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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이 있다고 설명할 뿐이다. 그러나 실은 비로소 깨닫는다는 것이 따로 없고 깨닫지 아니함도 없으므로 마침내 평등하다. 그러므로 이 한 마음에는 언제나 진여(眞如)와 생멸(生滅)의 두 가지 문을 갖추고 있다. |
또 진망(眞妄)에는 저마다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진에는 불변(不變)과 수연(隨緣)의 두 가지 뜻이 있고, 둘째 망에는 체공(體空)과 성사(成事)의 두 가지 뜻이 있다. 진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공(空)한 망의 체는 진여의 문이 되고, 진은 연을 따르기 때문에 망식(妄識)은 일을 이루어서[成事] 생멸의 문이 된다. 생멸이 곧 진여이기 때문에 모든 경에서는 ‘부처가 없고 중생이 없고 본래 열반이며 항상 고요히 사라진[寂滅] 모양이다’라고 설명한다. 또 진여가 곧 생멸이기 때문에 경에서 이르기를 ‘법신(法身)이 다섯 갈래[五道]에 헤매면 이름을 중생이라 한다’라고 했다.” |
이미 미혹함ㆍ깨침과 범부ㆍ성인이 생멸의 문에 있음을 알았으므로 이제 이 문에서 범부와 성인이란 두 모양을 갖추어 나타낸다. 곧 진과 망이 화합하였으되 동일함이 아니고 다름이 아니므로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한다. 이 식은 범부에 있되 본래 깨달음[覺]과 깨닫지 않음[不覺]의 두 가지 뜻이 있다. 깨달음은 바로 3승(乘)의 현성(賢聖)의 근본이요 깨닫지 않음은 바로 6도(道) 범부의 근본이다. |
지금 이 불각의 마음을 추구하건대 체(體)가 없으면 참된 깨달음[眞覺]의 성품이 앞에 나타난다. |
『보적경(寶積經)』에서 말하였다. |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살은 이렇게 마음을 구한다. 어느 것이 곧 마음인가? 탐욕하는 것이냐, 성을 내는 것이냐, 어리석은 것이냐, 과거ㆍ미래ㆍ현재의 것이냐? 만약 마음이 과거라면 이것은 다 없어졌을 것이요, 만약 마음이 미래라면 미래는 아직 이르지 않았으며, 만약 마음이 현재라면 머무른 것이 없다. 이 마음은 안이 아니고 바깥이 아니며, 또한 중간도 아니다. 이 마음은 빛이 없고 모양도 없고 상대도 없고 인식[識]도 없고 아는 것[知]도 없고 머무름도 없고 처소도 없다. |
이러한 마음은 시방 3세의 모든 부처님들이 이미 보지 못하셨고 지금도 보지 못하시며 장차도 보지 못하실 것이다. 만약 모든 부처님들이 과거ㆍ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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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ㆍ현재에 보지 못한 바라면 어떻게 있는 것이 되는가? 다만 뒤바뀐 생각 때문에 마음은 모든 법의 갖가지 차별된 것을 내었으니 이 마음은 마치 허깨비와 같으며, 기억하고 생각하는 분별 때문에 갖가지 업(業)을 일으키고 갖가지 몸을 받을 뿐이다. |
이러하니라. 가섭(迦葉)아, 이 마음의 모양을 구하여도 얻을 수 없나니, 만약 얻을 수 없다면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아니며, 만약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아니라면 3세를 벗어났으며, 만약 세상을 벗어났다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만약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면 곧 이것은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만약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면 곧 이것은 성품이 