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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말하기를 ‘망이 있되 그대로 진이라면, 똑같이 마지막과 시작이 없다’고 했다. 만약 분별하여 설명하자면, 네 구절이 있어야 한다. 진리에서라면 마지막도 없고 시작도 없으며, 망념에서라면 시작은 없되 마지막은 있으며, 참된 지혜[眞智]에서라면 마지막은 없되 시작은 없으며, 문득 일어나는 망념에는 마지막도 있고 시작도 있다. |
만약 원융(圓融)에 의거하면, 똑같이 마지막과 시작이 없다. 이미 마지막과 시작이 없으므로 마지막이 없다, 시작이 없다는 것조차도 없어서, 말이 없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서 이 현묘(玄妙)함을 회통(會通)할 수 있다. |
위에서 답한 뜻을 자세히 살피면, 깊이 원종(圓宗)에 계합하리라. 저 수연문(隨緣門)의 처음에서 이내 진을 미혹하여 망을 일으켰고 뒤에야 망이 곧 진임을 깨쳤으므로 미혹하고 깨친 가운데서는 마지막과 처음이 나누어진 것도 같거니와, 불변문(不變門)에서 보면 망 스스로가 본래 공(空)이거니 누가 앞과 뒤를 논하겠는가.” |
진리와 세속에 성품이 없고 범부와 성인이란 이름뿐이니, 마치 새끼를 모르고서 뱀이라 하며 말뚝을 의심하여 귀신이라 함과 같다. |
진제(眞諦)도 있지 아니하고 세제(世諦)도 없지 아니하다. 두 진리가 서로 이루어져서 삿된 소견에 떨어지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속제도 하는 수 없이 있되 있음은 언제나 스스로 공하며, 진제도 하는 수 없이 공이로되 공은 항상 있음에 통한다. |
오늘날의 학자(學者)는 대부분이 공과 있음의 두 가지 문에 미혹하여 모두 편견(偏見)을 이루는데, 오직 온갖 것을 세우지 말고 자취를 털며 공으로 돌아가라. 서로가 어긋나고 차별된 이치 안에서는 전혀 지혜의 눈이 없으며, 이미 미혹을 가리지 못하거늘 무엇으로 의심을 풀겠는가? |
그러므로 이르기를 “열반의 마음은 환히 알기 쉽되, 차별의 지혜는 밝히기 어렵다”고 했다. 만약 공과 있음의 [문]가운데서 쌍차(雙遮)하고 쌍조(雙照)하며 진제와 속제 안에서 즉하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으면[不卽不離], 비로소 법을 넓히고 사람들을 위하여 깨달음의 지위[覺位]를 계승하여 흥하게 하리라. |
[문] 법상종(法相宗)과 법성종(法性宗)의 두 종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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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법상종은 대부분이 사(事)와 상(相)을 설명하고 법성종은 이(理)와 성(性)을 말할 뿐이다. |
법상종에서는 제팔식(第八識)을 여의는 것을 안(眼) 등의 모든 식(識)이 없는 것과 같다 하고, 법성종에서는 여래장(如來藏)을 여의는 것을 8식(識)이 없는 것과 같다 한다. 만약 진여(眞如)에서라면 자성(自性)을 지키지 않고 식이 변화할 때에는 이 8식이 곧 바로 참된 성품[眞性] 위의 연을 따르는[隨緣] 뜻이로되, 혹 종(宗)을 나누어 상(相)과 사(事)를 분변(分辯)한다 하면 양쪽으로 나누어지기도 한다. 만약 성상(性相)에서라면 서로가 이루어져서 도리는 하나로 돌아간다는 뜻이니, 불변수연(不變隨緣)이요 수연불변(隨緣不變)이기 때문이다. 마치 전체가 물결이로되 물이요 전체가 물이로되 물결인 것과 같다. |
『청량기(淸凉記)』에도 『밀엄경(密嚴經)』에서의 게송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여래의 청정한 장(藏)이/세간의 아뢰야(阿賴耶)다./마치 금과 가락지가/변하며 바뀌되 차별 없음과 같다”라고 했다. 곧 아뢰야식의 체(體)가 바로 여래장이요, 망염(妄染)과 합하여서 아뢰야라 한 것이니, 다시 따로의 체가 없다. 또 금색(金色)은 가락지와 같으며, 금의 체는 곧 금이다. |
