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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자동 사람들: 왜 돌봄은 계속 실패하는가>
정택진, 빨간소금, 2021
연세대 문화인류학 석사 논문 '쪽방촌의 사회적 삶: 서울시 동자동 쪽방촌을 중심으로'을
책으로 옮겼습니다.
분명, 우리는 열심히 일해왔는데
왜 이런 논문에서 비춰지는 사회복지사와 복지관은
'사람을 사람답게 돕는' 그런 존재와 그런 곳과는 거리가 멀게 보여지는 걸까요?
'공감과 연대'에 속하지 못하고
'실적과 성과'를 따져 묻는 존재라니...
"여기 오면 쪽방상담소에서 뭐 주고 사랑방에서도 뭐 주고 이러니까
사람이 얻어먹는 버릇이 들어가지고 다시 재탕이 되는 거예요."
노정수는 공공임대주택 등을 통해 쪽방촌을 벗어난 사람들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
주요한 이유가 여러 단체의 물품 지원 활동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얻어 먹는 버릇"이라는 윤리적 평가와 별개로 동자동 쪽방촌은
제도화된 복지 기관인 "쪽방상담소"이든 주민자조조직인 "동자동사랑방"이든
항상 누군가가 무언가를 "주는" 곳으로 설명한다. 37
정영희가 기초생활수급 대상자로 선정되면서 가족과 접촉하는 빈도가 점차 낮아졌다.
기초생활수급 덕분에 가족에게 의지하지 않고도 지속적인 소득을 확보할 수 있게 되자
그녀는 굳이 가족을 찾아오려 하지 않았다.
가족과 접촉은 점차 뜸해졌고 대때로 연락마저 두절되어 정민희는 동생의 행방을 여기저기 수소문해야 했다. 62
정민희가 말하는 "사람다운" 삶이란 경제적 돌봄을 넘어 일상적 돌봄의 차원으로 확장된다.
빈민, 정신지체 장애인, 아이를 가진 여성 등의 조건에서 정영희가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가족이든 국가이든 현금을 지급하는 일뿐 아니라 그것을 제대로 관리하고 사용하도록 돌봐야 한다.
또한, "밥"을 차리거나 "청소"와 "빨래"를 하고 아이를 돌보는 등 살기 위해 꼭 필요한 노동도
그녀 곁에서 반드시 누군가 제공해야만 한다. 다시말해 최소한의 경제적 조건을 충족하는 것만으로
정영희의 "사람다운" 삶은 불가능하다. 정민희가 이야기하는 사람다운 삶이란
이러한 일상적 돌봄이 존재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은 가족인 자신만이 제공할 수 있다. 64
생계급여와 중위소득 기준 등 급여 수준 향상을 요구하는 빈민 운동계의 목소리는,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전제하는 삶의 형식이 과연 온전한 삶의 충분조건인가에 관해 문제를 제기한다.
급여 수준이 최소한의 경제적.물질적 생존만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낮기 때문에,
수급 대상자는 지출을 줄이기 위해 "사회적 관계"를 포기함해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필요한 모든 활동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온전한 삶을 위해 물질적.경제적 필요가 먼저 충족되어야 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경제적 삶이 곧 온전한 삶은 아니다. 그럼에도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전제하는 삶의 형식은
온전한 삶, 혹은 좋은 삶을 경제적 차원의 삶으로 축소한다. 이때 경제적 차원의 삶을 넘어서는 사회적 관계와
상호 의존, 일상적 돌봄은 실질적으로 기초생활보장제도가 개입하지도 않고 개입할 수도 없는
필연적 공백으로 남는다. 66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는 가족의 관심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삶과 욕구를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정신지체 장애인'이다.
무료급식과 생필품을 나누어주는 수많은 복지관의 지원 속에서는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아야 하는 '노숙인'이다.
기초생활수급제도 속에서는 자활 능력도 의지도 없는 '일반수급자'다.
"유령이 된 거 같았어."
정영희는 자기 경험을 "유령"이라는 낱말로 표현한다.
"유령"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여러 복지 시설과 제도 속에서 정영희는 분명 물리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녀의 정체성은 정신지체 장애인, 노숙인, 일반수급자라는 형태로 환원될 때에만 인정받는다.
거기에 '정영희'라는 정체성은 없다. 그래서 그녀는 물리적으로 존재하면서도 자기 자신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유령"이 되었다. 84~85
결국 생계급여에 의존해야 하는 수급자는 생존을 위해 "사회적 관계를 포기하고 고립된 생활"을 선택하거나,
정영희처럼 기초생활수급 이외에 또 다른 경제적 수입을 찾아야만 한다. 99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영희는 홍인택과 관계를 단절하지 못한다.
