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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경록 제5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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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 지음 |
송성수 번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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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참 마음[眞心]은 바뀌지 아니하고 묘한 성[妙性]은 생(生)이 없어서 범부와 성인이 같은 무리이거늘 어떻게 망(妄)을 말하는가? |
[답] 본래 마음[本心]은 맑고 고요하여 모양이 끊어지고 말을 떠났다. 성품[性]이 비록 스스로 그렇다고는 하나 성품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연(緣)을 따라 더러워지고 깨끗하여진다. 마치 하나의 물에 만약 구슬이 들어가면 맑아지고 티끌이 섞이면 흐려지는 것과 같다. 또 하나의 허공에 구름이 가리면 어두워지고 달이 나타나면 맑아지는 것과 같다. |
그러므로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이르기를 “마치 깨끗한 못 물에 미친 코끼리가 안으로 들어가서 그를 혼탁하게 했을 때 만약 물을 맑게 하는 구슬을 물에 넣으면 청정해지므로 물 밖에 코끼리가 없고 구슬이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마음 또한 그러하여 번뇌가 들어가기 때문에 마음을 흐리게 하고 모든 자비(慈悲) 등의 착한 법이 마음에 들어가면 마음을 깨끗하게 한다”라고 했다. |
그러나 더러움과 깨끗함은 정해진 것이 아니고 진실[眞]과 허망[妄]은 연[緣]을 따른다. 만약 그를 어둡게 하면 생각 생각마다 윤회(輪廻)하여 참된 성품을 잃어버리고, 만약 그를 비추면 마음과 마음 마음마다 고요히 사라져서 열반(涅槃)을 뚜렷이 증득한다. 그러므로 진실과 허망은 원인[因]이 없고 공연히 언설(言說)만이 있는 줄 알 것이다. |
진실에서 보면 언설이 없고, 언설에서 보면 진실이 없다. 이는 모두가 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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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고 미혹한 정상(情想)으로 세워진 것이다. 천 갈래 길이 다투어 일어나서 공연히 연야달다(演若達多)가 머리를 모르게 되었고, 한 법이 겨우 나자마자 달바(闥婆)의 그림자가 나타났을 뿐이다. |
함생(含生)들이 실제(實際)를 궁구하지 않고 다만 미친 정[狂情]을 쫓기 때문에 모든 성인들이 몸을 굽혀 기의(機宜)를 따르면서 모두가 그와 사업을 같이 한다. |
쐐기로써 쐐기를 빼내듯 허망을 말하여 허망으로부터 진실에 돌리며, 거친 것을 가지고 거친 것에 접붙이므로 모양[相]을 들어서 모양으로 인하여 성품[性]을 통한다. 만약 허망을 잡지 아니하면 오히려 진실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니, 허깨비인 그림자가 소멸되자마자 지혜의 광명도 불길을 쉰다. |
『수능엄경(首楞嚴經)』에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
“정진(精眞)이 미묘하고 밝으며 본각이 뚜렷하고 깨끗하여 생사(生死)와 모든 진구(塵垢)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내지 허공도 모두가 망상(妄想)으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니라. 이것은 원래 본각의 미묘하고 밝은 정진(精眞)인데 허망하게 기세간(器世間)을 발생시키나니, 마치 연야달다(演若達多)가 제 머리를 모르고 그림자를 오인한 것과 같으니라. 망(妄)은 원래 인(因)이 없거늘 망상 중에서 인연(因緣)의 성품을 세우는 것인데 인연을 미혹한 이는 자연(自然)이라 일컫는다. 저 허공의 성품도 실은 환(幻)으로 생긴 것이므로 인연인데, 자연이라 함은 다 중생의 망령된 마음으로 헤아리는 것이니라. 아난아, 망(妄)이 생긴 데를 알면 망의 인연을 말할 수 있겠거니와 만약 망이 원래 없는 것이라면 망의 인연을 말하더라도 원래 있는 것이 아니거늘 하물며 알지도 못하면서 자연이라 추측함이겠느냐.” |