없으며, 만약 성품이 없다면 곧 이것은 남이 없으며, 만약 남이 없다면 곧 이것은 없어짐이 없으며, 만약 없어짐이 없다면 여의는 바가 없으며, 만약 여의는 바가 없다면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물러나는 것도 없고 생기는 것도 없으며, 만약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물러나는 것도 없고 생기는 것도 없으면 행업(行業)도 없으며, 만약 행업도 없으면 이것은 무위(無爲)이며, 만약 무위라면 이것은 온갖 성인들의 근본이니라’라고 하셨다.” |
『지세경(持世經)』에서 말하였다. |
“보살은 그때 생각하였다. |
‘세간은 아주 미치고 어리석구나. 이른바 기억하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식(識)으로부터 세간을 일으키는구나. 마음[心]ㆍ뜻[意]ㆍ의식[識]이 합하거니와 3계(界)는 모두가 곧 식일 뿐이다. 이 마음과 뜻과 의식 또한 형상이 없고 장소도 없으며 법의 안에 있지도 아니하고 법의 바깥에 있지도 않거늘 범부가 허망과 상응한 것에 속박을 당한 까닭에 식음(識陰) 가운데에서 나와 내 것[我所]에 탐착한다.’” |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에서 말하기를 “모든 명색(名色)은 이 어리석은 마음으로 분별하는 것이며 어리석은 마음으로 모든 법을 분별하는지라 다시는 다른 일이 없나니, 명색에서 벗어나 법이 이와 같음을 알아 글과 말을 따르지 않고 마음과 마음이 의(義)에서 나[我]를 분별하지 아니한다”고 했다. |
논석(論釋)에 이르기를 “이것은 방편관(方便觀) 중에 두 가지가 있음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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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힌 것이다. 첫째는 유식심사(唯識尋思)를 밝혔다. ‘다시는 명색에서 벗어날 다른 일이 없다’고 한 것 중 명(名)은 4온(蘊)을 말하고, 색(色)은 바로 색온(色蘊)이다. 모든 불상응(不相應)은 모두가 가정으로 세우는 것이므로 이 명색을 여의고서 달리 다른 체(體)가 없다. 그러므로 모든 유위(有爲)의 일은 모두가 명색에 소속된 것이니, 이러한 모든 법은 마음만으로 짓는 것이므로 마음을 여의면 경계가 없으며 경계를 여의면 경계가 없으므로, 이와 같은 것을 유식심사라고 한다. 둘째는 여실지(如實智)를 나타낸다. ‘법이 이와 같음을 알아 글과 말에 따르지 아니한다’라고 한 이것은 심사(尋思)로 이끄는 바 여실지라 하기 때문이다. ‘마음과 마음이 의(義)에서 나를 분별하지 아니한다’라고 한 것은, 이 의(義)가 심사로 이끄는 여실지이기 때문이다. 인아(人我)와 법아(法我)의 두 가지 아(我)는 모두가 의(義)가 없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에서 분별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
이 진망(眞妄)의 두 가지 마음과 정분(情分)의 두 가지는 지혜로 알면 하나일 뿐이니, 하나거나 둘이라 함이 함께 없어져야 비로소 종경(宗鏡)에 든다. |
그 까닭에 『���유마경(維摩經)』에서 묘비보살(妙臂菩薩)이 말하기를 “보살의 마음과 성문의 마음은 두 가지이나, 마음의 모양은 공하여 마치 허깨비와 같은 줄 관(觀)하면 보살의 마음도 없고 성문의 마음도 없는 것이니, 이것이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든 것입니다”라고 한 것이다. |
그러므로 이미 마음에 나타나는 마음이 없으면 법에 나타나는 법이 없는 줄 알 것이다. 왜냐 하면 온갖 경계는 생각에 따라서 생기기 때문이니, 생각이 이미 본래가 공이거늘 법이 또 어찌 있겠는가? |
『대법거다라니경(大法矩陀羅尼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교시가(憍尸迦)야, 어떤 사람이 와서 묻기를 금이 대중들이 먹을 음식 거리를 만들려면 공이 얼마나 드느냐?>고 하면 너는 어떻게 대답하겠느냐?’ |
