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4. 12
윤석열 정부, 한·미·일 TTC를 제안하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행보가 거침없다. 정책협의대표단으로 명명된 고위급 대표단을 미국 워싱턴에 파견했고, 자신은 평택에 자리 잡은 미군 기지를 방문했다. 지난 2월 대선후보 시절 미국의 대표적 외교 전문지 ‘포린 어페어(Foreign Affair)’ 기고에서 “한·미동맹 강화를 외교정책의 중심축으로 삼겠다”는 당선인의 의지를 확실하게 읽을 수 있는 행보다.
문재인 정부 내내 논란의 중심에 선 ‘전략적 모호성’이 아닌 ‘전략적 확실성’으로 한국 외교의 축이 급선회하고 있다. 주목할 것은 외교가 안보는 물론 경제와 한층 밀접해진 시대라는 점이다.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은 기술 굴기를 통해 미국의 패권에 본격적으로 도전하고 있다. 시진핑 주석이 “태평양은 미국과 중국이 나누어 가져야 한다”며 동아시아 패권의 야심을 노골적으로 내보인 지 오래다. 자유 국제질서에 중국을 포용하면 중국이 다 자유롭게 변화할 것이라는 미국의 기대는 무산됐다. 미국의 중국 견제와 봉쇄는 트럼프 1막을 지나 바이든 2막으로 접어들었다.
20세기 후반을 억누르고 있었던 미국과 소련의 냉전 구도가 종식되었을 때, 서구는 역사는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로 끝났다고 기염을 토했다. 지구상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 러시아, 뒤이어 러시아가 구축한 동부 유럽의 공산 진영이 무너졌을 때, ‘역사의 종말’이라고 선언했던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서구 지성의 세계관을 대변했다. 상대를 패망시키려는 적대적 정치체제 간의 경쟁이 사라진 후, “어느 국가가 국민을 더 부유하게 해 줄 것인가”만이 중요해졌다. 경제논리가 압도했다. “정치체제가 달라도 거래할 수 있다”는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모든 국가가 그 세상으로 달려갔다. “맥도날드 매장이 진출한 국가끼리는 전쟁하지 않는다”는 토머스 프리드먼의 주장은 새로운 시대정신을 웅변했다.
후쿠야마와 프리드먼의 진단 빗나가
2022년 지금 후쿠야마와 프리드먼의 세계는 존재하는가? 자유 민주주의 체제의 승리로 역사책이 끝난 줄 알았는데, 그 후 30년 지구상에서 자유 민주주의는 오히려 후퇴했다. 서구 민주주의의 난맥상이 이어지는 가운데 선거만이 민주주의의 절대 기준이 아니라면서, 인민을 행복하게 해주면 그게 바로 민주주의라고 중국은 주장하고 있다. 2022년 2월 푸틴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전격적으로 침공했다. 미국 대중문화의 상징인 패스트푸드 글로벌기업 맥도날드 매장은 러시아, 우크라이나에 모두 존재한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를 빌렸을 뿐,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를 바꾸지는 못했다. 세계화를 주도했던 미국과 영국은 스스로 자신들이 설계하고 시공, 증축했던 그 무대를 떠나고 있다. 미국은 세계무역기구(WTO)의 핵심기능인 분쟁해결 절차를 식물화시켰다. 영국은 유럽연합(EU)에서 탈퇴했다.
자유민주주의의 위기, 세계화의 퇴조는 대한민국의 위기로 다가온다. 민주화를 달성한 대한민국이 무수한 개발도상국이 경험하는 ‘중진국 함정’에 빠지지 않고 선진국 반열에 진입할 수 있었던 건 체제가 달라도 거래가 가능했던 세계화의 거대한 물결에 큰 배를 띄웠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의 폐허에서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빈곤을 딛고 중진국으로 발돋움했던 냉전 시대에는 한·미동맹이 제공했던 안보 우산이 든든한 방어벽이 됐음은 불문가지다. 그동안 한국을 지배했던 ‘안미경중(安美經中)’ 패러다임은 이미 도전에 직면했다.
중국 의존은 미국이 포용할 때 가능
한국의 ‘안미경중’은 미국이 중국을 포용했던 시절이기에 가능했다. 미국의 중국 견제가 본격화했지만, 한국 정부는 ‘미국은 동맹, 중국은 경제 파트너’라는 도식적 논법으로 일관하면서 중국 견제에 동참을 요구하는 미국에는 중국과의 경제적 이익을 이유로 소극적, 방어적이었다. 그렇다고 핵심 안보이익이 걸린 문제를 두고 중국에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내세워 안보이익을 적극적으로 관철하진 않았다. 미래 기술패권과 안보 주권이 걸린 5세대(5G) 이동 통신의 주요 공급체로 등장한 화웨이를 미국이 배제하기로 결정하고 한국에 협조를 요청했을 때, “민간이 알아서 판단할 문제”라는 정부 당국의 입장 표명은 결정적인 장면이었다. 안보동맹과는 어떻게 나가도 여전히 동맹일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서울 하늘을 짓누르고 있었다.