조법사(肇法師)가 망이 일어나는 원유를 궁구하여 본제를 세운 품[窮起妄之由立本際品]에 이르기를 “본제(本際)란 곧 일체 중생의 걸림이 없는 열반의 성품이다. 어찌하여 갑자기 이와 같은 망심(妄心)과 갖가지 뒤바뀜이 있게 되느냐 하면, 다만 한 생각[一念]으로 마음이 미혹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이 한 생각이란 하나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또 이 하나란 부사의(不思議)로부터 일어나며, 부사의란 곧 일어나는 데가 없다. |
그러므로 경에서 말씀하기를 “도(道)가 처음에 하나를 낸다”고 하셨다. 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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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란 무위(無爲)인데 하나는 둘을 내며, 둘은 망심(妄心)이며 이렇게 하여 셋은 만법(萬法)을 내기에 이른다. 이미 무위를 반연하여 마음이 있게 되었고, 다시 마음이 있음을 반연하여 물질[色]이 있게 된다. |
그러므로 경에서 말씀하기를 “갖가지의 마음과 물질이다. 그러므로 마음은 만 가지 생각을 내고 물질은 온갖 실마리를 일으키며, 화합한 업연(業緣)으로 마침내 3계(界)의 종자를 이룬다”고 하셨다. |
3계가 있게 되는 까닭은 근본에 잡착하여 참된 하나[眞一]을 미혹했기 때문에 이내 탁욕(濁辱)이 있어서 그 망령된 기(氣)를 낸 것이다. 깨끗하여 미묘함[淸微]을 맑게 하면 무색계(無色界)이니 이른바 마음이요, 흐리고 욕됨(濁辱)을 맑게 하면 색계(色界)이니 이른바 몸이요, 찌꺼기와 더러움[滓穢]을 흩뜨리면 욕계(欲界)이니 이른바 티끌의 대경[塵境]이다. |
그러므로 경에서 말씀하기를 “3계는 허망하니 한 망심이 변화한 것일 뿐이다”라고 하셨다. 안에서 하나가 생기면 이내 밖에서는 무위(無爲)가 있게 되고, 안에서 둘이 생기면 이내 밖에서는 유위(有爲)가 있게 되며, 안에서 셋이 생기면 이내 밖에서는 3계가 있게 된다. 이미 안팎이 상응하면 마침내 갖가지 모든 법과 항하의 모래[恒沙]같은 번뇌가 생긴다. |
그러므로 알아라. 3계 안에는 하나의 법도 자기 마음으로부터 나지 않은 것이 없다. 마음으로 생각하고 분별함으로 인하여 조작하는 것은, 마치 요술의 힘으로 만물을 변화시키는 것과 같다. 바깥에서 나타남이 없는 성품이 발현(發現)하는 것 같지마는 제 마음에서 생길 뿐이다. 뒤바뀐 사람은 집착하여 바깥 경계로 삼아 경계를 따르면서 곱고 추한 제 분수를 요별(了別)하다가 겨우 기쁘고 싫은 감정이 생기기만 하면, 문득 진로(塵勞)의 자취를 일으킨다. |
그러므로 원법사(遠法師)가 이르기를 “본래의 바른 끝[端境] 어디서 나왔는가/있고 없는 데서 일어나고 없어진다./한 작은 것이 움직이는 경계에 관계하면/이는 산을 무너뜨리는 세력을 이룬다”고 했다. 안에서 하나도 내지만 않으면 아무 것도 없다. |
번뇌의 소굴을 막고 생사의 뿌리를 끊으려면, 다만 안으로 한 생각이 남이 없음을 관(觀)하라. 그러면 허공 꽃인 3계가 마치 바람에 연기 말리듯 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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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각의 영상인 6진(塵)이 끓는 물에 눈 뿌리듯 하리니, 텅 비고 끝이 없어서 하나의 진심(眞心)일 뿐이리라. |
『진취대승방편경(進趣大乘方便經)』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하나의 진실한 경계[一實境界]란 중생의 심체(心體)를 말한다. 본래부터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내지 일체 중생들의 마음과 일체 이승(二乘)의 마음과 일체 보살의 마음과 일체 부처님들의 마음도 모두가 똑같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 |