상실과 폭력의 경험에서 비롯된 의지, 즉 스스로를 표출하고 독립적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는
기초생활수급을 매개로 한 홍인택과 관계로 이어졌다.
결국 정영희는 자신의 삶을 서서히 갉아먹는 파괴적인 돌봄의 관계 속으로 얽혀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105
동료 주민들이 시신을 직접 운구해 카트까지 옮기는 데 걸리는 시간은 1~2분 정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운구 절차 없이 시신을 차량에서 곧장 카드로 옮기는 행위는 기억과 애도의 시간을 앗아간다.
이때 장례는 고인을 추모하는 의례가 아니라 기계적이고 관료직인 절차로 환원되어버린다. 117
죽은 자에 대한 의례의 주체는 반드시 혈연가족이어야 하며, 장례를 치러줄 다른 사회적 관계는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혈연가족이 아닌 이상 모두 무연고 사망자로서 비정상적 죽음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122
김동석과 처음으로 단둘이 나눈 대화에서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다름 아닌
"마비"와 "길들여짐"에 관해서였다.
"여기에 나눠주는 게 정말 많잖아요. 이게 주민들을 마비시켜요. 이제 고마움도 못 느끼는 거죠.
나눠주면 좋아하긴 하는데 막상 물어보면 누가 준 건지도 몰라요.
비판적으로 봐야 하는데 그게 안 되는 거예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 것도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되는 거죠." 158
자신이 사회복지사인데도 황민욱은 "너희가 먹이고 살려야 된다"라는 말을 듣고 난 뒤
복지의 역할에 대해 일말의 회의를 품었다.
황민욱은 대기업의 후원을 통한 물품 지원 사업이 주민의 삶 유지에 큰 도움이 된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이것이 지속될수록 자립과 독립에 대한 주민의 의지는 점차 약해진다고 생각한다.
주민들은 점차 "일을 안 하려고" 하고, 각종 후원과 사회복지사의 일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거기에 더욱더 의존한다. 159
황민욱은 주민들이 "실업급여", "수급", "기초연금", "근로장려금" 같은 복지 정책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상황을 우려한다.
물론 자활사업에 참여한다 하더라도 장기간의 노숙이나 알코올중독, 정신질환 등으로 자활이 불가능한 예도 많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안고 있는 주민이 아닌 한 자활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가장 큰 원인은 무조건적인 복지와 자원 활동이다.
자활하려는 의지나 실천 없이도 생계에 필요한 대부분의 것이 지금되기 때문에 의존적 태도로부터 벗어나기 힘들다. 164
곽주형과 황민욱이 물건을 나눠주는 행위를 걱정하는 까닭도 이러한 활동이 주민들의 자활과 독립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의존을 강화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곽주형이 볼 때 의존을 재생산 하는 지원활동은
주민들의 몸에서 나는 "썩는 냄새"를 없애지 못한다. 165
줄서기는 주민들에게 특정한 몸의 배치와 시민적 덕목을 요구함으로써 정치적 효과를 만들어낸다.
또한 주민의 인격와 자존감과도 연관된다. 173
"뭔가를 계속 나눠주는 외부 기관과 사람들"은 줄서기를 통해 주민들을 통제한다.
또한 수혜자가 되기 위해 가져야만 하는 일련의 자세를 요구함으로써 "주인 행세"를 한다.
반면 주민들은 줄서기라는 행위를 자발적으로 실현하고, 이를 통해 스스로를 규율함으로써 통제에 순응하는 "대상'이 된다. 176
2019년 가을 쪽방상담소의 등록자 명단이 전산화되면서 이러한 작업은 더 빠르고 정확해졌다.
주민이 가지고 있는 쪽방 등록증은 신분증 뒷면에 붙일 수 있는 작은 바코드로 대체되었다.등록증과 서류를 대조하던 직원의 모습도 노트북과 바코드 리더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변했다.
전산화는 '선별'이라는 줄서기의 기능을 더욱 강화했으며,
필연적으로 자격 조건에 해당하지 않는 주민을 '배제'하는
기준도 강화했다. 178
그녀는 규정된 기준과 자격을 더 중시하는 지원 활동에서 지속적인 선별과 배제를 경험했다.
그러면서 나누어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의 관계가 "사람대 사람"의 관계 아니라고 느꼈다. 179
국가의 복잡한 행정 시스템과 소득.자산 조사를 경유하지 않더라도 정영희는 동자동의 주민인가 아닌가,
60대인가 아닌가, 남자인가 여자인가라는 단순한 기준에 의해 배제를 경험함으로써 박탈감을 느꼈다. 180
주고받음의 행위는 단순한 경제적 교환이 아니라, 줌의 의무에 응답할 수 있는가를 확인하고
거기에 응답함으로써 서로를 인정하는 사회적 행위다.
