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에 바탕한 체험적 성령 중시
하나님은 탐구 대상 아닌 만남의 대상 성령 충만의 체험 교회 성장의 비결
지난 호에서 순복음성령신학의 정립을 위하여 중요한 것은 신학적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역설하였다. 그런데 신학적 패러다임의 변화를 위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바뀌어야 할 것은 체험에 대한 이해이다. 왜냐하면 순복음성령신학은 성령 하나님과의 체험적인 만남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미국 풀러신학교의 스핏틀러 교수는 오순절 영성의 특징을 다섯 가지로 언급하면서 그 중 제일 먼저 ‘경험’을 든다(“Spirituality, Pentecostal and Charismatic,” in DPCM, 804). 한국 순복음 운동의 창시자인 조용기 목사는 성령 충만의 체험을 교회 성장과 목회 철학의 첫째 가는 비결로 꼽는다. 왜냐하면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음성을 들을 수도 없는 하나님과, 가본 적이 없는 천국을 증거하는데 체험보다 더 큰 역사는 없기 때문이다” ‘조용기, “나의 목회와 선교,”「교회성장(5)」교회성장과 선교 2세기의 사명 (서울서적, 1988), 17∼18’. 체험에 신학적인 의미를 두기를 꺼려하는 자들은 흔히 체험을 객관성이 결여된 것으로 비판한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신앙은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에 기초를 두어야지, 주관적인 개인의 체험에 기초를 두면 안 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자체모순을 가진 주장임이 드러난다. 일체의 이론은 경험에 바탕을 두지 않은 것이 없다. 신학 역시 이론이므로 신학은 개인 또는 신앙공동체의 경험을 기초로 하여 형성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신학은 신앙보다 앞서 있지 않았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언제나 ‘현재’ ‘여기서’ 역사하는 하나님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만남(체험)의 대상이지 탐구와 사고의 대상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그곳을 기념하여 단을 쌓곤 하였다(창 12:7; 13:18). 이삭을 제물로 바칠 때 예비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는 그 땅 이름을 “야웨 이레”라고 하였다(창 24:14). 단을 쌓아서 하나님을 기념하거나 “야웨 이레”는 이름을 지어서 후손들에게 전한 것은 자신이 만난 하나님에 대한 신학화 작업이었다. 다윗은 자신의 생애 가운데 하나님의 관심과 돌보심을 체험하였다. 자신의 은밀한 생각과 마음속 깊은 것도 아시는 하나님을 체험한 후, 다윗은 하늘과 음부에도 계시고 동쪽 끝과 서쪽 끝에도 계시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였다(시 139:1∼10).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라는 다윗의 신학은 하나님을 만난 개인적인 체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건넌 후 돌을 쌓아서 기념비를 만들었다(수 4:1∼9).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 공동체의 신학이었다. 성경적 인물들의 경험은 성경의 신학을 이루는 기초가 될 뿐 아니라, 성경의 신학을 해석하는 중요한 도구가 되기도 한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가말리엘 문하에서 신학을 배운 자였다(행 22:3). 이 당시 바울이 가졌던 메시아관에 의하면 나사렛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었다(고후 5:16).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일어난 가장 첫 번째 변화는 “예수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과 신학의 변화였다(행 9:20∼22).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고 난 다음에 그들의 신학이 변하는 경우를 우리는 오늘날도 종종 본다. 미국 달라스신학교 교수였던 잭 데레 교수는 원래 기사와 표적을 부인하는 신학을 가르치는 자였으나, 치유를 체험하고 난 후에 그의 신학은 완전히 달라졌다. 치료의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체험한 후 두 권의 책을 썼으며 지금은 강단에 서는 곳마다 기사와 표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전하고 있다(Surprised by the Power of God, 1993; Surprised by the Voice of God, 1996). 하나님과의 체험적인 만남 없이 이론적으로만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은 마치 마네킹을 두고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연구하는 것과 같다. 또는 모델을 스케치한 데생을 가지고 인간을 연구하려는 어리석은 자와도 같다. 마네킹이나 스케치한 데생을 가지고 우리는 인간을 연구할 수가 없다. 인간을 참으로 알기 위해서는 그와 함께 대화하고 행동하며 같이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 모튼 켈시는 체험에 바탕을 두지 않은 이성적(理性的) 신학의 위험성을 “인턴을 거치거나 환자를 치료해 본 적도 없는 사람이 의료활동을 하는 것과 같다”고 경고하였다 ‘켈시, “용기, 일치 그리고 신학,”「오순절신학의 전망」(서울: 지문사, 1989), 351). 오순절신학에 있어서 경험이 중요한 가장 큰 이유는 경험 그 자체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성(이성)으로 무엇을 이해하기도 하고 감성(마음)으로 무엇을 이해하기도 한다. 수학적인 내용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성을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슴(마음)을 사용하는 것이 훨씬 더 적합이다. 하나님을 아는데 있어서도 머리로 아는 방법이 있고 가슴으로 아는 방법이 있다. 체험은 바로 가슴으로 하나님을 아는 방법이다. 이런 점에서 가톨릭 성령신학자 킬리안 맥도넬은 “경험은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아는 구체적인 지식이며… 하나님의 실체와 존재를 개인적인 수준에서 이해하는 것”이라고 하였다(Toward a New Pentecost for a New Evangel-ization,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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