진여(眞如)의 모양이기 때문이니, 시방 허공의 온갖 세계에 이르기까지 마음의 형상을 구한다 하여도 하나의 구분(區分)도 얻을 수 없다. 다만 중생이 무명(無明)으로 어두워져 훈습(熏習)한 인연 때문에 망령된 경계를 나타내어 염착(念着)을 내게 될 뿐이니, 이른바 이 마음은 스스로 알 수가 없거늘 망령되이 스스로가 깨닫고 아는 생각[覺知想]을 일으켜 나[我]와 내 것[我所]이라고 헤아린다. 그러나 실로 지각하고 아는 모양이 없는 것이니, 이 망심(妄心)은 마침내 자체(自體)가 없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
만약 지각하고 알며 분별할 수 없다면, 온갖 법 모두가 스스로 존재할 수 없으며 언제나 망심에 의하여 분별하기 때문에 존재하게 된다. 이른바 온갖 경계는 저마다 스스로의 생각으로 존재하게 되지 않거늘 이것은 자기를 위한 것으로 알고 저것은 남을 위한 것으로 안다. 그러므로 온갖 법은 스스로 존재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구별되거나 다를 것이 없나니, 망심에 의하여 안에 스스로 없는 줄을 지각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
안과 밖에 아는 바 경계가 있다 하며 허망하게 갖가지 법이라는 생각[法相]을 내면서, 있다ㆍ없다ㆍ좋다ㆍ나쁘다ㆍ옳다ㆍ그르다ㆍ얻었다ㆍ잃었다고 하며 한량없고 그지없는 법이라는 생각을 내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온갖 모든 법은 모두가 망상으로부터 생기고 망심에 의지하여 근본이 된 줄 알아야 한다. |
그러나 이 망심은 스스로의 모양이 없기 때문에 역시 경계에 의지하여 존재하나니, 이른바 생각을 반연하여 앞의 경계를 지각하고 알기 때문에 마음이라고 말하게 된다. 또 이 망심은 앞의 경계와 함께 하므로 비록 다 같이 서로가 의지하여 일어나고 앞뒤가 없다손 치더라도 이 망심은 능히 온갖 경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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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근원이요 주인이 된다. |
왜냐 하면 망심에 의지하여 법계(法界)의 한 모양[一相]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무명이 있다고 마음을 설하며 무명의 힘의 인(因)에 의지하기 때문에 허망한 경계를 나타내었다가 역시 무명의 소멸에 의지하여 온갖 경계가 소멸하기 때문이다. |
온갖 경계에 의지하되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무명이 있다고 경계를 설하지 않으며, 또 경계를 의지하기 때문에 무명을 낸 것도 아니다. 모든 부처님은 온갖 경계에서 무명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또 경계의 소멸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무명의 마음이 소멸하나니, 온갖 경계는 본래부터 체성(體性)이 스스로 소멸되어서 일찍이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
이런 이치 때문에 다만 온갖 모든 법은 마음에 의지하여 근본이 된다고 할 뿐이다. 그러므로 알아야 하느니라. 온갖 모든 법을 모두 마음이라고 함은 이치거나 자체(自體)가 마음에게 포섭당한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또 온갖 모든 법은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어서 마음과 더불어 모양을 지어 화합하면서 존재하며, 함께 나고 함께 없어지면서 똑같이 머무름이 없다. 온갖 경계는 마음의 소연(所緣)을 따라 생각생각마다 서로 이어지기 때문에 머물러 지닐 수 있고 잠시 동안 존재하게 된다.” |
위에서와 같이 부처님의 말씀을 자세하고 간곡하게 널리 인용한 것은 다만 후학(後學)의 믿음을 이루고 우리의 자심(自心)을 밝히기 위해서일 뿐이다. |
『보장론(寶藏論)』에서 이르기를 “옛 거울에 아름다운 것을 비추면 그 아름다움이 저절로 나타나며, 옛 가르침에 마음을 비추면 그 마음이 저절로 밝아진다”고 했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한 마음이 온갖 마음에 두루 하여 티끌만큼도 다를 수가 없으며 온갖 성품[性]은 한 성품을 포함하여 법마다 모두가 똑같다. |
