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와 사물의 관계가 미끄러질 때
박성준
“사물과 나의 관계가 기우뚱거릴 때/ 감꼭지를 닮은 그곳에 마우스를 대고/ 클릭, 더블클릭을 해보고 싶다”(「감꼭지에 마우스를 대고」)며, 어머니에게서 떨어져 나온 나의 첫 상처인 배꼽의 존재론을 감각적으로 사유한 시인 최금녀의 이번 신작시는 기존의 그의 시적 지향과는 사뭇 다르게 읽힌다. 아니, 더 엄밀하게 말해서는 ‘감꼭지를 닮은 배꼽’을 상상하는 비유 체계나 모계의 세계로 접속하는 행위를 배꼽에다 하는 더블클릭으로 묘파해내는 신선함보다는 “사물과 나의 관계” 그 자체에 대한 탐독이 더 우선하는 시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기존의 그의 시를 비평했던 지점들만 살펴보아도 그렇다. 가령 ‘물과 불의 시학’(강우식), ‘한과 그리움’(유창근), ‘이미지의 비의’(박제천), ‘풍자와 관조’(홍신선), ‘결핍의 결속’(유성호), ‘일상성’(황정산) 등의 비평적 수사들이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점을 상기해보자. 기존의 평가가 서정적 자아의 정동과 감수성과 같은 시 정신에 방점을 두고 진행되었다면, 이번 계절 최금녀가 발표한 신작시에서는 ‘정신’보다는 ‘감각’에 대한 탐독이 더 우선한다. ‘동일성’과 ‘총체성’보다는 ‘차연’과 ‘기관화된 지각’ 현상에 대한 시적 특질들이 더욱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는 것이다.
먼저 정서가 내발되는 방식의 차이를 들 수 있다.
소금씨앗 하나 숨겨 오겠어요
죽지 않는 소금
여름에 흘리는 소금 맛은 어떨는지
매장 되었을까요 눈물 맛?
소금을 기다려요.
- 「할슈타르 소금」 부분
여행시로 읽히기도 하는 「할슈타르 소금」에서 “눈물 맛”을 찾아내는 시적 화자의 태도나 위치를 생각해보자. 이 시에서는 “소금광산”의 소금은 바로 “눈물 맛”으로 자동화된 심상으로 치환되어 기능하지 않는다. “무언가 썩고 있”는 가운데 할슈타르 소금광산에 도착한 화자는 소금광산의 진풍경으로 인해 압도당하거나 천착되지 않는다. 오히려 화자에게 이곳은 “소금을 파다 죽은 켈트족 이야기”가 수천 년 침식되었다가 다시 융기되어 눈앞에 나타난 곳이다. 그러므로 “바다 속은 늘 귀가 어두워”지고 유독 이곳에서만 더 길게만 느껴지는 여름은 “무언가 썩고” 있는 시공간으로 읽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할슈타르 소금광산은 한 민족의 삶과 생리가 뒤엉켜 장소화된 지형이다. ‘긴 여름’이라는 시간성과 소금에 노예가 된 사람들의 고된 정령들이 병치되어 여전히 부패가 진행되고 있는 위령의 공간인 것이다. 때문에 시적 화자는 이곳 경관을 단순히 관광지로 인지할 수 없다. 죽음과 죽음을 목도하는 자아 사이에서 “신만 아는 파이프라인”을 작동시켜, 소금광산만큼 큰 울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울음이 생성된 이유가 아니다. 울음을 감각하고, 취급하는 과정에 있다. 시적 화자는 인용한 부분처럼 “소금씨앗 하나 숨겨 오겠”다고도 했고, 죽은 것만 같은 소금을 “죽지 않는 소금”이라 명명하기도 했다. 그리고 소금광산이 아니라 제 자신의 몸에 늘 매장되어 있는 “눈물 맛”을 견지하며 “소금을 기다”린다는 육성을 터트리기도 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상 슬픔의 기울기에 따라 제 몸의 감각과 통점을 모두 열어놓겠다는 선언이 아니겠는가. 시에서 나타난 정황과 화자의 행동을 범박하게, 재구성해보아도 그렇다. 할슈타르 소금광산을 관람하고 있는 여행객들 중 화자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는 상황이라 가정해보자. 일행과 가이드, 주변 사람들은 저 이유를 알 수 없는 울음에 대해 갸우뚱하고, 시적 화자를 낯설게만 취급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유독 화자에게만 거대한 일이 일어난 것처럼 울음을 터트리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이러한 정황과 시적 전략은 하나의 비유라고 볼 수 있다.
