지만, 당간지주 외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되는 것이 거의 없다. 이 노주도 받침돌에 새겨진 조각의 양식이나 각 부분의 수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 * 김제 금산사 석연대
종목 ; 보물 제23호 ( 1963.01.21.)
규모;1기
시대 ; 통일신라
석련대는 석조연화대좌의 준말로 불상을 올려놓는 돌로 만든 받침대이다. 연화대좌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이것은 형태가 희귀하고 크기도 매우 거대하다. 금산사 대적광전에서 동남쪽으로 10m쯤 되는 돌단 밑에 있는데, 이곳이 원래 위치인지는 알 수 없다.
이 작품은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사치스러운 조각 및 장식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시기에 만들어진것으로 짐작된다.
* * 김제 금산사 혜덕왕사탑비
종목 ; 보물 제24호 (1963.01.21.)
규모 ; 1기
시대 ; 고려시대
금산사 안에 서있는 탑비로, 혜덕왕사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혜덕은 고려 중기의 승려로서, 정종 4년(1038)에 태어나 11세에 불교의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그 이듬해에 승려가 되었다. 1079년 금산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숙종이 불법(佛法)에 귀의하여 그를 법주(法主)로 삼자 왕에게 불교의 교리에 대한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59세에 입적하였으며, 왕은 그를 국사로 대우하여 시호를 ‘혜덕’, 탑이름을 ‘진응’이라 내리었다.
.비문에 의하면 비를 세운 것은 예종 6년(1111)으로 혜덕이 입적한 지 15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 * 김제 금산사 오층석탑
종목 ; 보물 제25호 (1963.01.21.)
규모 ; 1기
시대 ; 고려시대
금산사 안의 북쪽에 송대(松臺)라고 불리는 높은 받침 위에 세워져 있는 탑이다. 바로 뒤에는 석종모양의 사리계단이 있는데, 이렇듯 사리계단 앞에 석탑을 세워놓은 것은 사리를 섬기던 당시 신앙의 한 모습이기도 하다.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기본 양식을 따르면서도 기단이나 지붕돌의 모습 등에서 색다른 면을 보이고 있어 고려시대 작품으로서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 * 김제 금산사 금강계단
종목 ; 보물 제26호 (1963.01.21.)
규모 ; 1기
시대 ; 고려시대
금산사 경내의 송대(松臺)에 5층석탑과 나란히 위치한 이 석종은 종 모양의 석탑이다. 매우 넓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사각형의 돌이 놓이고, 그 위에 탑이 세워졌다.
석종형 탑은 인도의 불탑에서 유래한 것으로 통일신라 후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외형이 범종과 비슷해서 석종으로 불리운다.
기단의 각 면에는 불상과 수호신인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다. 특히 아래 기단 네 면에는 인물상이 새겨진 돌기둥이 남아 돌난간이 있었던 자리임을 추측하게 한다. 난간 네 귀퉁이마다 사천왕상이 세워져 있다. 탑신(塔身)을 받치고 있는 넓적한 돌 네 귀에는 사자머리를 새기고 중앙에는 연꽃무늬를 둘렀다. 판석 위에는 종 모양의 탑신이 서 있다. 꼭대기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머리를 밖으로 향한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고 그 위로 연꽃 모양을 새긴 2매의 돌과 둥근 석재를 올려 장식하였다.
기단에 조각을 둔 점과 돌난간을 두르고 사천왕상을 배치한 점 등으로 미루어 불사리를 모신 사리계단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 탑은 가장 오래된 석종으로 조형이 단정하고 조각이 화려한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 * 김제 금산사 육각다층석탑
종목 ; 보물 제27호 (1963.01.21.)
규모 ; 1기
시대 ; 고려시대
금산사 소속의 봉천원(奉天院)에 있던 것을 현재 자리인 대적광전 앞의 왼쪽으로 옮겨 왔다. 우리나라의 탑이 대부분 밝은 회색의 화강암으로 만든 정사각형의 탑인데 비해, 이 탑은 흑백의 점판암으로 만든 육각다층석탑이다.
벼루를 만드는데 주로 쓰이는 점판암을 사용하여 이색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며, 각 층의 줄어드는 정도가 온화하고 섬세하다. 몸돌과 지붕돌에 새겨진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세워진 탑으로 짐작된다.
* * 김제 금산사 당간지주
종목 ; 보물 제28호 (1963.01.21.)
규모 ; 1기
시대 ; 통일신라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기단부와 당간받침을 완전하게 갖추고 있는 작품으로, 지주의 면에 새겨진 조각수법이 훌륭하다. 우리나라 당간지주 중에서도 가장 완성된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8세기 후반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 * 김제 금산사 심원암 삼층석탑
종목 ; 보물 제29호 (1963.01.21.)
규모 ; 1基
시대 ; 고려
소재지 ; 김제시 금산면 모악15길 413
금산사 심원암에서 볼 때 북쪽 산꼭대기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 탑이다.
탑은 2층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탑신의 몸돌에는 네 면마다 모서리에 기둥모양을 새겼다. 각 몸돌을 덮고 있는 3개의 지붕돌은 넓적하며, 낙수면의 경사를 급하게 처리하였고, 처마의 양끝에서의 들림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어 고려시대의 특징이 잘 담겨져 있다. 정상에는 머리 장식을 받치는 노반(露盤)만이 남아 있다.
깊은 산중에 있었던 탓인지 탑의 모습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는 아름다운 석탑이다.
* * 김제 금산사 대장전
종목 ; 보물 제827호 (1985.01.08.)
규모 ; 1동
시대 ; 조선시대
이 건물은 원래 미륵전 뜰 가운데 세운 목조탑으로 불경을 보관하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예전의 기능은 없어지고 안에 불상을 모시고 있다.
조선 인조 13년(1635)에 다시 짓고, 1922년에 지금 있는 위치로 옮겼다. 지붕 위에 남아 있는 조각들은 목조탑이었을 때 흔적이며 건물 안에는 석가모니와 가섭, 아난의 제자상을 모시고 있다.
전체 건물 구조와 크기가 비교적 간단하고 작지만 큰 관심을 끄는 변형 건물로, 탑 형식의 목조 건축물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이다.
* * 금산사 석등[ 金山寺石燈 ]
종목 ; 보물 제828호 (1985년 01월 08일 )
높이 ; 3.9m
금산사 대장전(大藏殿) 앞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등.
원래는 금산사의 미륵전(彌勒殿) 앞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22년에 대장전 앞으로 옮겨 세웠다. 사각형 지대석(地臺石) 위에 둥근 받침들이 있고, 그 상단에 복련(覆蓮:꽃부리가 아래로 향한 연꽃)이 조각되었다.
8각의 간석(竿石) 받침 위에 간석을 찰주형(刹柱型)으로 세우고, 약간의 배흘림과 귀퉁이마다 우주(隅柱)의 선이 있어 안정감을 준다. 또 중대(中臺)는 앙련(仰蓮:꽃부리가 위로 향한 연꽃)으로 장식하였고, 팔각의 화사석(火舍石) 4면에는 화창(火窓)이 있다. 그리고 개석(蓋石)에는 2단 받침이 있고, 전각(轉角)에는 귀꽃[隅花]이 장식되었으며, 그 위에 상륜(上輪)이 있다.
- 인터넷자료 편집 -
마산문화유산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