그러나 이 위에서 다른 것[異]에는 통틀어 네 글귀가 있다. 첫째는 근본[本]으로써 끝[末]을 이루면 근본은 숨고 끝은 존재한다. 이것은 곧 존재하고 숨은 것이 다른 것이니, 그 때문에 이르기를 “허망은 체성이 없어서 진실에 의지하여 일어나고 진실은 숨지 아니함이 없고 허망만이 나타난다”고 했다. |
둘째는 끝을 거두어 근본으로 돌아가면 끝은 다하고 근본이 나타난다. 이것은 곧 드러남과 없어짐이 다르지 않은 까닭을 밝히는 것이니, 그 때문에 이르기를 “진실한 체성은 진실하여 허망이 다하지 아니함이 없고 진실만이 나타난다”고 했다. |
셋째는 근본을 거두어 끝을 따르면 끝이 존재하고 끝을 거두어 근본으로 돌아가면 근본이 나타난다. 이것은 곧 두 법이 다 같이 존재하며 진실과 허망에 다름이 있을 뿐이다. 곧 진실이 있고 허망이 있어서 다르지 않은 까닭을 밝히는 것이니, 그 때문에 이르기를 “이것은 곧 체성이 없는 허망이 체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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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진실한 진실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그 때문에 이르기를 “다름이 없다”고 한 것이다. |
넷째는 근본을 거두어 끝을 따르면 근본이 숨는 것으로서 이것은 없지 않다[不無]는 뜻이며, 끝을 거두어 근본으로 돌아가면 끝이 다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있지 않다[不有]는 뜻이다. 이것은 곧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아서 다르지 아니함을 밝힌 것이니, 또한 이것은 마지막의 두 글귀이다. |
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장자리[邊]가 아니며,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중간이 아니며, 중간이 아니므로 가장자리가 아니다. 이것은 의탁하지 않는 법계[無寄法界]여서 묘한 지혜로서 증득할 바요, 깊고 고요하여 항상 머무르며 의탁한 곳이 없다. |
또 동일함이 아닌 것이 곧 다름이 아닌 것이기 때문에 항상 가장자리에 있으면서도 곧 중간과 같으며, 또 동일함이 아닌 것이 곧 생사이고 다름이 아닌 것이 곧 열반이라 동일함이 아닌 것이 곧 다름이 아닌 것이기 때문에 항상 생사에 머무르되 곧 열반에 처(處)하는 것과 같다. |
또한 중생이어서 미혹했기 때문에 아뢰야(阿賴耶)를 이루고, 여래여서 깨쳤기 때문에 여래장(如來藏)을 이룬다. 마치 금이 공장(工匠)의 연(緣)을 따라 이루어질 적에 바뀌어 가락지가 된 것과 같고, 가락지가 용광로 불의 연을 따라 무너질 적에는 다시 금이 된 것과 같다. 이루어지고 무너짐이 서로 바뀌되, 이것은 하나의 금일뿐이요 다시는 차별이 없다. 여래장의 마음도 이와 같아서 더러운 연을 따를 적에는 미혹해서 아뢰야가 되고, 깨끗한 연을 따를 적에는 깨쳐서 여래장을 이룰 뿐이다. 근본과 끝이 서로 바뀌되 이것은 한 마음일 뿐이요, 마침내 구별이 없다. |
『무생의경』에서는 “중생의 몸 안에 열반이 있으니 바로 이것은 끝[末] 가운데에 근본[本]이 함유된 것이요, 중생이 곧 열반의 가용(家用)이니 바로 이것은 근본 가운데에 끝이 함유된 것이며, 탐욕이 곧 도(道)이니 바로 이것은 끝 가운데에 근본이 함유된 것이요, 탐욕이 곧 도의 가용이니 바로 이것은 근본 가운데에 끝이 함유된 것이다”라고 했다. |
그러므로 경에서 말씀하기를 “모든 범부는 언제나 정(定)에 있다”고 하였다. ‘언제나 무슨 정에 있느냐’고 묻자, ‘법성(法性)을 무너뜨리지 않는 삼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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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昧)이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으니, 이것은 바로 끝 가운데에 근본이 함유된 것이요, 법성 가운데에 중생이 함유된 것이라 이것은 바로 근본 가운데에 끝이 함유된 것이다. |