일찍이 베르그송은 인간의 지각 현상을 ‘뺄셈’의 비유를 통해 해명했다. 가령 박물관에 전시된 청하백자를 미술학도가 보는 시각과 사학도가 보는 시각은 다를 수밖에 없다. 미술학도는 백자가 가지고 있는 선의 미학과 무늬, 덧입힌 문양 따위에 관심을 둘 것이고, 사학도는 이 유물과 관련된 역사적 배경과 소유자, 그에 따른 역사적 가치에 대해 관심을 보일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같은 사물을 두고도 서로 다른 인지 활동을 수행할 수밖에 없으며, 자신의 관심사와 지식 정보에 따라 대상을 인식하고 자기화하기를 즐길 수밖에 없다. 여기서 사물은 각자의 인지에 의해 온전하지 못한 뺄셈의 작용 상태에 놓이게 된다. 즉 인간의 지각 작용이란 물자체를 둘러싼 정보의 일부를 도려내고 빼낸 물질 자체에 대한 ‘이미지’일 수밖에 없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물질을 우리는 단지 신체의 지각 기관을 통해 일부의 이미지로 획득하고 ‘표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는 인간에게 지각된 이미지 다발들로 이루어진 가짜 표상일 뿐일까? 바로 여기서 시인의 직관이 작동된다. 블룸식으로 표현하자면, ‘대담한 시인’이란 기호나 표상 이전의 물질적 원형을 직관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다시 말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지하고 지각하지 못하는 사물(기호 표현)의 기저를 읽어내고, 재감각하는 존재가 시인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모름지기 시인이란 “다른 사람들이 울지 않을 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울어 버릴 수 있다는”(최승자) 그런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러니 할슈타르 소금광산 앞에서 시적 화자만 감각하고 있는 이상적 기후는 “눈물 맛”― “소금”― ‘슬픔의 내력’을 기다리는 시인의 직관력의 방증이자 “사물과 나의 관계가 기우뚱거”리기 시작한 시인의 정서적 충동이라 읽어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왜 최금녀 시인은 “사물과 나의 관계”의 깊이에 매료된 것일까. 「말, 미안하다」와 「중얼거리는 중이다」를 경유해보면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두 편의 시는 모두 시적 화자의 뜻대로 소통이 되지 않는 현실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먼저 「말, 미안하다」에서는 누군가와 관계하는 자리나 생활에서 자신이 쏟아낸 말을 되돌아보는 시편이다. 내가 쏟아낸 말도, 타자가 쏟아낸 말도 모두 한 번 내뱉어지고 나면 “목도 허리도 발끝도/ 어디에 단단하게 묶이는 것”을 할 수 없는 질료일 뿐이다. 오히려 ‘나’나 ‘타자’에게 시간이 지나 인지되지도 못할 지경에 이른 말들은 어느덧 더 선명해져서(“헛웃음치며/ 아무데서나 반짝거린다/ 의미를 단단하게 거머쥐었다는 듯”) 되돌아오는 경우가 다반사다. 즉 나에게서 쏟아진 말은 분명 내 것이었던 것인데, 뱉어지는 순간 나의 소유권이 허약해진 상태로 떠돌다가, 종국에는 그 말의 소유주를 찾는 황망한 경우가 생기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절뚝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 내가 쏟아낸 말들이/ 머리를 숙이고/ 미안하다고 한다”라고 화자는 언술할 수밖에 없다. 자신이 쏟아낸 그 수많은 말들에게 미안함을 갖지만 시인은 다시 말로 말을 씻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을 분명히 알고 있는 것. 그래서 “말이 말을 씻는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자신을 말이라는 거울 즉 ‘시’에 비춰보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시적 화자는 관계의 ‘기우뚱거림’으로 해명할 수만은 없다. 그저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의 상황들 ―시편 속에는 은폐되어 있으나 ―만이 더 선명하게 떠오른다.
