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길었던 하루
2004.09.20 06:00분,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잠에서 깨워 출발 준비를 한다.
처음 떠나는 여행이 아닌데도 설레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준비를 해 왔는데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에 이르러서야 안경과 메모수첩을 책상위에
두고 온 사실을 알게 되었다.
되돌아 갈까 하다가 이내 포기하고 버스를 기다린다.
오전08:10분, 인천공항행 버스에 아내와 함께 몸을 실었다.
월요일 이라 다른날보다 도로가 더 막힌 듯
예정시간보다 40여분이나 늦은 10:30분에 공항에 도착 했다.
인천공항 3층 B와 C사이에 있는 노랑풍선 데스크를 찾아가니
연한 갈색머리의 아가씨가 여행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며칠전 전화로 인사를 나누었던 T.C권순옥양이다.
막내 처제와 이름이 똑같아 웬지 정감이 드는 아가씨다.
그녀에게 다가가 "안녕하세요?" 하며 아내와 나의 여권을 건네 주었다.
"아유, 안녕하세요? 선생님은 저희 노랑풍선의 VIP세요.유명하시구요. 반갑습니다"
그녀가 상냥하게 미소를 지으며 반겨준다.
나는 결코 VIP도 아니고 또, 유명하지도 않기에 매우 쑥스러웠지만
그리 말해 주는것이 싫지는 않은지 당장 그녀에게 호감이 간다.
그런데 12:40분 출발예정이던 항공기가 2시간정도 지연 될 것이라고 한다.
약속시간을 지키기 위해 서둘렀던 것을 생각 하니 조금은 억울했지만
도리어 여유가 생긴 것을 즐기기로 한다.
공항 청사 이 곳 저곳을 구경하다가
동유럽에서 사용할지 모를 카메라 충전기용 아답타를 3만원을 주고 구입했다.
(참고:동유럽은 우리나라와 차이가 없는 콘센트여서 한 번도 사용을 안함.)
오전11:00분,미스권으로 부터 보딩카드를 수령하고
맞은편에 있는 아시아나 부스에서 짐가방을 부친후
D위치에 있는 아시아나 데스크로 가서 마일리지를 적립했다.
오후12:30분,비행기의 출발지연으로 기내에서 점심을 제공할 때까지
기다리기엔 너무늦다.
부득이 4층 한식당에 올라가 점심을 먹고있는데
비싼 음식값을 보고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오후1:25분,출국수속을 마치고 항공기를 탑승하기위해 8번게이트 앞에 와 있다.
잠시 대기하는 사이 사무실로 마지막 통화하고 휴대폰의 전원을 껐다.
이윽고 게이트가 열리고 탑승하기 시작한다.
아시아나 항공기의 좌석은 ABC /DEFG /HJK로 배열되어 있는데
보딩카드에 있는 좌석번호와는 상관없이 미스권이 새로 배정해준 좌석 번호에 의해
아내와 나는 41J와 41K에 앉게 되었다.
창가를 아내에게 양보하고 가운데 앉았는데
바로옆 41H 좌석의 주인은 젊은 여성이다.
우리와 같은 일행이었지만 혼자 떠나는 여행이라고 한다.
이 아가씨 나이때는 우린 감히 해외여행을 꿈도 꾸지 못했는데
젊음의 여유로움이 부럽기만하다.
정확히 2:02분부터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던 OZ 541 아시아나 항공기는
오후2:25분을 가르킬즈음,요란한 폭음을 터트리며 하늘을 향해 비상을 시작한다.
나는 항공기가 이륙하는 순간을 무척 즐긴다.
지상에서의 이륙하는 순간, 현재의 신분이나 위치에서 상승하는 것 같은 희열을 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시간부터 한국에서의 모든 일상생활을 잊어버리고 오직 여행만을 생각한다.
얼마나 행복한일인가!
기내의 대형스크린에서는 다음과같은 내용의 자막을 보여 주고있다.
남은 비행거리: 8,550 km
남은 비행시간: 10시간 52분
출발지 현지시간: 14:25
도착지 현지시간: 07:25
도착 예정시간: 18:16
본래는 동유럽과 우리나라의 시차는 우리가 8시간 빠르지만
지금은 썸머타임 기간이라 7시간 차이가 난다.
오후3:30 분,시계를 7시간 뒤로 돌려 놓으니 오전08:30분으로 유럽 현지 시간이다.
이제부터는 우리나라 시간은 무시하고 현지시간으로 타이밍을 맞추기로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시차적응을 빨리 하는 요령이기도 하다.
