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에 아들 하나 팔고,
오일에 부인 하나 팔고.
─도황행(逃荒行)
가경제(嘉慶帝)
건륭제는 길고 긴 역사상, 어쩌면 상당히 이상적인 체제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예가 거의 없는 행동을 말년에 준비하여, 실행했습니다. 그는 죽지 않고, 자발적으로 황위에서 물러났습니다. 그 동기에 대해, 건륭은 너무나도 자주 이야기 했습니다. 이것은 그저 "효" 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건륭은 1735년 황위를 이어받았을 당시, 이미 자신이 재위를 60년 동안 통치할 수 있는 복을 누린다면, 황위를 후계자에게 넘겨 주겠다고 공헌하였습니다. 위대한 선조이자, 존경하는 할아버지인 강희제의 기록을 깨는것은, 공손한 손자를 자처하는 건륭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건륭은 1772년, 자식들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한번 더 했고, 36년이 지난 후 다시 하번 이 이야기를 꺼냈으며, 1793년 이후로 이를 공론화시켰습니다.
하지만 "태상황" 건륭은 진정으로 권력을 넘겨줄 생각은 없었습니다. 건륭의 말에 따르면, 건륭의 뒤를 이은 후계자는 일종의 "현장 체험"을 맡는 것입니다. "가경" 이라는 새로운 연호가 생겨났지만, 관리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조정에서 "건륭" 을 사용했고, 실제로 건륭은 여전히 양심전에 계속 머무면서, 조서를 반포할 권리를 가졌으며, 군기처에서 사람들을 만났고, 새로 주조하느 ㄴ동전도 두 황제의 연호가 모두 담겨 있었습니다.
이 4년동안, 제국은 두명의 황제를 가지고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시기 동안 건륭의 늙은 몸은 점차 약해져갔고, 기억력도 분명하게 감퇴하기 시작했습니다.연로한 황제는 제국의 격변하는 형세를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휴향지에 머물며 남은 여생을 보내려고 하지도 않았고, 계속해서 양심전에 머물었습니다.
늙은 황제조차도, 이제 제국이 무너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건륭은 자신의 삶이 말기에 접어들 무렵, 백련교(白蓮敎)라고 불리우는 단체가 제국의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직 건륭이 스스로의 건강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을 무렵, 그는 이미 대만 임상문의 반란을 진압하며 그 무리의 일부를 느꼈고, 왕륜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그 세력의 일부를 보았습니다.
비공식적인 정치조직, 청년왕국성을 신봉하는 종교집단, 반청복명을 말하는 무인, 소수민족. 1796년부터 시작된 화중과 화북의 광대역 지역을 넘나드는 대규모 봉기는, 백련교라는 집단의 모호함 만큼이나 서로간의 연계는 느슨했지만,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움직였으며, 이미 그 봉기가 일어나는 시점에 그들의 거미줄 같은 움직ㅇ미은 관료들이 추측했던 것보다도 훨씬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습니다.
사회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대거 발생하였다는 사실은, 이미 제국이 다양한 포용성을 상실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한계수위까지 오르는 백성들의 불만을 해소하고 유기적인 움직임으로 이어졌던 중앙과 지방의 연결등은, 이미 정부의 효력이 날로 감소하면서 일방적인 위에서 아래로의 수탈관계의 고리일 뿐이었고, 먹이사슬에서 낮은 자리에 있는 관리들은 탐욕스러운 고위 관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더욱 심각한 수탈을 자행했습니다.
게다가, 건륭의 말기에 이런 구조는 공공연한 비밀도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이는 사회 부패가 골수까지 차 올랐다는 말이 됩니다. 국가가 무너지는것은 어떠한 시적인 극적 변화가 아니라는 점을 고려할때, 청이라는 시스템은 이미 고장이 난지 오래였습니다.
증가하는 인구, 하지만 인구의 밀집에 대처할 방법이 없고, 종종 살인 및 대혼란으로 끝을 맺는 토지사용권을 둘러싼 분쟁, 조상 대대로 거주하던 향촌에서 변경의 정착지로 끊임없이 빠져나가는 인구, 미혼 남성의 유출, 비밀 결사 등은 사회적 불안정성에 기여하여, 치안이 무너지고, 각 성들의 연결이 분쇄되었습니다.
