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의 추억
조용휘
“메리 크리스마스!”
“성탄, 축하합니다!
성탄절 교중 미사를 마치고 성당 출입문을 나오면서 평소 안면이 있던 구역 신자들과 성탄 인사를 나누었다. 아기 예수님 오신 날이라서 그런지 여느 주일보다 모두 환한 표정이었다. 성당 현관 입구에서 봉사자들이 나눠주는 성탄 축하 떡을 받은 후 주임신부님과도 악수를 했다. 성모상 옆에는 아기 예수님을 모신 구유가 마련되어 있었다. 깊이 허리를 숙이며 구유의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고 기도를 했다. 2020년 새해에는 국민 통합과 경제가 좋아져 나라가 안정되고, 우리 가족들 모두 주님의 은총으로 세상 유혹에 빠지지 않고 착하게 살게 해달라고. 끝으로 나를 위한 기도로는 건강과 지혜와 용기를 주시어 매사를 자신있게 처리하되 절대로 교만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빌었다.
가톨릭에 입문한 것은 1960년대 중반이었다. 어머니와 누나의 권유로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내가 사는 시골엔 한 미카엘 회장이 설립한 공소가 있었다. 200여 평의 대지에 50평 되는 단층 건물과 마당의 종탑, 석고로 만든 성모상이 매주 일요일 공소 예절에 참여하기 위한 교우들을 반겼다. 매주 일요일이면 공소에 모인 교우들이 회장이 집전하는 공소예절을 바쳤다. 매월 한 번씩 미사 집전을 위해 신부님, 수녀님, 사목회장이 공소를 찾았다. 뉴욕 출신의 체격이 크고 코가 유난히도 높은 허 바오로 신부님은 직접 차를 몰고 흙먼지 펄펄 날리는 시골길을 달려왔다. 큰 바위 얼굴 같은 신부님은 언제나 미소 띤 모습으로 커다란 손을 흔들면서 “교우, 여러∼ 분! 아녕∼ 하십니까? 싸랑∼ 해요.” 신부님은 고해소에서 미사 1시간 전부터 세례를 받지 않은 예비 신자들과 교리문답 찰고를 받았다. 주모경 등의 기도를 제대로 암송했는지, 교리는 제대로 알고 있는지, 문답을 통해 확인했다. 신부님은 교리문답을 통과한 학생에게는 캔디나 학용품을 주었다. 국산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디자인이나 성능이 좋았다.
공소 교우들은 미사 참여를 위해 평상복 대신 깨끗한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봉헌금도 준비했다. 농촌 교우 중에는 쌀, 보리, 콩, 조 등 곡물과 닭이나 계란 꾸러미를 가져와서 돈 대신 미사 봉헌 물품으로 제대에 바치기도 했다. 함께 온 사목회장은 신부님의 차 안에서 캔디, 학용품, 헌 옷, 모자, 장갑 등을 꺼내서 교우들에게 나눠 주었다. 교우들은 받은 옷을 몸에 걸치며 서로 자랑했다. 체격이 작은 아주머니는 옷이 너무 커서 도포처럼 온 몸을 감싸고 발목을 덮어도 마냥 좋아했다. 그녀는 사람들의 놀림도 아랑곳하지 않고 싱글벙글 이었다.
성탄절 자정 전야 미사 참여를 위해 공소 교우들은 추풍령역에서 대전 행 밤 10시 군용열차를 탔다. 20여 분만에 황간역에 도착한 교우들은 뼛속까지 파고드는 차가운 겨울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눈 덮인 성당 길 언덕을 올랐다. 넓은 성당 마룻바닥 방석에 앉아 학생들이 준비한 성가, 성극 등 성탄절 행사를 즐기다 보면 어느새 자정 미사 시간이 되었다. 여느 때보다 정성 들여 참여한 미사가 끝나면 성당 자매들이 마련한 새 하얀 김이 피어오르는 따뜻한 떡국으로 출출한 배를 채웠다. 부산행 새벽 3시 30분 열차를 기다리면서 대합실의 벌겋게 단 조개탄 난로 주위에 둘러서 난롯불을 쬐다가 바지 무릎과 옷소매를 태우기도 했다. 그 시절엔 성탄절을 전후해 눈도 많이 내리고 날씨 또한 추웠다.
일요일엔 공소 예절에 참여하고 한 달에 한 번은 반드시 미사에 참여했다. 신앙심이 독실한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매일 아침 기상과 함께 조가, 취침 전엔 호롱불과 램프 아래서도 하루 생활을 반성하는 만가를 바쳤다. 한 번이라도 미사에 빠지고 기도를 하지 않으면 큰 죄를 짓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은 겨우 주일 미사만 참여한다. 호화 장정의 성경책은 자주 펼치지 않아 먼지만 쌓이고 아침저녁과 삼종 기도 또한 어쩌다 가물에 콩 나듯 바치곤 한다. 걸핏하면 갖가지 이유를 붙여 스스로 면죄부를 남발하는 불량 신자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성당에 가면 나와 가족의 안위를 위한 기도타령만 했으니….
최근 해마다 우리나라 종교의 신자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는 신문 보도를 접했다. 저출산의 영향으로 인구의 절대 감소 때문이리라. 가톨릭교회 역시 교적에 등록된 신자들 중에 냉담 자가 3분의 1일이나 된다고 한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물질만능주의와 편의주의 때문이라고 생각이 든다. 우리 집도 예외가 아니다. 아들은 학창 시절, 주일이면 교리 공부도 열심히 참여했고, 대학 때는 중·고등부 교사로 활동하면서 성당의 행사 진행에도 열정을 쏟았다. 그랬던 아들이 군대를 다녀온 이후부터 지금까지 20여 년간 냉담 중이다. 아들에게 성당에 나가라고 설득해보지만, 반응이 신통찮다. 자신의 일이 바쁘다는 등 여러 핑계를 대면서.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신앙이 그들의 삶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방해 요인이라고 믿는 것일까? 주일 미사 참석자는 유아, 청소년의 숫자는 적고 대부분 노년층이다. 교구 차원에서 유아와 청소년들을 위한 특단의 대책이 요구된다.
성탄절 아침, 고향 성당의 뾰족한 종탑에서 은은하게 울려 퍼지던 종소리가 오늘 따라 그립다.
첫댓글 과학의 신의 영역을 넘어서고 있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겠죠. 예전에는 신도가 아니어도 성탄절은 국가적 축복일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