『대품경(大品經)』에서 말씀하기를 “유위(有爲)를 여의지 않고 무위(無爲)를 설명하며, 무위를 여의지 않고 유위를 설명한다”고 하셨다. 또 끝이 곧 근본이요 근본이 곧 끝이라는 뜻이니, 마치 물결이 곧 물이요 물이 곧 물결이라는 것과 같다. 경에서 말씀한 바와 같아서, ‘생사가 바로 열반’이니, 없어짐이 없고 남이 없기 때문이다. |
또 『능가경(楞伽經)』에서 이르기를 “진식(眞識)과 현식(現識)은 마치 진흙 뭉치와 작은 먼지와 같으니라. 내지 대혜(大慧)야, 만약 진흙 뭉치와 작은 먼지가 다르다면 그것으로 이루어진 바가 아니건마는 실은 그것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그러므로 다르지 않다. 만약 다르지 않다면 진흙 뭉치와 작은 먼지는 차별이 없어야 한다. 이와 같아서 전식(轉識)과 장식(藏識)과 진상(眞相)이 만약 다르다면 장식은 인(因)이 아니다. 만약 다르지 않다면 전식이 소멸할 때 장식도 소멸되어야 하나, 실로 진상은 스스로 소멸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진상은 소멸한 것이 아니고 업상(業相)만이 소멸할 뿐이니라”고 하셨다. 이 가운데서 진상이 바로 여래장이요, 전식은 바로 칠전식(七轉識)이며, 장식은 바로 아뢰야이다. |
또 이르기를 “모든 식(識)에는 세 가지 모양이 있나니, 전상(轉相)과 업상(業相)과 진상(眞相)이다”라고 했다. 이 세 가지 상(相)은 8식(識)에 다 통한다.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전(轉)이라 하는데, 여덟 가지 것을 다 함께 일으키기 때문이요 모두가 생멸이 있기 때문에 전상(轉相)이라 한다. 움직이면 이것은 업(業)이라 마치 3세(細) 중의 처음 업상과 같기 때문이며, 8식은 모두가 움직이기 때문에 모두를 업상이라 한다. 여덟 가지 참된 성품을 다 진상이라 한다. |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기를 “간략하게 설명하면 세 가지 식(識)이 있고, 자세히 설명하면 여덟 가지 모양[相]이 있다. 무엇이 세 가지냐 하면, 진식(眞識)과 현식(現識)과 분별사식(分別事識)이다”라고 했다. 망과 합하지 않는 데서 보면 여래장의 마음이니 진식이요, 나타나는 것은 곧 제8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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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에서 말씀하기를 “마치 밝은 거울이 뭇 빛과 형상을 지니는 것과 같다. 현식이 곳곳에 나타나는 것이 또한 이와 같으며, 나머지 일곱 가지는 모두 분별사식이라고 한다”고 했다. |
경에서 “만약 다르다면 장식은 인(因)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 세 가지를 말한 것이다. 만약 장식과 다르다면 진상(眞相)과 전식(轉識)이 인(因)이 되지 않아야 하며, 이미 전식이 훈습했기 때문에 진식은 연(緣)을 따르면서 장식을 이루므로 다르지 않음을 알겠고, 장식이 두 가지 식[二識]의 인(因)이 되는 것이 아니다. |
그러므로 경에서 “진상이 소멸한 것이 아니요, 업상만이 소멸한다”고 하셨으니, 이것은 곧 세 가지 일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
경의 비유 중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티끌이요, 둘째는 물이요, 셋째는 진흙이다. 물로 티끌을 이기면 진흙 뭉치가 비로소 이루어지듯이, 업(業)을 진상에 훈습하면 업식(業識)이 문득 생긴다. |
