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통일에 대한 생각과 의제를 모으는 청년들의 모임에 참여했었다. 모임 중에 상황극을 하는 시간이 있었다. 통일에 찬성, 반대, 유보(무관심), 제3자(외국)이라는 4가지 입장으로 나뉘어 대화를 하였다. 대화의 국면은 3대 1의 모습이었다. 통일을 찬성하는 입장이 외로운 섬이 되어버렸다. 상황극을 마친 청년들은 딱 우리 세대의 통일에 대한 이해라며 다들 공감했다. 통일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통일보다는 평화가 더 와닿는다고 말했던 한 청년의 이야기는 통일이라는 주제가 멀어져 있음을 확인케 했다.
이번에 통일의집을 탐방하며 새롭게 알게된 점은 문익환 목사가 통일을 한창 외치던 때에도 통일에 관심없는 청년들은 많았다는 것이었다. 그 때는 관심이 많고 무르익어서 통일 논의를 했던 것이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도 남북관계가 교착이라고 하지만, 그 때는 더 심했다. 문익환 목사는 결코 못갈 것 같은 상황에서 아래 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 를 쓰고 북으로 갔다.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이건 진담이라고
누가 시인이 아니랄까 봐서
터무니없는 상상력을 또 펼치는 거야
천만에 그게 아니라구 나는
이 1989년이 가기 전에 진짜 갈 거라고
가기로 결심했다구
(...)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을 현실화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 걸음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지금 보아도 놀랍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국가 간에 가능한 것이라 생각했던 통일을 민이 주체가 되어 능히 이룰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었다.
방북하여 평양 봉수교회에서 했던 설교 가운데 한마디가 "민주는 민중의 부활이요, 통일은 민족의 부활이다"였다. 당시 남의 학생/민주화운동은 민주(민중)와 통일(민족)이라는 주제를 놓고 서로 갈라서 있었다. 이 둘은 갈라설 주제가 아니라 하나로 부활하여야할 주제였음을 짚었던 것 아닐까?
(...)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 있지 않아
모란봉에 올라 대동강 흐르는 물에
가슴 적실 생각을 해보라고
거리 거리를 거닐면서 오가는 사람 손을 잡고
손바닥 온기로 회포를 푸는 거지
얼어붙었던 마음 풀어버리는 거지
난 그들을 괴뢰라고 부르지 않을 거야
그렇다고 인민이라고 부를 생각도 없어
동무라는 좋은 우리 말 있지 않아
동무라고 부르면서 열 살 스무 살 때로
돌아가는 거지
(...)
통일을 개념과 관념으로 접근하면 멀어질 수 밖에 없다. 통일을 삶과 사건의 주제로 가져오면, 나와 너의 하나됨으로부터 시작한다. 어떤 친구와 다투었다면 잘 화해하는 것이 통일이다. 어린 시절 명동에서 지냈던 마을살이가 몸에 뿌리 깊이 새겨져 있었던 문익환 목사는 사람들과 어우러지며 살며 속에 남과 북의 하나됨을 꿈꾸었고 이루어 갔다. 가장 가까운 박용길 장로와 부부이자 벗이고 동지로 살았던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
통일을 꿈꾸고 평화를 원한다면, 곁 생명들과 어우러지는 삶 경험해야한다. 통일을 일상 관계에서 선취할 수 있어야 남과 북의 하나됨은 우리 몸의 사태가 된다. 그렇게 가장 늦은 것 같은 때에 가장 좋은 통일을 이루기를 꿈꾸며 오늘을 어우렁더우렁 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