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의 독법을 통하여 읽어드린
우리 삶 속의 하느님 표징들
과연 우리는 어떻게 복음 이야기들의 표면적 독서에서 영적 이해로 들어갈 것인가?
장 들로르므 강의록에서(1강, 1996년 10월 15일)
도입 - 예수님의 복음 :
예수님의 표징들을 과연 어떻게 영으로 이해할 것인가?
✓요한복음은 복음에 대한 표면적이고 외적인 독서에서 벗어나, 영과 진리로 읽는 독서법을 배우게 한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영적 복음’이라 한다.
✓예수님의 이야기들 특히 예수님의 기적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의견은 분분해 왔다. 요한 복음사가는 그 기적들을 표징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표징은 눈에 보이는 것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믿기’ 위해서는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요한은 ‘보지 않고 믿는 이는 행복하다’(요한 20,29)는 놀라운 경지에로 인도하는 한 여정을 제안한다. 그런데 여기서 ‘보다’와 ‘믿다’는 대체 무엇일까? 이 여정을 따라갈 준비를 위하여, 우선 요한복음의 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절들을 주의해서 읽어보기로 하자.
I- 카나의 혼인잔치, ‘표징들의 시작’(요한 2장)
‣ 카나의 혼인잔치라고 불리는 이 이야기(2,1-12)는 요한복음에만 고유하게 나온다.
‣ 또 이 제목은 요한복음이 얘기하는 것과는 매우 동떨어진다.
‣ 텍스트의 맥락으로 들어가기 위해 전후 이야기를 읽어야 한다.
우선 앞선 이야기를 살펴보자.
A. 예수님과의 첫 만남
• 이야기의 첫 단락을 1,19-36으로 끊어보자.
• 이 단락은 세례자 요한과 함께 시작해서 그와 함께 끝난다.
• 이어지는 단락에는 두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혼인잔치 이야기이고(2,1-12)
또 하나는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내는 이야기다(2,13-25).
1/ 처음 4일이 지난 후 그 다음 사흘째 되는 날 혼인잔치가 있다.
처음 3일 동안 세례자 요한이 증언하며(1,19.29.35),
3일째 되는 날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듣고 그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간다.
그리고 4일째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른다(43절).
예수님에 대한 이 모든 예고들을 구분해보자.
첫째, 요한이 예언적 표현들로 증언하는 것: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26절)
‘하느님의 어린양’(29절과 35절),
‘성령이 그 위에 내려와 머무는 하느님의 아들’(31-34절).
둘째, 첫 제자들이 자신들의 기대에 부흥하여 그들 관점에서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것:
‘메시아’,
‘그리스도’(41절),
성경에 기록된 분(45절).
셋째, 51절에 나오는 낯선 말씀: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18절의 계시자, 알려주시는 분 참조)
2,1-25의 두 이야기에 이어, 니코데모와의 대화가 나온다(3,1-21).
이 대화는 니코데모의 이해방식과 예수님이 말하는 방식 사이에 큰 대조를 이룬다.
- ‘물과 영으로’ ‘새로 태어나다.’
- ‘육에서 태어난 것’과 ‘영에서 태어난 것’
- ‘세상의 일’과 ‘하늘의 일’.
존재와 이해의 두 차원 사이를 넘어서라는 부르심이 여기에 있다.
이어서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로 되돌아온다.
세례와 물과 정결례에 관련된 이야기다(3,22-30).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신랑’에 비교한다.
이것은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말하는 것을 반영한다.
2,31-36에서는 ‘위에서 오시는 분’과 ‘땅에서 난 사람’의 대조로 돌아온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땅 위에서 ‘증언’을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그리고 ‘영은 아들에게 주어졌다.’
또한 ‘아들을 믿는 것’은 2,23-25에서 ‘표징 때문에 믿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은 2,11에서 제자들이 카나에서 ‘믿은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한다.
이 모든 것이 당신을 어리둥절하게 한다면 좋은 현상이다.
드디어 우리가 발견해나가야 할 표징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B. 갈릴래아의 카나에서(2,1-12)
a/ 참 이상한 이야기다. 혼인이 있고 잔치가 있다. 그런데 손님들만 있을 뿐 주인공들은 어디 있는 것일까.
- 등장인물들 소개(1-2절):
신랑과 신부는 없고,
잔치에 초대된 손님 둘(예수님의 어머니와 예수님)과 한 그룹(제자들)만을 소개한다. 신랑은 9-10절에 가서야 등장한다.
- 혼인잔치는 식사로 축소되며, 그것도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사실에로 축소된다.
대조적으로, 유다인들의 정결례에 쓰이는 80-100리터들이 물독 여섯 개가 있다. 이것도 마시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 물독들로 충분하지 않다는 듯이 이 물독들을 가득 채우게 한다.
그 다음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 맛보게 한다.
