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曲阜(취푸)/공묘(孔庙) NO.3
십상비정을 지나면 공자를 모신 사당인 대성전으로 들어갈 수 있다.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은 중앙에 대성문(大成门)을 중심으로 동쪽에 금성문(金声门), 서쪽에 옥진문(玉振门)을 두고 있는데, 이는 맹자가 언급한 '金声玉振, 재주와 지혜가 충분히 조화를 갖추고 있다'을 뜻하며, 이는 공자의 완성된 인격을 가르치는 말이다. 공자를 모신 대성전 정문인 대성문(大成门, Dacheng Gate). 대성문(大成门)은 송나라 숭녕(崇宁) 3년(114)에 처음 세워졌다. '크게 성공한다.'는 의미를 가진 대성문(大成门) 동쪽에 금성문(金声门), 서쪽에 옥진(玉振门)을 두고 있는데, 현재의 건물은 청나라 옹정제때 화재로 불타버린 것을 중건한 것이라 한다. 대성문에는 공묘에서만 볼 수 있는 두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물고 하늘을 솟아오른 모습을 조각한 기둥이 있다. 현재의 건물은 청나라 옹정제때 화재로 불타버린 것을 중건한 것으로 옹정제가 대성문, 금성문, 옥진문 현판과 주련을 직접 썼다고 한다. 금성문(金声门)은 대성문과 함께 송나라 숭녕3년(1104)에 처음 세워졌다. 맹자에 언급된 공자의 완벽한 인격체를 뜻하는 금성옥진(金声玉振)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 화재로 불타버린 후 청나라 옹정제 2년(1724)에 중건되었다 공자가 손수 심은 전나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선사수식회(先师手植桧, The Hui Tree planted by master). 전설에 따르면 이곳의 전나무는 공자가 직접 심었다고 전해지면 여러차례 죽고 새로 났으며, 현재의 것은 청나라 옹정제때인 1732년에 새로 난 것이라고 한다. 대성문 기둥은 용이 감싸고 있는 형태로 조각해 놓고 있는데, 이는 이곳 공묘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라 한다. 기둥에 새겨진 용은 하나의 진주를 함께 물고 하늘로 솟아오른 모습을 하고 있으며 '이룡희주二龙戏珠'라 부른다 대성문 계단 답도 행단 앞에 세워져 있는 석물. 밤에 횃불을 밝히는 정료대로 생각된다 행단(杏壇) 곡부(曲阜) 공묘에서는 대성전 앞 마당에 행단이 세워져 있는데, 중국 송나라때 단을 쌓았으며, 금나라때에 오늘날과 같은 정자를 크게 세웠다고 한다. 현재의 행단은 명나라때인 1389년에 크게 중건한 것이라고 한다. 건물은 대리석 난간이 있는 단을 쌓고 그 위에 앞면 3칸, 4각형을 하고 있으며 지붕은 유리기와를 얹은 2층지붕을 하고 있다. 행단 내부에는 청나라 건륭제가 세운 행단찬비(杏壇贊碑)가 세워져 있다. 행단은 공자가 살구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으로 전해지면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는 않다.우리나라에 유학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어떤 연유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성균관 또는 향교에 은행나무를 심고 강당인 명륜당을 세워 강학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춘추전국시대 공자가 살았던 집에 사당을 세운 이래로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공묘는 중국 각지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동아시아지역에 세워진 공자묘의 모범이 되는 곳이지만 공간배치가 다른 곳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북경 국자감, 성균관, 향교 등은 대성전이 있는 제향공간과 명륜당이 있는 강학공간이 분리되어 전학후묘, 전묘후학, 동묘서학 등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지만, 곡부(曲阜) 공묘는 대성전과 행단이 같은 공간에 배치되어 있고, 서적 등을 보관하던 규문각이 앞쪽에 위치하고 있다. 행단은 공자가 후학들을 가르쳤다고 전해지는 장소에 세워졌다. 현재의 행단은 송왕조때 세워졌으며, 살구나무가 이곳에 심어졌다고 한다. 정자건물은 금나라때 처음 세워졌고, 명나라때인 1389년에 중건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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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