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의 빛과 그림자
2004.09.21 오늘의 일정표, 06:30분 모닝콜 07:30분 조식 08:30분 출발
호텔에 밤늦게 도착하여 잠자리에 든 시간은 밤1시가 지나서였다.
여행에 대한 설레임 때문이었는지 겨우 5시간을 자고 일어났지만 전혀 피곤하지 않다.
밤사이에 아내도 컨디션을 완전히 회복하였고, 따라서 내 기분도 상쾌해 졌다.
모닝콜 해주기로한 시간보다 30분 먼저 일어나니 일정이 한결 여유롭다.
습관처럼 호텔 방의 창문을 열고 밖을 바라 보는데
독일의 동트는 정경이 너무나 낭만적이다.
(유럽에 온것이 틀림없구나...)
호텔에서 제공하는 아침식사는 어디에서나 거의 비슷했다.
서너 종류의 빵에 쥬스와 커피 그리고 햄과 치즈가 주메뉴다.
아내와 나는 빵을 좋아 하기에 식사에 대한 불만은 전혀 없었다.
까다롭지 않은 식성은 여행하는 사람으로서는 매우 다행스런 일이다.
오전8:30분, 예정대로 드디어 본격적인 투어가 시작되었다.
우리들의 전용버스는 쭉 뻗은 아우토반을 통해 북동쪽으로 달려가고 있다.
브레나에서 베를린으로 가는 길이다.
속도제한이 없는 아우토반이지만 관광버스는 90km이상 속력을 내지 않는다.
우리나라 처럼 도로 곳곳에 과속감시 카메라가 설치된 것도 아니고
교통경찰이 단속하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속도를 어기는 법은 거의 없다.
그것은 항공기의 블랙박스처럼 CD만한 크기의 페이퍼에 그 날의 운행기록들이
빠짐없이 기록되기 때문에 불시검사를 받게 될 경우 발뺌을 할 수가 없어서다.
오전10:25분, 브레나를 떠난지 2시간이 가까워 질 무렵에 버스는 베를린시내에
접어들고 있다.
베르린의 도로는 비교적 소통이 잘되었으나 가끔은 대도시답게 정체되기도 했다.
베를린(Berlin)은 엘베 강의 지류와 슈프레 강의 합류 점에 있는
독일의 수도이자 하나의 주다. 독일의 북동부에 위치하는데,
인구는 약 347만(1993)정도이며, 면적은 883㎢로 서울의 1.4배가 된다.
면적으로 볼 때에는 로스엔젤레스,런던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에 해당한다.
베를린(Bearlin)은 새끼 곰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일찌기 교역 및 지리상으로 동서의 중심축 위에 걸쳐 있다는 이점 때문에
15세기에 브란덴부르크 제국의 수도가 된 이래
18세기의 프로이센 왕국을 거쳐,
19세기에는 비스마르크의 독일 제2 제국과 히틀러의 제3 제국의 수도로써
오랫동안 독일 및 세계 역사의 중심지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베를린의 옛 영광은 히틀러와 함께 1945년에 끝났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베를린은 페허가 되었으며 포츠담협정에 따라
시의 중앙부에 있는 브란덴부르크문을 경계로 동베를린은 소련이,
서베를린은 미국·영국·프랑스의 3개국이 분할 점령, 관리하게되었다.
그 후,독일은 남과 북으로 갈라진 우리나라와 같이 이념이 다른
두개의 정부가 동과 서로 각각 들어서게 되었다.
베를린은 둘로 갈라진 독일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했다.
1949년10월,동(東)베를린은 동독의 수도로 지정되었고,
1949년 5월,서(西)베를린은 지리적으로 동독의 영토에 둘러싸인 채
서독의 주(州)에 준하는 도시가되었다.
이런 특이한 상황은 1961년 8월, 동독이 동·서베를린의 경계선상에
콘크리트로 장벽을 쌓고 주민의 이동를 차단하기에 이르렀고,
40년이상,동서 양진영의 끊임없는 대치 현장으로 만들었다.
그러나,1989년말에 일어난 동독 공산주의 정권의 급작스런 몰락은
1989년 11월 9일 마침내 베를린 장벽을 허물어뜨리고 예기치 않게
베를린이 다시 전체 독일의 수도가 될 수 있는 전기를 갖게 했다.
통일 독일의 수도가 된 베를린은 주요 행정기관들이 이주하면서 현대적인
건물들이 들어서게 되고 도시는 활력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지금도 시내 곳곳에서 건설 공사가 이어지고 있었으며
유럽의 중심 도시로서 점점 부상하고 있는 중이다.