이어서 그들이 그것을 모두 마셨는지 그것으로 만족했는지 얘기되어 있지 않다.
참으로 요상한 이야기다.
b/ 예수님과 그분의 어머니와의 대화는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3-5절).
예수님은 그들 둘 사이의 관계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 관계를 재 정의한다.
(‘여인이시여, 무엇이 나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있습니까]’).
그들은 동일한 ‘무엇’을 겨냥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떨어진 포도주를, 예수님은 ‘아직 오지 않은 저의 때’를 겨냥함)
어머니는 획득해야할 어떤 대상 곧 객체의 문제를 제기하며,
예수님은 시간을 정하는 어떤 사람 곧 주체의 문제를 제기한다.
차원과 관점이 다르다. 이것이 보이는가?
✓숙고하기: 하늘에서 오시는 분과 땅에 속한 것, 육과 영의 차원의 다름을 비교해보라.
예수님의 어머니는 이야기에서 사라지기 전에, 역할들을 분배하며 일꾼들에게 예수님을 신뢰하게 한다.(“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그런데 이 어머니는 예수님이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명확하게 말해주지 않는다. 이것은 타자(예수님)를 향해 온전히 열려있게 하며, 어머니가 말한 ‘무엇이든지’는 점차 명확해질 것이다.
c/ 행동은 세 개의 명령형으로 요약된다.
채워라, 퍼라, 날라다 주어라.
그것은 물독과 물과 관련된다.
이어서, 이것을 과방장이 맛보고 나서야 포도주가 된 물에 대해 말한다.
포도주가 떨어짐(결핍/부재하는 포도주),
정결례에 쓰이는 물(포도주가 아닌 물),
포도주가 된 물(9절),
이 세 가지 물의 차이를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어떤 장면도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순간을 보여주는 장면은 없다.
아직 때가 오지 않았는데 비해, 과방장은 포도주가 너무 늦게 도착했다고 말한다.
마치 모든 것에 대한 단순 명확한 해석을 어리둥절케 하도록 얘기되고 있는 것 같다.
마지막에 주어진 포도주는 처음에 떨어진 포도주가 아님은 명확하다.
가치의 층위에서 변경된 것이다. 즉 이 두 포도주 사이에는 마실 물이 아니라, ‘유다인들의 정결례를 위한’ 예식에 쓰이는 물을 통과한다. 모든 행보를 고려해야 한다. 떨어진 혼인잔치의 포도주는 예식에 쓰이는 물독(종교와 율법에 참조케 한다)에 들어갔다가 좋은 포도주라는 맛과 말로 정의된 새 포도주가 된 물로 변한다. 그런데 이 좋은 포도주는 흔히 혼인잔치에서 손님들이 취하면 내놓는 질 떨어진 포도주가 아니다.
이중의 추월이 있다.
먼저, 혼인잔치에 쓰이는 유익한 포도주가 있다.
여기에 예배와 율법이라는 종교규칙이 덧붙여진다.
그리고 혼인잔치, 결혼, 계약의 차원의 어떤 것을 간직한 ‘포도주로 변한 물’의 형상 아래 숨겨진, 설명되지 않은 어떤 것을 향한 추월이 있다.
이미 취해버린 손님들에게 이런 포도주가 필요했을까?
d/ 등장인물들의 역할이 이야기 도중에 변한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무슨 자격으로 개입하시는가.
예수님의 역할도 변한다.
예수님은 손님의 역할을 떠나서, 신랑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것을 맛본 과방장이 착각하고 신랑을 부르니 말이다.
제자들 역시 변화를 겪는다.
그리고 1-2절과 12절에서 등장인물들을 열거하는 순서도 바뀐다.
e/ 서술자는 결론에서 이 일을 ‘표징들의 시작(“처음으로 표징을 일으키시어”)’이라고 명확히 밝힌다. 포도주로 변한 물은 ‘표징’이 된다. 이 표징은 정결례의 가치, 율법, 인간의 혼인잔치의 기쁨 등 이 모든 것을 초월한 의미를 담고 있다.
누구를 위한 표징인가? 이 표징을 읽기 위해서는 전체 행보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데 등장인물들 가운데서 이 행보를 전체적으로 알고 있는 이는 예수님뿐이다. 표징은 서술자의 해설 속에만 있으므로 독자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독자는 아직 이 표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무엇에 대한 표징인가? 텍스트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고 덧붙인다. 그것은 단순히 그분의 능력이나, 실력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그분의 존재에 대한 어떤 것이다. 표징, 완성한 일은 숨겨져 있는 영광의 상징이 아니라 영광의 시니피앙(기표)이다. 그리고 완성된 일은, 예수님께서 하신 첫 번째 말씀부터 되짚어보면, 예수님과 때를 정하는 분의 열망과의 만남이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제자들로 말하자면, 그들은 그분을 믿게 된다. 그들이 믿는 것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그분의 힘만이 아니다. 그들의 믿음은 모종의 뭔가를 드러낸 어떤 분, 어떤 존재에 걸린다. 어떤 영광일까? 1,14을 참조하라.