「중얼거리는 중이다」는 이와 같은 상황의 지속된 어느 날의 일상을 그려놓은 듯한 시편이다. “창밖에서 눈이 내리면/ 걷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는 전화를 받는다”거나 “책이 사라지고 있다고 말하는 중이”이라는 중얼거림은 시적 화자에게는 일상에서 겪게 되는 우연한 몇몇 장면 중 하나이다.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 불안감이 휩싸이고 있는데 뾰족하게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노릇만 지속되고 있다. 그런 일상에서는 “무슨 생각이 옳은 지/ 옳은 것이 생각나지 않”는 막연한 권태로움만 계속되고 있으며, 그런 순간마다 나는 “통치이즈가 필요해 마트로 간다”거나 “아무렇게 쌓인 생각들”을 “지하실”에 방치해두며, “느릿 느릿” ‘고요’와 ‘권태’를 소비 하는 중이다.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굉장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 이런 종류의 억압은 시적 화자의 언어 체계에 ‘중얼거림’이라는 병증을 만든다. 나와 사물 사이 명확한 의미로 대상을 직시하는 언어 체계가 아니라 대상에 가닿을 수 없는 기호들만 난무한 ‘미끄러짐’을 유발하게 되는 것이다. “묻지 않는 말이 전화기 속으로” 새는 것처럼, 이제부터 시인에게 말이란 대상을 관장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 주위를 맴도는 무기력한 ‘기다림’의 용도로 전락해버린다. 그러니 이와 같은 과정에서 시인의 직관과 감각은 스프링처럼 튀어오를 수밖에 없다. 그래야만 온전히 나를 보존해낼 수도 있고,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시적 자존을 부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이런 관점에서 「어제 같은 사람」을 읽어보면, 이 시는 「어제 같은 사람」이 아니라 「어제 같은 나」로 읽힌다. “사람”이라는 시어를 ‘나’로 바꾸고, “나”라는 시어는 ‘사람’으로 바꿔서 읽어보자.
떠오르지 않는 나는 검은 나이다
한참을 바라보아도
맞은편의 검은 우산은 누구였지?
집에서 길을 놓치다니
비가 오면
알 듯한 내가
벽 쪽에 기대어 섰다
벽을 모르는 새들이
마당에 와 지껄이다가
사람을 두고 날아가 버린다
떠오르지 않는 나는 어딜 갔나
나도 어두움이 필요할 텐데
엉거주춤하고 있을까
어제는 검은 색이다
검은 색은 이불처럼 포근하다
아무것도 몰라도 된다
묻지 않는다
우산을 편 내가 밤새 전화를 거는지
밤중까지 비가 내린다
비만 오면
어제 같은 내가 기다려진다.
우선 본래 시의 의도를 생각해보자. 「어제 같은 사람」은 “어제” 즉 과거의 어떤 일을 알게 된 나의 불안한 정동에서 시작된 시편이다. 언뜻 읽으면 비가 오는 날 수장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비 오는 날이면 나를 뒤따라 다니는 어떤 사내에 대한 불안증을 묘사한 것도 같다. 그렇다면 여기서 제목에 주목해보자. “어제 같은 사람”이란 어제 본 같은 사람일 수도 있고, 어제라는 시간과 동일화되어 있는 과거에 매몰된 사람일 수도 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양자 중 그 무엇의 의미가 되더라도, 시적 화자에게는 과거의 어떤 일들이 현재까지 지속되어 ‘맺혀 있음’의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검은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그 존재는 시 전반부까지 화자를 “집에서 길을 놓치”게 하거나 “마당에 와 지껄이”는 “벽을 모르는 새”처럼 시적 화자의 시공간감을 퇴조시킨다. 즉 화자에게 비 오는 날이면 불현듯 나의 기억 속에 등장하는 ‘검은 형상’이란 나의 인지 감각을 무화시켜버리고 나를 오직 그 존재에게 몰두하도록 유도시켜버리는 억압으로 작용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윽고, “어제는 검은 색이다/ 검은 색은 이불처럼 포근하다/ 아무것도 몰라도 된다/ 묻지 않는다”와 같은 구절처럼 ‘검은 기운’으로 인해 자기 주체성을 상실해버린 채 ‘검정’과 내가 동화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화 또한 종국에 시 말미에는 나에게 ‘기다림’의 정감을 유발하는 ‘검은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심으로 승화되고 있다.