이륙한지 1시간이 지나자 예상대로 뜨거운 물수건과 음료수 그리고 기내식에 대한
메뉴판을 배급한뒤 곧이어 식사가 나왔다.
메뉴는 양식과 한식인데 우리 부부는 양식을 택한다.
공항에서 점심을 먹은지 불과 3시간밖에 안되었지만
하늘에서 제공하는 식사를 사양할 우리가 아니다. 남김없이 먹어준다.
중간에 간식으로 나오는 햄버거는 사양했지만
8시간이 지난 후 다시 제공되는 기내식도 말끔히 먹어 치웠다.
별로 움직임이 없는 상태에서소화도 잘 안되었을 텐데
욕심껏 하루 네번의 식사를 한 것이다.(과식은 화를 불러옴을 망각한 것이다.)
한국시간으로는 밤12시다.
비행기 창문의 가리개를 열고 밖을 보니 아직도 환한 대낮이다.
길고 긴 낮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유럽 현지시간으로 오후 05:05분 해가 질려면 아직도 2~3시간이상 남아있다.
이젠 1 시간 남짓만 날아가면 독일 프랑크푸르트 암마인 국제공항이다.
OZ 541 아시아나 항공기는 현재 10,500 m 상공을 시속800km 정도의 속도로
계속 서진하고 있다.
시계가 오후 6시가 가까워지자 항공기가 서서히 고도를 낮추기 시작한다.
예정된 시각에 정확히 도착할 것 같다.
그런데 갑자기 옆의 아내가 괴로워한다. 멀미하는것 같다고 하며 토할것 같다고한다.
모두 착륙직전이라 안전벨트를 메고 이동이 금지된 상태에서의 긴급 상황이 생긴 것이다.
난 참을 수없으면 화장실로 가 토해버리라고 했다.
아내는 잠시 견디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좌석을 벗어나 승무원에게 사정을 말한다.
둘이서 무슨 얘기를 나누는 듯 하더니 아내가 비틀거리며 되돌아오고 있다.
쓰러질 것 같은 아내를 승무원이 부축해서 간신히 좌석으로 인도해 준다.
아내는 얼굴이 백짓장처럼 창백해지고 금방이라도 실신할 것 같은 상태다.
비로소 나는 사태가 심각함을 깨닫고 저윽이 당황이 되었다.
승무원에게 급히 마실물을 부탁하고 인중과 양쪽 귀위에 있는 급소를 지압하며
정신 차리라고 말을 할 뿐 어찌할 방법이 없다.
항공기는 점점 하강중이고 기체는 더욱 심하게 흔들린다.
아내는 맥을 놓은 채 고개를 떨구고 있고 나는 안절부절 한 채 물을 먹이며
빨리 착륙하기만을 고대 한다.
숨막히는 시간이 흐르고 있고 나는 그 순간 갖가지 상념에 빠졌다.
(혹시 잘 못 되는것은 아닐까? 어째 출발조짐이 안 좋더니..계속 이 상태면 여행이고 뭐고
프랑크푸르트에서 치료를 하도록 하자.)하는 등 온 갖 생각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불과 20분정도의 시간이었건만 왜 그리 길게만 느껴지는지...
불안한 마음으로 아내를 부축하고 있는 중에 마침내 기체가 육지에 닿는다.
(휴,천만 다행이다. 일단은 안심하자...)
항공기가 활주로를 지나 움직임을 멈추는 순간,
승객중 한 분이 오시더니 우황청심원 1병을 내주며 빨리 드시게 하라고 한다.
"이걸 드시면 금방 좋아 질것입니다"
그 분의 이 한마디는 깜깜한 어둠속에서 들은 구세주의 말처럼 희망을 준다.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지체없이 아내에게 마시게 했다.
뒷 좌석에 있던 젊은 청년이 노랑풍선 일행이냐고 묻더니 대신 짐을 들어주겠다고 한다.
별로 무거운 짐이 아니어서 사양했지만 그 마음씨가 참으로 고맙다.
잠시 동안의 시간이 흐르고
아내는 정신이 서서히 회복되는 듯 괜찮아 진것 같다고 한다.
예상밖의 신속한 약의 효험에 기뻐하며 비로소 여유가 조금 생긴다.
(어휴 십년감수했다... )
아내를 부축해서 기내를 빠져 나온후 입국절차를 밟기위해 입국심사대앞에 대기하고 있다.
공항청사의 시계가 오후 7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제서야 우리 일행들의 면면을 두루 살펴본다.