하늘 제석(帝釋)이 말하였다. |
‘세존이시여, 저는 대답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세존이시여, 지금 저의 이곳 삼십삼천(三十三天)에서는 필요한 옷과 음식 거리들은 생각하기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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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 앞에 나타나는데 조작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교시가야, 온갖 법 모두가 그러하여 모두가 마음속에 머무르므로 생각한 바의 때를 따라서 이내 성취하게 되느니라. 교시가야, 마치 난생(卵生)의 모든 중생들이 마음의 생각만으로 이내 받아 나는 것처럼 온갖 모든 법도 그러하여 모든 마음에서 생각함으로 말미암아 법이 이내 앞에 나타나느니라. 교시가야, 온갖 습생(濕生)의 무리인 물고기ㆍ자라ㆍ규룡(虯龍)과 지미의라(坁彌宜羅)들의 모두는 난생(卵生)에 속해 있으므로 이들이 혹은 1유순(由旬)을 가기도 하고, 혹은 2유순, 혹은 3, 4유순, 혹은 7유순을 넘어 가기도 하는데 그 땅에 도달한 뒤에는 편안히 있으면서 알을 까되 고달프지 않게 하기 때문에 잘 성숙시키는 것처럼, 교시가야, 이 삼장(三藏)의 교(敎)도 그러하여 기억하고 생각하는 때를 따라 그 업이 앞에 나타나며, 차례로 어지럽지 아니하고 계속 끊이지 않으면서 그 글귀의 뜻과 함께 화합하고 상응하느니라.’” |
또 『불지론(佛地論)』에서 이르기를 “삼십삼천에는 하나의 잡림(雜林)이 있다. 모든 하늘들의 화합된 복(福)의 힘으로 감통하므로 모든 하늘들로 하여금 이 숲에 있지 않게 하며 궁전 등의 일과 함께 즐거움 따위를 받는 데에는 훌륭함과 열등함에 다름이 있고 나와 내 것이 있어서 차별되게 수용하거니와, 만약 이 숲에 있게 되면 일이거나 받는 것이나 간에 도무지 훌륭함과 열등함이 없고 모두가 똑같이 훌륭하며 나와 내 것이 없이 화합하여 수용한다. 평등하고 화합하여 수용하게 하므로, 이름이 잡림이다”라고 했다. |
이 여러 하늘들은 저마다 평등하고 화합된 복업(福業)의 뛰어난 힘 때문에 그 여러 하늘들의 아뢰야식(阿賴耶識)으로 하여금 이 숲의 똑같은 곳, 똑같은 시기, 똑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나타나게 할 것이며, 이 잡림의 뛰어난 힘 때문에 그 전식(轉識)으로 하여금 역시 똑같이 변화하여 나타나게 한 것이니, 비록 저마다 수용한다 하더라도 구별이 없다고 한다. |
그러므로 만약 모든 법이 모두가 마음으로 생각함에서 생기는 줄 통달하면, 곧 세속의 문을 쫓되 이것은 성행(聖行)의 것이다. |
『무진의보살경(無盡意菩薩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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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사리불(舍利佛)이 무진의(無盡意)에게 물었다. |
‘선남자여, 어디서 오십니까? 부처님 명호는 무엇이며 세계의 이름은 무엇이며 여기서 얼마나 됩니까?’ |
무진의가 말하였다. |
‘사리불이여, 온다는 생각이 있습니까?’ |
사리불이 말하였다. |
‘선남자여, 저는 생각을 알고 있습니다.’ |
무진의가 말하였다. |
‘만약 생각을 안다면 두 가지 모양이 없어야 할 터인데, 무엇 때문에 묻기를 디서 오느냐>고 합니까? 사리불이여, 오고 감이 있으면 화합한다는 뜻이 되며, 화합하는 모양 같은 것은 바로 합하고 합하지 않음이 없으며, 합하고 합하지 않음이 없으면 곧 가거나 오거나 하지 아니하며, 가거나 오지 아니하면 이것이 성행의 것입니다.’” |