이쯤 되어, 시어를 교환한 시를 다시금 읽어보자. 혹여 “검은 사람”의 형상이 더 명확해지고 있지 않은가. 내 안에 있는 ‘검은 나’를 발견하는 지독하게 고독하고 처연한 나의 고백이 되고 있지 않는가. “집에서 길을 놓”친다는 구절에서처럼, 알고 싶지만 끝끝내 알지 못하는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가 서로를 견주면서 뒤엉키고, 나에게서 또 다른 나를 찾는 고행의 길로 들어서는 시편이 되고 있다. 최금녀 시인의 이력을 경유해보아도 그렇다. 오랜 시간 언론인으로 살아왔던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일보다 타자와 공동체의 이야기를 취재하고 적어내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은 할애했을 것이다. 시인에게 무례를 무릅쓰고 시어를 고쳐 적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관계 속에서 나를 은폐한 채 인터뷰어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의 지속은 나만의 ‘특수 감각’보다는 모두의 ‘공통 감각’을 아우르며 살아가도록 삶을 유도했을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본격적인 시작활동을 시작하고 난 이후에도 시인의 시적 지향점을 상기해보면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나’보다는 ‘세계’에 한 발 더 가닿아 있는 서정적 시 세계를 구축하고 있었다는 평가 안에서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 최금녀의 시는 전혀 다른 ‘감각의 잠재성’을 가지고 운동할 것으로 보인다. 이제 시인은 나와 사물, 나와 타자, 나와 존재 간의 기울어진 기울기를 가늠하고, 그 사이 감각을 횡단하여 현실에서의 미끄러짐의 정동 ― 시편 속에서는 ‘기다림’의 의미로 구축된 ―을 쓰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기대감과 미래적 전망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고 생각되는 시편을 함께 읽어보자.
목구멍 속이 가려워요
고양이털을 조심하라고 말하다가
입을 막았어요
털은 불안해요
고양이 호텔, 고양이 카페, 고양이 장례식장
고양이를 안고 다니는 사람들이 웃습니다
몰래 웃는 웃음이 더 가려워요
고양이를 사랑하건, 고양이털을 사랑하건
털은 가려워요
엄마보다 고양이를 사랑한다고 말했어요
신문사설도 옳다고 썼어요
거꾸로 읽는 독법이 너무 가려워요
감각을 사랑한 적이 있어요
엑스레이도 통과하는 털도
가려움증도
고양이일까요?
나 혼자
고양이털 고양이털
나 혼자 위독한 거죠
쉴 새 없이 온 몸을 긁어요
고양이 눈이 갑자기 커지네요
TV를 꺼요.
― 「고양이털」 전문
최금녀의 시를 가까이 둔 독자라면, 이런 시인의 변화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저마다의 짐작이 가능할 것으로 믿는다. 하여, 해설 없이 「고양이털」을 재차 읽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대신에 나와 시인 사이, 시인과 독자 사이 수많은 질문들을 덧붙여 본다.
웃음과 가려움 사이에 어떤 감각이 있을까. 어두운 공간 속을 건너다니는 고양이가 상자가 아닌 TV에 뛰어든 이유는 무엇일까. 어두운 공간을 휘몰아 누르고 있는 TV 속은 어떤 세상/세계를 보여주고 있을까. 옳은 “신문사설”이란 무엇인가? 사설이라는 의견에 옳고 그름의 판단이 기능하는 것은 과연 옳은 것일까. “엄마보다 고양이를 사랑한다는 말”은 시인의 전작들을 경유해보면 정서나 존재적 근원보다 감각을 사랑하겠다는 선언이 아닌가? 그럼 거꾸로 읽는 독법은? ‘거꾸로’가 있다면 ‘똑바로’를 인지하는 시적 화자의 태도는 무엇인가? 온전한 혼자가 된 시인이 “나 혼자”를 연발할 때 어떤 표정이었겠는가. 나 혼자 앓고 있는 그 “위독”은 지금쯤 다른 차도를 보이고 있지는 않을까. 시인은 정말 감각을 사랑한 적이 있을까? 아니 사랑한 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현재도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TV를 꺼요? TV를 끈다면…… 아니 그의 TV를 쉽사리 끌 수는 없겠다. 앞으로 더 많은 질문들이 최금녀가 구축한 이토록 미끄러운 세계의 문 앞에서, 자주 문을 두드려주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