초등학교 학생 남매를 포함, 20대부터 70대까지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인솔자인 권양을 포함하여 모두 30명의 인원이다.
우황청심원을 주셨던 분도 우리 일행이었다.
그 분께 다시한번 감사드리자 권순옥양을 비롯해 많은 분들이 걱정을 해주면서
안부를 물어온다.
일행들의 관심에 감사드리며 심려를 끼친 것에 대하여 미안하게 생각되었다.
아직 안심하기에는 이르지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간단한 입국절차를 마치고 짐을 찾아 청사밖으로 나오니
노랑색 대형관광버스가 우리를 맞이한다. 체코 기사였다. 꽤 미남형이다.
그 는 친절하게 우리들의 짐가방을 하나하나 차에 받아 넣고 바로 공항을 출발한다.
오늘밤 숙박할 브레네를 향해서다.
버스는 잠깐사이에 고속도로에 접어들었는데 시간을 보니 오후7시28분이다.
밖은 어둠이 서서히 찾아오고 있었지만
프랑크푸르트는 아직 그 자태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이윽고 우리의 인솔자, 권순옥양이 버스의 마이크를 잡고 멘트를 시작한다.
"안녕 하세요.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저는 권순옥입니다."
"오늘 여러분께서는 7시간이 젊어지셨답니다. 그러시니 피곤 하시드래도 조금만 더 참으세요"
"지금 달리고 있는 도로는 그 유명한 아우토반이랍니다."
계속되는 그 녀의 멘트에 의하면 괴테가도를 따라 앞으로 약 5시간정도를
더 달려 가야한다고 한다.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지만 5시간이라..그 것참 걱정이 되네)
아내는 차에 오르자마자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고 있다.
나는 마음을놓지 못한채 슬쩍슬쩍 아내의 상태를 살펴가며 창밖의 독일 풍경을 감상한다.
풍경이래야 온통 숲만 보일 뿐이다.
권양에 의하면 독일은 수림을 잘 가꾸어서 수목자체가 큰 자원이 되고 있다고 한다.
이 것은 경제도로를 만든다는 미명아래 사실은 전쟁준비를 위해 만들어 놓은
고속도로와 함께 히틀러가 독일 국민들에게 잘 해준 일중 하나라고 한다.
도저히 좋아할수없는 인물이 만든 도로를 달리며 이 번 여행길에는 그에 대한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생각한다.
어느덧 아우토반에는 어둠이 깔려오고 칠흙같은 도로를 라이트를 켠 차들만이 열심히 오가고 있다.
어둠속에서 맨 뒷좌석을 더듬어 찾아가니 일행 한분이 누워있다가 얼른 자리를 양보한다.
아내를 깨워 뒷좌석으로 오게한후 내 무릎을 벼개삼아 두다리를 쭉펴고 눕게했다.
저윽이 안도가 된다.
약 3시간이 지난 밤 10시 25분, 북동방향으로 쉬지않고 달리던 버스가 휴게소에 서 멈추어 섰다.
에르프루트(ERFRUT)라는 도시에 있는 휴게소다.
아내와 함께 화장실를 이용하고 서유럽여행시 쓰고 남았던 동전을 꺼내 콜라 한 병을 구입했다.
아내의 컨디션이 안 좋은 것은 아무래도 과식해서 체하지 않았나 생각되었기에
생수보다 콜라를 마시게 한 것이다.
휴게소를 벗어난 버스는 다시 어둠속의 길을 가르고 있다.
지나는 길들이 괴테가도라고 했지만 어둠속의 괴테가도에는 아무런 낭만도 감흥도 나지 않는다.
그 저 피곤 할 뿐이다.
그 어느때보다 길고 길었던 2004년 9월 20일이 막 지나고 있다.
지금시각은 9월21일 0시 10 분,
4시간 50분을 숨가쁘게 달려온 버스는 마침내 달리기를 멈춘다.
독일의 브레나 근교에 있는 바바리아(BAVARIA)호텔의 주차장에서다.
브레나(BREHNA)는 지도상 할레와 라이프지히의 삼각지점 윗쪽에 있는 소도시다.
베를린 여정을 위한 전진기지인 셈이다.
여기서 베를린까지는 2시간 정도..
호텔은 생각보다 훌륭한 수준급이었다.
천천히 샤워하고 지친 몸을 침대에 누이니 이미 밤1시다.
무엇보다 아내가 힘든 고비를 잘 견디고 무사히 잠을 자게 되는것이
더없이 감사하고 행복하다.
길고도 길었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