베를린의 시내에 들어선 이후 버스가 도착한 곳은 중앙역인 초역앞 이었다.
가까이에 동물원이 있는 곳 이었다.
광장에 버스가 멈추자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한 젊은 청년이 버스에 올라 와
"안녕 하세요? 현지가이드 입니다. 밖에 바람이 거세니 모자가 날아가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한다.
(비만 안 오면 다행 이지,바람 정도쯤이야..)
아직 상황판단이 안된 나는 가이드의 말 쯤은 안중에 없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차에서 내렸다.
베를린은 넓은 숲과 많은 호수를 안고 있어‘베를리너 루프트(베를린의 공기)’라고
노래로 부를 정도로 공기가 맑다고 하던데
이 기회에 그 유명한 베를린공기나 음미 해보자 하면서...
그러나 베를린은 모래가 섞인 차거운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다.
독일의 일기를 우리나라 가을정도로 여겨 가벼운 옷차림들을 한 우리들은
뜻밖의 쌀쌀한 날씨속에서 몸을 잔뜩 움 추린 채
가이드를 따라 첫 번째 볼거리인 카이저 빌헬름교회로 이동한다.
카이저 빌헬름 교회(Kaiser Wilhelm Gedaechtniskirche)는
네오로마네스크양식의 기념교회로 황제 빌헬름 1세를 기념하기 위해
1891-1895년에 세워진 교회였다.
2차 세계대전 중인 1949년 11월 23일 연합군에게 폭격을 받아 본래 모습은 사라지고
지금은 63m 높이의 종탑 부분만 남은 상태로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전후에 다시 복구하려 했으나 시민들의 반대로 망가진 채 그냥 두고
그 옆에 8각의 건물을 세워 예배당으로 쓰고 있었다.
후세들에게 전쟁의 참상을 전해주기 위한 의도인데 교회 안에는 조그만 박물관이
있었으며,다각형의 새로 지어진 교회당 건물과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새 교회 안에는 정면중앙에 있는 파란색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돋보였으나
실내가 너무 어두워 사진을 제대로 찍지 못했다.
교회 옆 광장에서 약간의 자유시간을 가진 후, 초역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버스로 되돌아와 브란덴 부르크 문을 향해 출발한다.
가이드가 차창 밖으로 보이는 건물들과 장소에 대하여 설명을 해주는 사이
시민들이 일광욕을 즐긴다는 푸르고 넓은 공원,티어가르텐(Tiergarten)을 지나
베를린의 랜드마크인 전승기념탑 옆을 스쳐가고 있다.
전승기념탑은 황금빛 천사가 날아갈 듯한 모습으로 사뿐히 꼭대기에 내려
앉아 있었는데 1864년에서 1873년에 걸쳐 세워진 것이다.
프로이센이 덴마크 (1864), 오스트리아(1866),프랑스(1870/71)와의 전투에서
각각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탑이다.
오전 11:50분,
마침내 동서분단과 통일독일의 상징물인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이르렀다.
매서운 날씨에 쓴 맛을 톡톡히 본 아내는 웃도리를 겨울용 잠바로 갈아입고
단단히 무장한 채 차에서 내린다.
많은 관광객들이 브란덴부르크 문으로 건너가기 위해 넓은 광장의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가이드가 바로 코앞에 있는 베를린 장벽을 철거한 자리를 표시한 흔적을 가르키며
"여러분은 지금 서독에 계시고 저 지점을 통과하면 바로 동독땅을 밟게 됩니다"한다.
신호가 바뀌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순간 우리는 옛 동독 땅으로 진입하게 됬는데
브란덴부르크 문은 그 곳에 서있다.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er Tor)은 서울의 관문인 남대문처럼 베를린시로
들어오는 관문이었으며 1788∼91년에 카를 G. 랑간스에 의해 만들어 졌다고 한다.
아테네의 아크로 폴리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의 프로필라이아를 본 땄으며
6 개의 둥그런 도리아식 기둥을 나열한 독일 고전주의 양식의 대표작이다.
브란덴부르크 문을 더 돋보이게 하는 문 위의 조각품은, 명 조각가 J.G. 샤도가
1789년에서부터 1794년까지 5년에 걸쳐 만들어다고 한다.
50톤 이상의 동을 주조하여 완성시켰는데
올리브 가지를 든 여신이 고대 로마의 사두마차를 타고있는 모습이다.