경에서 “만약 스스로 진상이 소멸되면, 장식이 곧 소멸한다”고 한 것은, 도리어 장식이 진과 망이 화합하여 이루어졌으되 그 망만이 소멸할 뿐 진의 자체는 없어지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다. |
또 스스로의 진상[自眞相]이라 함을 효(曉) 법사가 해석하기를 “본래 깨달음[本覺]의 마음은 망연(妄緣)을 빌리지 않고 성품 스스로가 신령하게 알므로 스스로의 진상이라 한다”고 했으니, 동일하지 않다[不一]는 뜻에 맞추어서 해설한 것이다. 또 “무명(無明)의 바람을 따라 생멸을 지을 때에는 신령하게 아는 성품과 근본은 다르지 않으므로 역시 스스로의 진상이라고 한다”고 했으니 이것은 다르지 않다[不異]는 뜻에 의지하여 해설한 것이다. |
또 경에서 이르기를 “여래장은 비롯함이 없는 나쁜 습기(習氣)에 훈습을 받으므로, 장식이라 한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대혜(大慧)야, 여래장은 이 선(善)과 불선(不善)의 인(因)으로 온갖 갈래[趣]에 가 나는 것을 두루 일으킨다. 마치 재주꾼이 모든 갈래를 변화로 나타내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모든 교(敎)에서는 모두가 여래장을 식(識)의 체(體)가 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심성(心性)이 곧 여래장이요, 이 밖에는 법이 없는 줄 알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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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론(唯識論)』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또 모든 법의 훌륭한 이치[勝義]이며/또한 바로 이것이 진여(眞如)이니/언제나 그 성품 그대로이기 때문이며/곧 식(識)의 실성(實性)일 뿐이니라”고 했다. |
천친(天親) 역시 여래장으로써 식의 체를 이룬다 함을 분명히 알았으나, 다만 뒤에 논(論)을 해석하는 사람이 불변(不變)을 세웠을 뿐이다. 그렇다면 허물은 후인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
요약하여 말하면 통틀어 위의 모든 뜻에는 곧 모두가 진과 망이 화합한 것이되 동일함도 아니고 다름도 아니면서 한 마음이 두 가지 진리의 문을 능히 이루고 단상(斷常)에 떨어지지 않는 처중(處中)의 미묘한 뜻이어서 사리(事理)가 서로 통하고 성상(性相)이 융통하여 법마다 거두어지지 아니함이 없고 모두가 종경(宗鏡)으로 돌아간다. |
[문] 진심과 망심의 두 마음은 행상(行相)이 저마다 다르거늘, 어떻게 자세하게 이해하여야 법성(法性)의 원종(圓宗)에 들어갈 수 있는가? |
[답] 망념(妄念)은 남이 없는 줄은 분명히 아는 것일 뿐이니, 바로 이것이 진심(眞心)으로서 움직이지 아니한다. 이 움직이지 않는 것 외에 다시는 가는 털끝만큼의 법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 |
경에서는 “예류(預流)ㆍ일래과(一來果)ㆍ불환(不還)ㆍ아라한(阿羅漢)의 이와 같은 모든 성인이 모두 마음에 의지하여 허망하게 있다”고 하셨다. |
『대반야경(大般若經)』에서 이르기를 “선현아, 매우 깊은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는 모든 법을 분석하여 극미(極微)의 양보다 더하여도 마침내 조금만큼의 진실한 것도 얻을 만한 것을 보지 못하나니, 그러므로 이름이 반야바라밀다이다”라고 하셨다. |
또 진실과 허망은 체성이 없지만 다 같이 이름과 글자가 있으며, 이름과 글자에 체성이 없으므로 모두가 언설(言說)에 의지하며, 언설의 성품은 공하므로 다함께 일어나는 처소가 없다. 그렇다면 일체의 언어는 모두 다 평등하며, 일체의 모든 법은 모두가 진실이다. |