C. 예루살렘에서. 성전과 몸의 표징(2,13-25)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행위의 영적이해의 단계들을 묘사한다.
예수님은 성전의 장사치와 환전꾼들과 동물들을 쫓아내시고 돈을 쏟아버리신다.(13-15절)
이해의 문제가 두 번 제기되며, 매번 두 차원을 구분한다.
한 차원에서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것을 유심히 살펴보자.
a/ 예수님의 행위는 16절의 ‘내 아버지의 집… 장사하는 집’이라는 말씀에서 밝혀진다. 장사하는 집을 치워버려야 자녀관계의 집을 세울 수 있다.⇨ 이 두 집은 양립불가능함
(자녀관계가 결핍되어 있는데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것은 카나에서 포도주가 없다는 것을 알아챈 것과는 대조적이다.)
두 차원:
제자들은 성경을 떠올리는데 비해, 유다인들은 어떤 표징도 보지 못한 채 규정에 벗어난 행동만을 보고는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한다. 그들이 요구한 표징은 예수님이 그러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는지를 증명하는 표징이다. 그들은 행동과 규정의 차이만을 볼 뿐이며, 이것은 카나의 과방장과 닮았다. 제자들은 그들이 기억해낸 시편에서 의미를 발견한다. 현재의 행위는 ‘당신 아버지의 집에 대한 열정에 집어 삼켜진’ 예수님의 존재를 증언한다.(강렬한 열망은 그 인격을 참여시킨다.)
그것이 다가 아니다. 왜냐하면 ‘집어삼키다’가 미래형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b/ 예수님은 요구된 표징에 미래의 표징을 예고하는 것으로 대답한다.
성전이 파괴되고 사흘 만에 다시 세워질 것이다.(18-19절)
이것은 지금 볼 수 있는 표징을 요구하는 이들에게는 대답이 되지 못한다.
(카나의 좋은 포도주도 이와 마찬가지다.)
게다가 예고된 이 표징은 그 자체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청자들의 ‘세속적’ 이해에, 텍스트는 부활의 빛을 받은 제자들의 나중의 이해를 대조시킨다.(20-21절) 여기서 또한 카나의 표징처럼 오해할 여지가 있는 두 차원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난전(亂廛)이 되어버린 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행위가 예고하는 미래의 표징이 관련된다.
자녀관계가 정착하기 위해 비워져야 할 성전은 너희가 파괴하고 내가 다시 세울 성전을 예고한다는 말이다.
성전 = 사형되고 다시 일으켜진 몸.
시간이 지나면서 이해가 증대됨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되려면, 좋은 기억을 갖고, 성경을 연구하고, 이후에 일어난 사건들로 인해 깨달을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 두어야 한다. 표징은 결코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으며, 직접 이해 가능한 것도 아니다. 베일이 들춰져야 베일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인용된 시편도 더 명확해진다. 곧 예수님은 삼켜질 것이며, 열정은 불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이 불은 희생제사 때 불에 태우기 위해 구입한 동물들 대신에 아들의 몸을 삼켜버릴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파괴된 몸은 자녀로서의 새 예배의 상징적 자리로서 다시 일으켜 세워질 것이다.(4,23 참조)
C/ 마지막 부분에서, 믿음의 두 형태가 대조된다. 나중에야 믿는 제자들의 믿음(22절)과 ‘표징들을 보고 많은 사람이’ 믿는 믿음이다.(23-25절) 사람들이 믿는 믿음은 지금 그들이 보는 여러 표징들에 의거한다. 이 표징들은 계속 차곡차곡 싸이지만, 사람들을 관통하지는 못한다. 이에 비해 제자들의 믿음은 예수님이 했던 말씀에 의거한다. 그리고 이 말씀은 성경과 관련해서 그 의미가 밝혀진다. 이 믿음은 표징들을 넘어선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 덕분이다. 이 말씀은 타자에게서 오며, 예수님의 몸과 관련된 한 사건을 참조케 한다.
외적인 표징들뿐만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어떤 것이 신앙인과 그분과의 상호 신뢰적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준비하기: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요한 4장)
4장 전체를 읽고,
여인과의 대화가 전진하는 단계들을 살펴보고(5-26절),
제자들과의 대화 장면(27-38절),
사마리아인들과의 대화 장면(39-42절)을 나누어서 살펴보라.
이야기에서 말하던 이 물과 이 음식이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무엇으로 대체되는가?
또한 카나에서의 두 번째 표징을 얘기하는 43-54절을 읽어보라.
여기서 두 형태의 ‘믿다’를 찾아보라.
장 들로르므의 강의록에서(1996년 10월 15일)
수정 정리: 마리 테스, 안데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