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 일기
이봉주
오늘 밤 잠시 서책을 내려놓고 먼바다를 바라보는 한가로움은 아내의 임종도 지키지 못한 설움을 파도에 씻기 위함이다
탱자나무 가시 울타리가 성벽 같아 늘 쓸쓸하고 외롭다 구 백리 물길 건너온 귀양살이가 어디 그리 녹녹하겠는가만 조팝에 두어 가지 젓갈로 이어가는 끼니가 풀잎 저고리를 걸친 듯 춥기만 하다 이곳엔 천자문조차 떼지 못한 무식쟁이 어부나 농부들뿐이니 학문을 논할 벗조차 하나 없어 상적이 보내온 책들이 내 유일한 벗이다 책을 펼칠 때마다 그와의 추억이 온기로 묻어나 찬 손을 녹인다
먹빛 바다에 마른 붓 찍어 상적에게 편지를 쓴다
쌓여 있는 책 속에서 우러나는 묵향이 방안에 가득하니 오늘은 이 향기를 모두 화선지 속에 담으리다, 다 하지 못한 말들을 이어가듯 거친 종이 잇고 이어 세한의 찬바람이 지나간 여백에 소나무와 잣나무 네 그루를 그렸다 그 사이에 내가 서 있는 듯 허름한 집 한 채 그려 넣으니, 나무를 스치는 바람소리마저 고요히 우는 듯 들리는 것은 공명통같이 휑하니 뚫린 내 가슴 탓일 것이다
밭에 핀 수선화를 농부들이 뽑아버린다 그들이 무지하다고 한들 꽃의 아름다움을 모를까 그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모두 잡초일 뿐이다 나도, 한양에 있는 저들에게는 잡초 같아, 언제 금부도사가 사약을 들고 올지 모를 일이다
가슴속 호롱불을 끄니 방 안이 어둡고 평온한데 울타리 밖 어둠 속에서 늙은 개들이 서로 권력을 지키려고 짖어대는 소리가 요란하다 정치의 속성이라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개 같아 백 년 이백 년이 흐른다 한들 그 개 같은 속성이 어디로 가겠는가
세월이 바다에 막혀 아득하기만 하다
시현실 2022.가을저자예맥 편집부출판예맥발매2022.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