반면에 워싱턴 정가와 싱크탱크에선 “서울은 베이징의 궤도를 따라 돈다”는 이야기가 나온 지 오래됐다. 신뢰를 의심받는 동맹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차기 정부가 한·미동맹을 강화하려는 구상을 본격화하려면 신뢰구축 테스트를 통과해야 한. 그 테스트는 무엇일까. 미국이 문제를 내기 전에 한국이 스스로 제안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트럼프 대통령이 시동을 건 미국의 중국 견제는 현재진행형이다. 전임자인 트럼프가 시작한 미·중 무역 전쟁이 미국 혼자 힘으로 중국과 경제전쟁을 치른 것이었다면, 바이든은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 인권’ 가치에 동참하는 국가들과 연계해 중국과 기술전쟁을 치른다는 구상이다. 그 구상의 핵심은 산업과 안보 양쪽에 사용될 수 있는 핵심 분야의 중국 의존도를 감소시키고 미국과 미국이 신뢰하는 국가의 영토 내에 그 공급망을 완결하겠다는 것이다. 반도체·배터리·희토류·의약품 등 중국의 기술 굴기, 팬데믹으로 인해 선명하게 부각된 리스크와 연결된 분야가 대상이다. 미국 혼자 힘으로 할 수 없기에 가치 공유국가들의 동참이 필수적이다. 미국은 EU와 무역·기술협의회(TTC, Trade and Technology Council)를 지난해 발족시켰다. 글로벌 공급망, 반도체, 인공지능(AI), 수출통제 등이 논의 의제다. 미국은 아시아 국가들과는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를 만들어 유사한 논의를 할 생각이다. 러시아 경제제재에 동참하지 않는 인도 때문에 구체화하려면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중국은 FTA 맺고도 한국 기업 차별
아시아지역의 민주주의 기술동맹의 핵심고리는 한국과 일본이다. 부품·소재·최종조립에서 한국과 일본은 중요한 연결고리를 담당하고 있다. 미국은 한·일과는 각각 동맹을 맺고 있지만, 중국의 거친 공세를 막기 위해서는 한·일이 같은 배를 타야 한다는 생각이다. 일본도 그들과 같은 민주주의·시장경제를 추구하는 한국이 같은 배를 타길 원한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주도하고 일본이 적극 동참했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협상이 진행될 때, 일본의 최대 관심사는 한국의 참여 여부였다. 일본과 역사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는 한국은 TPP 참여를 망설였다.
대신 한국은 중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을 서둘렀다. 중국과의 FTA는 무늬만 자유무역협정으로 끝났다. 한국기업의 중국시장 접근을 확대하는 데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고, FTA에도 불구하고 중국에 투자한 한국기업의 차별을 당해야 했다. 국가는 기업의 이익을 옹호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중국에 항의하면 북한 문제와 관련해 중국의 협조를 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압도했다. 한국의 미래세대에게 물어보라. 주권국가의 가치와 원칙을 천명하는 것이 중국을 자극하는 것으로 치부되던 시대는 끝내라는 것이 청년들의 생각이다. 중국 앞에서 작아지는 소중화적 자세와 빗나간 기대를 접고, 국익과 원칙에 기반한 당당한 선택을 해야 할 때라고 MZ 세대는 요구한다.
최병일 / 한국고등교육재단 사무총장
중앙일보
한·미 상설 고위급 대화 채널 필요
한국은 지금 21세기 아시아 지정학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 미·중 패권 경쟁시대를 통과하고 있다. 중국 중심 글로벌 공급망의 의존도를 줄이는 것이 한국경제와 안보를 위해 필요하고 바람직하다. 단기적으로 비용과 고통이 따르지만, 궁극적으로는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체제와 시장경제를 지키고 공고하게 하는 경로로의 전환이다. 윤석열 당선인은 ‘포린 어페어’ 기고에서 반도체·전기차 배터리·원자력·의약품·기후변화 관련 기술 등 디지털 대전환, 글로벌 공급망, 공중보건에 이르는 한·미 협력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정기적인 상설 고위급 대화 채널 구축은 시의적절하다.
이 논의의 무대를 한국과 미국, 양국을 넘어 일본으로까지 확대하면 효과와 영향력은 증폭될 것이다. 무역과 기술분야의 핵심 의제를 논의하고 협력하는 한·미·일 TTC 발족을 한국이 먼저 제안하면 어떨까. 한국과 일본이 협력 전선을 형성할 것을 기대하는 미국에 선제적·적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신뢰구축의 계기가 될 것이다. 최악으로 치달은 한·일관계를 리셋할 수 있는 계기도 만들어진다. 경제·안보·외교무대에서 한국의 협상력도 강화될 것이다. 선진 대한민국이라면 이 정도의 창의적이고 적극적인 경제안보 전략을 추진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