서로의 인격과 체면을 인정하는 주고받음의 과정을 통해 개인은 호혜적 의무의 고리로 엮인 '사회'의 일부가 된다. 187
자원 활동이라는 이름으로 제공되는 물건을 받거나 식사를 대접받는 일은 쪽방촌 주민의 삶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마치 "거지" 취급 받는 듯한 인격 손상과 자존감 박탈의 경험 속에서
주민들은 이를 거부할 수밖에 없다. 189
돌려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상대방의 줌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받는 자는 인격과 체면을 상실한 채 "거지"가 된 것 같은 자존감 박탈을 경험한다.
따라서 돌려줌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줌과 받음이 지속되려면,
증여의 대상이 느끼는 인격 손상을 방지하기 위한 미시적 기제가 있어야 한다. 194
학생들은 "여기" 즉 쪽방촌에서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집"에 대한 "감사함"을 느낀다.
평소에 알지 못하는 자기 주변의 환경을 쪽방촌과 대조하며 "새롭게" 바라보게 되고,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한 감사함을 깨닫는다.
학생들의 서사에서 "여기"인 쪽방촌의 세계와 자신의 세계인 "집"은 완전히 분리된다.
"여기"는 "집"과 완전하게 대조되는 세계이자 "집"의 감사함과 소중함을 일깨우는 거울과 같은 세계다.
"여기"라는 거울을 통해 "집"의 세계를 비추어봄으로써 비로소 감사함과 소중함을 느낀다.
"집"이라는 바깥에 존재하는 "여기"의 세계를 통해 "집"의 세계는 더욱 공고해진다. 205
무료 물품 지원도 마찬가지다. 주민들은 상호 인정의 의례에 참여하지 못한 채 자존감과 인격의 박탈을 경험한다.
주는 자와 받는 자의 두 세계는 완전히 분리된다. 완전히 분리된 세계에서 주민들은 "만악"이고 "그림"이며 "거지"이다.
결코 '우리'의 구성원이 될 수 없는 완전한 타자일 뿐이다. 207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는 도시가 "단지 건물.도로.지하철.공원.폐기물 처리 시설.
소통 케이블로 이루어진 물리적 환경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문화적 실천, 지적 회로, 정도적 네트워크,
사회적 제도들의 살아 있는 역동체"라고 말한다. 이들에 따르면 도시는 "공통적인 것(the common)의 원천"이자
"공통적인 것이 흘러들어가 모이는 저장소"다. 즉 도시에서 생산되는 모든 생산물과 가치는 도시 공간에 밀집한
물질적 요소뿐 아니라 도시 공간 내부에서 다양한 형태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공동으로 생산된다.
그러므로 도시 공간은 교환가치에 기반한 사유재산이나 이윤 창출의 수단이 될 수 없다.
도시 공간을 각자의 필요와 욕구에 따라 사용하고 도시를 구성하는 정치적 과정에 참여할
'도시에 대한 권리(right to the city)'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다. 241
정영희가 말하는 "예배"는 교회나 성당 같은 종교 기관이 아니라 그녀가 자주 방문하는 복지관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대부분의 복지관이 종교 기관에 의해 운영되기 때문에 복지관 이용자들은 무료급식을 받기 위해
자기 의사와 관계없이 종교 행사에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 무료 급식을 이용하는 서울역.영등포역.을지로역의 거리 노숙인 쪽방 및 고시원 주민 101명 중 22%가
무료 급식소를 이용할 때 가장 불편한 점으로 종교 행사를 꼽았다.
이는 지나치게 긴 대기 시간(34%) 다음으로 높은 수치다. 268
첫댓글 알 사람은 알지요.
세상의 지성인과 백세 뒤의 성인에게도 부끄럽지 않게, 그렇게 사회사업해야지요.
좋은 글 나누어 주어 고맙습니다.
선생님~
네, 맞아요. 사회사업 밖에 사람들에게도 부끄럽지 않게,
그렇게 이뤄가게 잘 거들겠습니다.
서귀포 작은예수의집 윤주영 선생님께 책 소개 받았습니다.
P242
주민들에게 동자동 쪽방촌은 노후하고 열악한 인프라를 넘어 다양한 의미와 사용가치를 제공하는 삶의 공간이다. 그리고 쪽방촌을 삶의 공간으로 만들어왔던 주민들의 노력은 이 공간이 누군가의 소유가 아닌 공동의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P258
생물학적 생명만이 사람의 유일한 조건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인간으로 태어나지만, 사람임을 인정하는 사회적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사람이 된다. 생물학적 종으로서 부여되는 인간의 범주와 달리 사람은 “어떤 보이지 않은 공동체 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