1790년, 어떤 지역의 미곡 가격은 60년보다 3배가 늘어났고, 부동산의 주인이 너무 많이 바뀌어 임차인들은 더 이상 누가 자신들의 임대주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통제가 불가능한 임대료를 둘러싼 갈등이 벌어졌고, 지나친 삼림의 벌목, 물의 과도한 사용, 그리고 표토의 손실이 이어졌습니다. 홍수나 기근 피해자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구호 기금과 자금은, 구호 노력의 책임을 맡은 관료들이 모두 팔아 먹어치웠고, 백성들의 불만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파괴의 소용돌이 속에, 마지막의 건륭은 그 모습을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
건륭이 자랑한 십전무공의 영광은 이미 예전의 일이었고, 사랑하는 황후는 죽었으며, 몸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고, 어제 생각했던 일도 자꾸 잊어버리며, 오랜 조언자들도 모두 세상을 떠난 상황. 건륭 시대 대단한 공을 세운 인물 중 하나였던 아계(阿桂)는 1795년에 이미 사망했습니다. 행정 수뇌부는 사실상의 가사상태에 빠졌고, 화신이 날뛰었으며, 효자를 자처하던 가경은 부친의 명이 있지 않는 한, 이러한 일에 대해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1799년, 2월, 6일.
89세의 생일을 맞은 건륭은, 자신에게 신년 하례를 올리는 아들, 손자, 증손, 현손들을 만나 그들로부터 축하 인사를 받았습니다. 하루 정도 지나는 시간 동안, 건륭은 그를 괴롭히는 백련교의 난을 생각했고, 이 변란이 빨리 진압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를 한 수 작성했습니다. 몇시간 뒤, 그는 갑자기 쇠약해져 앓아누웠고, 기다리던 순간이 닥쳐왔음을 직감했습니다. 서른 여덞살의 젊은 가경이 급히 달려왔습니다.
64년전, 저 옹정 황제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던 건륭의 그 모습 그대로, 서른 여덞살의 가경으로부터 시중을 받은 건륭은 마지막으로 몇마디 말을 아들에게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모든 일을 끝마치지 않고 먼 길을 떠나는 사실에 대해 미안하다며 사과를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건륭은 아침 일찍 "남서쪽을 바라보았" 고, 그리고, 사망했습니다.
마지막 순간, 이 늙은 황제가 떠올린 순간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몇달 후, 가을이 되자, 건륭은 베이징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거대한 황릉에 안장되었습니다. 존경하던, 그토록 닮고 싶었던, 스스로 몸을 가누기도 힘든 노인이 되기 전, 십여세의 나이에 그 앞에서 멧돼지를 잡아, 크게 너털웃음을 터뜨리고는, 자신을 안아들었던, 그 할아버지, 위대한, 그리고 친절한 강희제가 잠들어 있는, 그 곳.
이제 그 할아버지 보다도 더 많은 나이를 먹고, 주름이 주글주글해진 그 예전의 손자는, 조용히 그 옆에 자리를 잡고 누웠습니다. 생전의 건륭은 직접 이곳의 위치를 결정했고, 스스로 황릉의 건설을 감독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북경의 동쪽에 자리한 황릉을 방문 할 수 있습니다. 모두 중국식으로 지어진 대지 위의 건축물 경내로 들어가보면, 그 입구를 상징하는 석비는 9미터 높이이고, 건물의 규모는 엄청나며, 지하실은 거대한 석판으로 덧대진 6미터 높이의 벽이 있습니다.
이 벽은, 아름다운 산스크리트어 주문으로 덮여 있습니다. 이는 불교적인 의미로, 어디에도 한문이나 만주어로 새겨진 글은 없습니다. 관 위에도 역시 산스크리트어로 된 성스러운 주문을 붉게 수놓은 주황색 비단천이 덮여 있습니다. 그의 시신이 담긴 돌무덤의 곁에는, 사랑했던 효현황후 부찰 씨의 유해가 안장된 또 하나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37세의 아내. 89세의 건륭. 두 무덤에는 석실 안에 오직 두 개의 관이 있을 뿐입니다.
부친이 세상을 떠나고 단 3일이 지난 후, 지난 몇년동안 오직 이 순간만을 기다려온 가경은 화신에게 스무가지 죄목을 물어 그의 체포를 명령했습니다. 일주일 후, 최대한의 관대함으로 그는 자살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 후의 재산은 그대로 황제에게 귀속되었습니다. 재산의 평가작업이 끝나자, 누구도 실체를 알지 못했던 화신의 막대한 재산규모가 드디어 밝혀졌습니다.
그 액수는 모두 8억량. 최대로 본다면 청조의 연간국가수입으로는 20년 이상의 가치로도 볼 수 있으며, 열차례의 전쟁을 모두 감당하고도 충분한 거대한 액수입니다.