그러므로 『승사유범천소문경(勝思惟梵天所問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범천이 문수(文殊)에게 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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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 이의 말씀한 바는 모두가 곧 진실이십니다.’ |
문수가 말하였다. |
‘선남자야, 온갖 언설은 모두가 곧 진실이니라.’ |
물었다. |
‘허망한 언설도 역시 진실입니까?’ |
답하였다. |
‘그러하니라. 왜냐 하면 선남자야, 이 모든 언설은 허망하여 처소도 없고 방향도 없기 때문이니, 만약 법이 허망하여 처소가 없고 방향이 없으면 바로 이것은 진실이니라. 이런 이치 때문에 온갖 언설은 모두가 곧 진실이니라. 선남자야, 제바달다(提婆達多)의 모든 언설도 여래의 것과 다르거나 구별이 없다. 왜냐 하면 온갖 언설은 모두가 곧 여래의 언설이며, 여(如)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언어로써 말할 수 있는 일은 모두가 말할 바가 없기 때문에 말할 바가 있게 되느니라.’” |
또 『보행기(輔行記)』에서 한 생각의 마음을 풀이하여 그로써 관(觀)하는 경계[境]를 삼았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의 뜻이 있다. 첫째는 선(禪)으로써 경계를 삼으면 세간의 마음과는 같지 않다는 것이요, 둘째는 곧 경계에 대한 마음의 집착을 여의고 선의 마음[禪心]을 향하여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
이미 한 생각을 말하면 하나와 많은 것이 서로 즉하나니[一多相卽] 어떤 한 마음이 능히 갖추는 것이 되겠는가? 그러므로 간별하여 보이면서 이르기를 “망령된 헤아림의 한 생각에서와 같을 수 없고 망념에는 동일하다, 다르다 하는 모양이 없음을 능히 깨달아 안다”고 했다. 이 모양이 없음을 통달하여 온갖 마음을 갖추고 삼천대천세계가 두루 갖추어져야 비로소 하나와 많은 것이 서로 즉함을 능히 비춘다. |
이것은 처음 낸 마음에 의거하여 관(觀)을 익히는 사람이 함부로 망정(妄情)의 경계에서 관할까 두려워해서이다. 그러므로 간별하여 보여서 문으로 들어가게 해야 한다. 만약 이(理)에 의거하여 논한다면 법계(法界)가 아님이 없거늘 또한 어찌하여 망정에 취착함을 막겠는가? 생각은 본래 공(空)이어서 망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니, 있음[有]에 집착하는 이를 위하여 공을 관하게 할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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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선덕(先德)이 이르기를 “아직 생각하지 못했을 때의 생각은 아직 나지 않은 것이며, 아직 나지 않았다면 이것은 있지 아니하며, 있지 않은 법은 역시 제 모양[自相]이 없다”고 했다. |
현재의 생각은 연(緣)을 따라서 생기며, 생각이 만약 스스로 있다면 연을 기다리지 않아야 한다. 연을 기다려서 생겼기 때문에 곧 자체(自體)가 없으며, 그러므로 마음은 자성(自性)이 없고 연기(緣起)가 곧 공인 줄 알 것이다. 마치 그 흐름을 끊고자 하면 그 근원을 막을 뿐이며 그의 생(生)을 면하고자 하면 그 뿌리를 끊을 뿐인 것과 같다. 많은 공을 들이지 않고 가장 힘을 덜고 요긴한 것이 된다. |
그러므로 『통심론(通心論)』에서 이르기를 “속박은 마음으로부터 속박하고, 풀림도 마음으로부터 풀린다. 묶고 푸는 것이 마음을 쫓으며 다른 데는 관계하지 않으므로, 벗어나는 기술은 마음을 관함[觀心]에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
