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 全善(전선)하신 천주 이 세상 환난 병고를 막지 않으심은 어쩜 이뇨?
A : 이는 세상 사람에게 죄를 보속(補贖)하며,
공(功천)을 세울 기회를 주시려 하심이니라.
하느님의 선하심과 관련하여 결코 떨쳐버릴 수 없는 질문이 하나있다.
선하신 하느님이라면 왜 세상 안에 환난과 병고를 허락하시고 인간이 고통 중에
머물도록 놓아두시는가 하는 문제이다. 인간은 고통 중에서도 그 연유를 모르므로
하느님의 선하심을 믿기가 더욱 어렵다. 선하신 하느님은 선한 세상을 창조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환난과 고통이 끊이질 않고 병고 또한 깊어 괴로움이 가득하니,
도저히 선한 세상이라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죄를 지어 스스로 불행을 짊어졌고 명멸한 존재로 전락하였음을 인정한다.
고통과 괴로움이 자신에게서 나왔고 그간의 형세를 보아도 별반 나아진 것이 없다.
인생은 어차피 고통의 바다요, 시달림 속에 애태워야 하는 어두운 밤이다.
연민에 울고 사라지고 말 소멸의 순간 때문에 시름이 깊어간다. 속절없는 아쉬움에
때론 한숨짓고 지나온 길 돌이켜 보며 눈물짓는다. 흘러간 지난날이 주마등 되어
돌아올 때면 안타까운 마음 그지없으나 그래도 간절한 소망이 솟아오르니 선하신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싶다.
하느님은 인간의 물음에 일일이 대답하지 않으신다. 당신은 길을 제시할 뿐
사람과의 토론을 원치 않으신다. 사람들의 애타는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설명해서 이해될 것은 아니다. 인간의 조건은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영역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회상할 수 없는 그 옛날의 원죄가 있고
지금도 어찌할 수 없는 거부의 악성을 몸속에 지니고 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현실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길을 향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일뿐이다.
비탄에 빠진 자가 원망 속에 원인을 캔다한들 도움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미 깨어진 그릇을 다시 만들 수는 없다. 할 수 있다면 그곳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요,
헤어진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다.
인생의 환난병고는 하느님 탓이 아니다. 하느님께 받은 은총을 사람이 그르친 탓이다.
하느님은 여전히 선하시지만 사람은 자기 탓으로 죄 속에서 몸부림 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하느님을 만났다. 각자의 고통과 괴로움을 가지고 그분 앞에 나섰다.
병고를 가지고 도우심의 손길을 청했다. 그러나 그분 앞에 섰을 때 사람들은 자비만을
구할 수 있었을 뿐 변명이나 항변은 할 수 없었다. 하느님 앞의 인간이란 바로 죄인
그것일 뿐이다. 예수님을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베드로마저도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하는 말만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선하신 하느님은 사람들에게 당신의 선함을 주시고자 하신다. 그들이 죄의 멍에를
벗어버리고 선업에의 길로 들어가며 구원받기에 적합한자 되기를 원하신다.
실로 죄 된 세상에서는 선한 세상을 상상할 수 없지만 은총에 힘입으면 가능하다.
그래서 복음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마태 4,17).
지금은 분명 회개의 때이지 한탄의 때가 아니다. 죄를 보속하고 구원의 공로를 찾아
세울 때이다. 그 일을 위해서 예수님은 세상에 오셨고 사람들을 찾으셨다.
선하신 하느님께서 불쌍한 이 세상, 죄 된 세상을 잊지 않으신 것이다.
전주교구
최용준 안토니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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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하신 하느님!! 저는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