이 여신상도 제 2 차 세계대전 때 재해를 입어 파손되었으나
1958년에 구리로 다시 주조되었다고 한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원래는 과거 프로이센의 개선문으로
도시의 영광과 평화를 상징하는 표지였으나
동,서 베를린 경계선위에 놓여있게 되자 동독이 둥그렇게 장벽을 둘러쳤던
곳으로 분단시기에는 동서분할의 상징이 되었으며
통일 당시에는 동, 서 베를린 시민들이 이 장벽을 뛰어 넘어 만나는 장면이
세계 전역으로 번져 나가 통일의 상징으로 바뀌어 지기도 했다.
베를린은 북위 52.5°에 위치하고 있어 북위38°이남에 살고 있는
우리나라보다 가을이 짧고 추위도 빨리 오는 듯 하다.
한창 멋 부릴 나이에 있는 젊고 예쁜 우리 아가씨들,
얇은 가을 옷을 입은 채 두툼한 옷차림의 아내를 무척 부러워한다.
해외여행에 있어 특별히 신경 써야 할 것 중에
현지날씨에 대한 정보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본다.
내가 이 번 동유럽여행을 준비하며 추위에 대해 미리 대비하게 된 것은
서유럽여행시에 추운 날씨에 크게 혼이 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작년 9월 중순경에 동유럽을 여행하고 노랑풍선에 여행기를 남기신 박경숙님의
글을 많이 참고 하였으며 그래도 9월이 춥다는 말이 믿기 어려워 인터넷카페를
검색 중 "동유럽의 현재 날씨는 어떠한가요?" 라는 질문에 현지에 계신분이
꼬리글에,
"i fill very cold.. ban pal nonononononononononono gin pal zamba !!!!!good haha"
라는 재미있는 답글을 남긴 것을 본 것이 결정적이었다.
오후12:30분,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30분 정도의 자유시간을 보내고 난 후
베를린장벽이 남아있는 현장으로 도착했다.
장벽은 잿빛 시멘트 콘크리트담으로 길 따라 흉물스럽게 늘어 서 있었다.
장벽아래에는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여러나라에서 온 관광객들이
서로 섞여 구경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통일만 되면 비무장지대가 이처럼 관광지로 변할 텐데......
1989년에 장벽은 무너지고 통일은 되었으나,
독일의 현실은 어두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것을 알 수 있었다.
통일 이후 서독 국민들은 살기가 더 어려워졌다고 투덜거린다고 한다.
브란덴부르크 문을 경계로 서베를린지역은 비교적 깨끗하고 현대적 건물이
많이 들어서 있었으나 동 베를린지역은 여기저기에서 한창 공사 중이었다.
통일이 되고 낙후된 동독지역을 개발하고 복구하는데는 막대한 자금이 소요 될수
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 돈을 모두 서독 쪽의 국민들이 부담하게 된 것이다.
막연히 통일을 반가워하던 서독인들은 통일부담금이 예상보다 높아지자 자연히
피해의식이 생기게 되고,
동독인들은 그 들대로 자본주의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실업률만 계속 늘어나는
가운데 차츰 불만이 쌓여 가고 있었다.
차라리 다시 분리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고 한다.
마침 귀국한 다음날의 동아일보에 이에 대한 기사가 나왔는데
분리를 원하는 독일국민들이 24%나 된다고 한다.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독일은 우리 남.북한 통일에 타산지석이다.
지금부터라도 철저히 대비하여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 된다.
오후1:00분, 우리들은 한국식당 호도리에서 육계장을 먹고 있다.
약 2시간에 걸친 짧은 베를린 관광을 모두 마친 뒤였다.
육계장은 한국에서와는 비할 수없지만 맛깔스런 묵은 김치가
뜻밖에도 머나먼 독일에서 우리의 입맛을 돋우고 있었다.
오후1:40분, 현지가이드와 작별을 하고 베를린을 뒤로한 채 다시남쪽으로 내려간다.
목표는 체코의 국경도시 데신이다.
오랜만에 마이크를 잡은 권순옥양이 데신으로 가는 길에 잠깐 틈을 내어,
여행 일정표에는 없지만 무척 아름다운 도시 드레스덴을 관광시켜 주겠다고 했다.
모두들 환호 속에 박수를 쳐준다.
드레스덴은 한마디로 다시 부활하는 도시라고 한다.
나로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생소한 도시였다.
그 곳으로의 여행은 권순옥양이, 아니 노랑풍선이 우리에게 베푸는 보너스인 셈이다.
횡재한 기분으로 기대 속에 지금 드레스덴으로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