『불장경(佛藏經)』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리불아, 생각하는 바에 따라 일으키는 온갖 생각들도 모두가 곧 삿된 소견이니라. 사리불아, 따라서 아무 것도 없으면 거친 생각[覺]도 없고 세밀한 생각[觀]도 없으며 남도 없고 없어짐도 없나니, 이를 통달하면 염불(念佛)이라 이름하느니라”고 하셨다. |
『해룡왕경(海龍王經)』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대왕이여, 온갖 모든 법은 모두가 생각함으로부터 일어나며 그 짓는 바에 따라 각각 모두가 이루어지거니와 모든 법은 머무름도 없고 있는 곳도 없느니라”고 하셨다. |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말하기를 “보살은 어떻게 심념처(心念處)를 관하느냐 하면, 보살의 안팎의 마음을 자세히 살핀다. 이 안[內]의 마음에는 세 가지 모양이 있나니, 나고[生]ㆍ머무르고[住]ㆍ없어지는[滅] 것이다. 그는 생각하기를 ‘이 마음은 어디로부터 온 곳이 없고 사라져도 간 데가 없으며 안팎의 인연을 따라 화합하여 났을 뿐이다. 이 마음은 정해진 진실한 모양이 없고 실로 나고 머무르고 없어지는 것도 없으며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세상 안에도 있지 않다. 이 마음은 안에도 있지 않고 바깥에도 있지 아니하며 중간에도 있지 아니하다. 이 마음은 또한 성품[性]이 없고 모양[相]이 없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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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것도 없고 나게 하는 것도 없다. 바깥에는 갖가지로 여럿이 섞인 6진(塵)의 인연이 있고, 안에는 뒤바뀐 마음의 생각으로 나고 없어지는 것이 계속되므로, 억지로 이름 붙여 마음이라 한다. 이와 같은 마음속은 실로 마음의 모양을 얻을 수 없고, 이 마음 성품으로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언제나 이것은 깨끗한 모양인데 객진번뇌(客塵煩惱)가 서로 달라붙었기 때문에 깨끗하지 못한 마음이라 한다. 마음은 스스로는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마음은 마음 모양이 공하기 때문이다. 이 마음은 근본이나 끝에 진실한 법이 없고, 이 마음은 모든 법과 더불어 합함도 없고 흩어짐도 없으며, 전제(前際)ㆍ후제(後際)ㆍ중제(中際)도 없고 빛깔도 없고 형용도 없고 상대도 없으며, 뒤바뀌고 거짓으로 생길 뿐이다. 이 마음은 공하여 나가 없고 내 것도 없으며 항상함이 없고 진실도 없나니, 이것을 수순하는 마음[隨順心]이라고 한다. 마음의 모양이 남이 없음을 관하여 알면 남이 없는 법[無生法] 가운데에 든다. 왜냐 하면 이 마음은 남이 없고 성품이 없고 모양이 없음을 지혜로운 이는 능히 알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이가 비록 이 마음의 생멸하는 모양을 관한다 하더라도 또 진실로 생멸하는 법을 얻지 못하며, 더러움과 깨끗함을 분별하지 않으면서 마음의 청정함을 얻는다. 이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에 객진번뇌(客塵煩惱)에 물이 들지 않는다고 한다”고 했다. |
이렇게 안의 마음을 관하고 바깥 마음을 관하며 안팎의 마음을 관하는 것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법은 본래 잇지 아니하고 마음으로 인하여 본래 나며 생각을 여의면 이루어질 수 있는 법이 있고 분별을 제거하면 티끌만큼도 나타날 만한 것이 없는 줄 알 것이다. |
또 돌이켜 생각과 분별이 마침내 남이 없는 줄 관하면 3제(際)를 따라 구하고 구하여도 보이지 아니하고 시방을 향하여 찾고 찾아도 자취가 없다. 이미 능히 일으키는[能起] 마음이 없다면, 또한 사라질 바[所滅] 자취도 없다. 일으킴과 사라짐이 함께 떠나면 떠날 바도 공(空)하여 마음과 경계가 환히 트이는 것을 견도(見道)라고 한다. |