가경제의 제위 기간은 25년으로, 이는 위대한 황제라고 이야기를 듣는 옹정제의 제위기간보다도 훨씬 깁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할 말은 그다지 없고, 딱히 하고 싶은 말도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가경제의 제위 기간은, 건륭 말기의 모습에서 별달리 급변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사회는 부패했고, 관료들은 탐욕스러웠으며, 이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제시되지 못했습니다. 한번 진압된 백련교의 난은 1813년, 천리교(天理敎)라는 일파가 궁정의 환관에게까지 영향을 발휘하여, 그들의 인도로 자금성까지 잠입하면서 다시 불이 붙었습니다.
그들의 숫자는 겨우 100여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전투는 이틀 동안 자금성 내에서 벌어졌고, 융종문의 편액에는 그때 꽂힌 쇠 화살촉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이때 훗날의 도광제가 되는 민녕이, 스스로 조총을 들고 나와 적들을 사살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경제의 시대에서 인상적인 일은, 건륭이 사망한 1799년, 바로 청나라에서 양귀비 재배가 전면 금지된 것입니다. 이것은 마약이 드디어 청나라의 정치문제로 대두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양귀지 재배 금지를 주장한 상주문에 응한 답변에서는,
"외이(外夷)의 진흙과 중국의 화은(貨銀)을 바꾸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또한 틀림없이 국내의 인민은 이리저리 유랑하며 사방에 걸식하고, 시간을 허비하고 생업을 잃을 것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미 이 시점부터, 아편으로 인한 중국의 은이 유출되는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앞서, 16세기 이후로 중국은 세계의 은을 최종적으로 빨아들이는 마지막 종착역이라고 말한 바가 있고, 이는 중국 내의 순환 경제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이제 외국으로 다시 유출되는 것입니다. 국내에 은의 적어지면, 수요공급의 경제원칙에 따라 은의 가치는 막대해집니다. 은본위제도인 청나라에서, 이는 국가체제를 뒤흔들 수 있는 거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세금이 똑같아도 은의 가치가 올라지만, 실질적으로 이는 증세와 같아지고, 증세가 많아지면 서민 생활이 파탄나게 됩니다.
은 1냥에 본래 은전 800문(文)에서 900문이었던 것이, 이제는 1천문이 되고, 아편전쟁 직전인 1838년에는 마침내 1천 600문으로 두배의 가치가 되고 맙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생활고를 불러와, 이때문에 봉기가 발생하고 민생이 더욱 파탄나는 악순환을 가져 올 수 밖에 없습니다.
마약을 팔아 재미를 본 영국은 더욱 적극적으로 경제적 공격을 가하였고, 1816년에는 매카트니 경의 방문으로부터 20여년만에 윌리엄 피트 애머스트(William Pitt Amher)가 베이징으로 다시 파견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인도 총독을 지낸 인물입니다. 하지만 삼궤고두의 예를 거부하여, 가경제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와는 별개로, 영국은 더욱 중국과의 교역에 불을 켰고, 더욱 많은 아편이 미친듯이 중국으로 쏟아져 왔습니다. 그리고, 은이 유출되었습니다.
은의 유출로 인한 경제적인 문제보다 더욱 심각해진것이 있다면, 아편으로 인한 인간의 무기력화, 퇴폐의 문제입니다. 이는 인간의 가치를 뒤흔드는 범죄로, 사람들이 활기에 넘쳐 있다면, 물가가 조금 올라도 그것을 능가하는 에너지가 사회에 있을 수 있지만, 아편에 중독되어 무력해진 사람들은 더욱 말세의 세상으로 빠져나갔습니다.
강건성세. 100여년이 넘는 영광의 시기. 그러나, 아직 그 여명이 다 사라지지조차 않은듯 하지만, 이미 세상은 한바탕 마약에 취해, 사람들은 긴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청조는 그 번영의 절정에 이르기까지 2세기가 걸렸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모조리 무너지는 시간은 단지 20여년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천조(天朝)는 하늘의 제국입니다. 천자(天子)는 하늘의 아들입니다. 하늘은 곧 태양이며, 태양의 빛은 세상을 비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중국의 하늘에는 떠있지 않았습니다. 건륭은 마지막으로 남서쪽을 바라보았지만, 태양이 서쪽으로 기우는 사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해는 서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첫댓글 이제 거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군요.
워우... 항상 느끼는거지만 글을 참 잘 ㅆ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