마음을 관하여 깨치게 되면 온갖 것을 다 함께 깨닫는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이는 먼저 마음을 관하여야 한다. 마음을 관하여 깨끗함을 얻으면, 돌이켜 ‘제 마음은 속이고 진실하지 아니하여 마치 환영과 같고 허깨비와 같으며, 조급하고 경망함은 또 원숭이와 같고, 날뛰며 달아남은 들에서 놓아먹인 말과 같다’고 관할 것이다. |
비롯함이 없는 무명을 여러 겁(劫) 동안 떠돌아다니면서 어떻게 벗어나게 되는가를 모르고 있다. 만약 이렇게 할 수 있으면, 마음의 허물과 환난을 살펴볼 것이다. |
또 모든 경계를 추구하건대 경계는 자성이 없으며 봄[見]으로 말미암아서 있고 보지 않으면 곧 없는 것이다. 또 보는 것[見處]을 추구하건대 봄은 자성이 없으며 마음으로 말미암아서 움직임이 있고 움직이지 않으면 곧 없는 것이다. 또 움직이는 마음을 추구하건대 움직임은 자성이 없으며 홀로 깨닫지 못하기[不覺]때문이요, 깨달으면 움직이지 아니한다. 또 깨닫지 못함을 추구하건대, 근본이 없으며 바로 이것은 끝없는 허망한 습기[虛習]라 생각 생각에 스스로 미혹되었으므로 생각이 벗는 진심에는 아무 것도 없다. |
논(論)에 이르기를 “사람이 미혹하기 때문에 동쪽을 서쪽이라 하지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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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은 실로 바꾸어지지 않은 것처럼 중생도 그러하여 무명에 미혹했기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라 여기지마는 마음은 실로 움직이지 아니한다. 만약 잘 마음을 관(觀)하여 마음에 일어남이 없음을 알면, 이내 수순(隨順)함을 얻어 진여(眞如)의 문에 들리라”고 했다. |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온갖 것 모두가 허망한 마음의 생각에서 생긴다. 마음에 있으면 곧 있고, 마음에 없으면 곧 없다. 있고 없음이 마음을 따르므로, 더더욱 스스로 깨달아야 하고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서 마음에 속임을 당하지 말라. |
이미 마음이 속인 줄 알면 다시는 마음에 머물러 두지 말고 좋거나 나쁘거나 옳거나 그르거나 간에 일시에 온통 놓아버리면 마음은 머무르는 곳이 없어질 것이며, 마음에 머무르는 곳이 없어지면 마음이 없어질 것이며, 이미 마음이 없어지면 역시 마음이 없다는 것조차 없어져서 있다ㆍ없다 하는 것이 온통 없게 되고 몸과 마음이 한꺼번에 다할 것이며, 몸과 마음이 다하기 때문에 똑같이 모든 경계가 사라지고 모든 경계에 모양이 없어지면 본래 하나인 그윽한 데에 계합되며, 깊고 고요히 비추면 비추는 데마다 고요하지 아니함이 없고 고요함으로써 체(體)를 삼으면 체마다 텅 비지 아니함이 없으며, 비고 고요함이 그지없으면 똑같이 법계(法界)에 통하고 법계와 연기(緣起)가 자연스럽지 아니함이 없어서 와도 온 데가 없고 가도 이르는 데가 없다. |
또 법은 일정한 모양이 없고 진과 망은 마음으로 말미암으며, 일어나고 다함은 근원이 같아서 달리 다른 뜻이 없다. |
그런 까닭에 옛 스승이 진실과 허망[眞妄]이 서로 통하는 뜻을 자세히 해석하여 말하기를 “진실과 허망이란, 만약 삼성(三性)에 맞추어서 보면 원성실성(圓成實性)은 곧 진이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은 허망이 되며, 의타기성(依他起性)은 진실에도 통하고 허망에도 통하며, 정분(淨分)은 진실과 같고 염분(染分)은 허망이다”라고 한 것이다. |
변계소집성을 허망의 입장에서 보면, 정(情)으로는 있지만 이것은 곧 이치[理]로는 없는 것이라 허망은 진실에 통하며, 이치로는 없는 것이지만 이것은 곧 정으로는 있는 것이라 진실은 허망에 통한다. |
만약 염분(染分)의 의타(依他)를 허망의 입장에서 보면 인연으로 생기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