견도 안에서 그를 상대(相對)하면 참됨과 허망함[眞妄]이 저절로 녹고, 그를 대치(對治)하면 능(能)과 소(所)가 모두 끊어진다. 능과 소가 다하는 곳에서는 저절로 성불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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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론(華嚴論)』에서는 “이 경에서 ‘조그마한 방편을 가지고서도 빨리 보리(菩提)를 얻음은, 권교(權敎)의 보살이 같이 하는 일이어도 같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능증(能證)과 소증(所證)을 세웠다. 한 생각 동안에도 능소가 없고 능소가 다한 곳을 정각(正覺)이라 한다. 또한 소승(小乘)에 능소가 소멸한 것과는 같지 않나니, 능소가 본래 움직임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
이것이야말로 법성(法性)에 맡겼기 때문이며, 움직임과 고요함이 모두가 평등하여 본래 지혜[本智]는 움직임과 고요함이 없기 때문이다. 망령되이 움직인 것이라 하여 어리석은 범부가 깨닫지 못하고서 움직임을 버리고 고요함을 구하며 큰 고생을 한다. |
그러므로 『유마경(維摩經)』에서 이르기를 “5수음(受陰)을 통달하면 이 괴로움[苦]의 의미이다”고 했다. 소승에게 기뻐함과 싫어함이 있기 때문에 곧 괴로움이 생기는 것이다. |
[문] 여기서 설명하는 진심과 망심의 두 가지 마음은 곧 법상종의 것인가, 법성종의 것인가? |
[답] 『화엄연의(華嚴演義)』에서 말한 것을 준하건대, 논(論)에 말한 “3계(界)는 허망하며, 이것은 한 마음일 뿐이다”라고 한 것에서 만약 3계의 허망함을 취하면 곧 이것은 소작(所作)이라 세제(世諦)에 속하지만, 지금은 능작(能作)을 취하여 제일의(第一義)로 삼는다. 논(論)의 해석은 바로 능작일 뿐이다. |
이제 경에서 “3계(界)는 오직 마음이 전(轉)한 것이다”고 한 것은 능ㆍ소에 다 통한다. 그러나 능소에는 두 가지가 있다. 만약 법성종 안에서 제일의로써 연(緣)을 따라 있음[有]을 이룬다면 곧 능작이 되고 온갖 마음과 경계는 모두 소작에 통하는 것이니, 부사의훈(不思議熏)과 부사의변(不思議變)은 바로 현식(現識)의 인(因)이기 때문이다. |
만약 법상종의 제일의의 마음이라면, 이것은 “소미(所迷)일 뿐이요 능작이 아니다. 삼능변(三能變)이 있는데 제8식(識) 등을 말한다”고 했다. |
『유식론(唯識論)』에서 이르기를 “또 다시 뜻이 있나니, 대승경(大乘經) 중에서는 ‘3계는 오직 마음일 뿐[唯心]이다’고 하였는데 이 마음일 뿐이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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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 안의 마음이 있을 뿐이요 빛깔[色]ㆍ냄새[香] 등의 바깥 모든 경계는 없다는 것이다”고 했다. |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십지경(十地經)』에서는 “3계는 허망하며, 이것은 한 마음으로 지은 것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마음[心]과 뜻[意]과 의식[識] 및 요별(了別) 등의 이러한 네 가지 법은, 뜻은 하나로되 이름이 다른 것이니, 이것은 상응심(相應心)에 의한 설명이요, 불상응심(不相應心)에 의한 설명이 아니다. |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상응심이다. 이른바 온갖 번뇌ㆍ결사(結使)ㆍ수(受)ㆍ상(想)ㆍ행(行) 등은 모두가 마음과 상응한 것이니, 그 때문에 마음ㆍ뜻ㆍ의식ㆍ요별의 뜻은 하나로되 이름이 다르다고 말한다. 둘째는 불상응심이다. 이른바 제일의제(第一義諦)이니, 언제나 머물러서 변하지 아니하고 제 성품이 청정한 마음이다. 그러므로 “3계가 허망하며, 한 마음이 지은 것일 뿐이다”라고 한 것은 바로 상응심이다. |
지금 법성(法性)에 의하기 때문에 “제일 의의 마음으로 능작을 삼는다”고 하였다. 전(轉)이라 함은 일으키고 짓는다[起作]는 뜻이기도 하고 바뀌고 변한다[轉變]는 뜻도 된다. |
[문]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진심과 망심의 두 가지 마음은 문리(文理)로서 알게 했을 뿐인데 어떤 방편의 문으로 성품을 친히 볼 수 있겠는가? |
[답] 망(妄)이 쉬면 마음이 공(空)하여져서 참된 앎[眞知]이 저절로 나타나겠지만 만약 헤아리고 견주게 되면, 더욱 망심만이 더할 뿐이다. 미묘히 깨치는 때에 모든 연(緣)이 저절로 끊어지리라. |
옛날의 부처님 오도송(悟道頌)에서 “별을 봄으로 인하여 깨쳤거니와/깨치고 나니 별이 아니로다./물(物)을 뒤쫓지 아니하니/이는 무정(無情)한 것 아니로다”고 했다. |
또 『보장론(寶藏論)』에서 이르기를 “있음[有]이 아니고 공이 아닌 것이 만물의 근원[宗]이요, 공이 아니고 있음이 아닌 것이 만물의 어머니다. 나서도 방향이 없고 들어도 처소가 없다. 온갖 존재[萬有]를 포함하되 선비[士]가 되지 않고, 만 가지[萬端]를 따라 교화하되 주인 되지 아니한다”라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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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의 성품이 이러하거늘,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견성(見性)하는 때에 저절로 드러나게 되리라. |
그런 까닭에 옛 게송에 이르기를 “망(妄)이 쉬면 고요함이 생기고/고요함이 생기면 앎이 나타나며/앎이 나타나면 고요함도 버려지고/분명하게 진(眞)을 볼 뿐이다”고 했다. |
또 『신심명(信心銘)』에서 이르기를 “전제(前際)가 공임을 알면/아는 곳이 모두 종(宗)이며/분명하게 경계를 비추면/비춤에 따라 어두워진다./한 마음이라도 걸림 있으면/만 가지 법이 통하지 않으리./과거와 미래가 저절로 그렇거니/끝까지 따지어 밝힐 필요 없네”라고 했다. |
또 다음의 경우와 같다. |
“학인(學人)이 황벽 화상(黃蘗和尙)에게 물었다. |
‘눈앞의 허공 같은 것은 경계라 하지 못하겠지만 어찌 경계를 지시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
대답하였다. |
‘어떤 마음으로 경계 위를 향하여 볼 것인가? 설령 그렇게 볼 수 있다 하여도 원래 이것은 경계를 비추는 마음일 뿐이다. 마치 사람이 거울로 얼굴을 비추면 비록 눈썹과 눈이 분명하게 된다손 쳐도 원래 이것은 영상(影像)에 불과할 뿐인 것과 같으니, 그대의 일과 무슨 상관이겠는가?’ |
물었다. |
‘만약 비춤을 의지하지 않으면,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 |
대답하였다. |
‘만약 관계하고 의지한다 하면, 언제나 사물을 빌어야 하리니, 어찌 마칠 때가 있겠는가? 그대는 말한 것을 보지 못했는가? 손을 놓고 그대에게 보여도 한 물건도 없으니 애만 썼을 뿐 거짓말한 것은 수천 번이나 될 것이다.’ |
물었다. |
‘다른 이가 만약 비추는 것을 아는 때에도 물건이 없습니까?’ |
대답하였다. |
‘만약 이 물건이 없다면, 다시 어느 곳에서 비출 수 있겠는가? 그대는 눈 뜨고 잠꼬대하지 말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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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스님은 말했다. |
‘백 가지를 많이 아는 것은, 구하는 것 없는 맨 첫째의 도인(道人)보다 못하느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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