형상이 없으면서 텅 비어 사무친 허공을 그 누가 저것이니 이것이니 분별하겠는가? 자취를 찾으면서 법계(法界)를 궁구해도 가는 털만큼도 얻지 못하리라. |
무엇 때문에 중생 경계 안에서 바로 지금 나타나느냐 하면, 이것은 곧 모두가 망령된 생각으로 인하여 쌓고 훈습하여 이룩된 것이니, 마치 거울 위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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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가 빛과 그림자를 막는 것 같고 공중의 안개가 맑은 하늘을 잠시 동안 흐리게 함과 같다. |
한 법이라도 앞에 나타남이 있으면 이것은 모두가 제 마음에서 분별한 것일 뿐이다. 설령 장차 한 생각이 겨우 일어난다 하여도 모두가 환영[幻]의 경계로 인하여 끌어낸 것이다. 일어나고 사라짐이 같은 때라 다시는 앞뒤가 없다. 만약 능소(能所)에 체(體)가 없는 줄 알면, 인공(人空)과 법공(法空)을 단박에 깨쳐서 문득 물아(物我)가 의지함이 없음을 환히 알고 비로소 경계도 고요하고 마음도 고요함을 믿으리라. 또 마음이 생겨도 이것은 그것으로 인한 것이 아니니, 경계가 일찍이 생긴 일이 없기 때문이요, 마음이 없어져도 역시 다른 것으로 인하지 않았으니 경계가 일찍이 없어진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알아라. 경계는 마음으로 인하여 일어났다가 도로 마음을 따라 없어진다. |
마음이 생길 뿐 경계가 생긴 것이 아니며, 마음이 없어질 뿐 경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치 어미 고기가 새끼 고기를 생각하는 것과 같고, 벌의 왕이 뭇 벌들을 거두어 줌과 같다. 만약 어미 고기가 생각하지 아니하면 새끼 고기는 죽을 것이요, 벌 왕이 거두어 주지 않으면 뭇 벌들은 흩어지게 되리라. 그러므로 마음에 반연한 생각이 있으면 온갖 경계가 무성하게 일고, 생각하고 지님이 없으면 가는 티끌만큼도 나타나지 아니한다. 끝내 마음 밖에는 법이 없고 마음과 함께 반연이 되나니, 다만 이것은 자기 마음에서 나서 도리어 마음과 더불어 상대가 된다. |
그러므로 『능가경(楞伽經)』에서 이르기를 “제 마음에서 나타나는 바 분제(分劑)를 깨닫지 못하고, 내식(內識)이 바꾸어져서 바깥으로 나타나 빛깔[色]이 되는 줄을 깨닫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제 마음에서 나타난 것일 뿐인데 이와 같은 분제를 통달하지 못하므로, 나쁜 소견의 이론[惡見論]이라고 한다. 마음에서 나타나 일어나는 차별된 소견을 모르기 때문에 분제(分劑)라 한다. |
만약 종경(宗鏡)의 바른 뜻 안에서가 아니면, 모든 지해(知解)는 다 삿된 도[邪道]요, 종당(宗黨)이어서 형상과 언설을 시설한다 하여도 모두가 나쁜 소견의 논의에 떨어진 줄 알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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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종경(宗鏡)의 법의 뜻이야말로 기대어 준(準)할 만하며, 바른 도리이기 때문에 어긋남이 없어서 의지하고 행할 만하다. 바로 그 앞에서 힘을 얻게 되면, 만 가지 삿됨도 작용하지 못한다. 그것은 천(千) 성인이 위의(威儀)를 고치지 않고서도 능히 미혹의 티끌[惑塵]을 씻고 막힌 생각[滯慮]을 녹이며 그윽한 포부를 맑게 하고 신묘한 심금(心襟)을 환히 알 수 있나니, 홀로 미묘하고 남보다 월등하게 뛰어나기 때문에 아무 것에도 견줄 수 없다. |
[문] 만약 진(眞)도 있고 망(妄)도 있다고 말하면 이것은 법상종(法相宗)이요, 만약 진도 없고 망도 없다고 말하면 이것은 파상종(破相宗)이다. 지금은 법성종(法性宗)을 논하거늘, 어찌하여 진을 세우고 망을 세우며, 또 진이 아니고 망이 아니라고 설명하는가? |
[답] 지금 종경(宗鏡)에서 논한 바는 법상(法相)으로서 있다[有] 함을 세우는 것도 아니고 파상(破相)으로서 공(空)에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성종(性宗)의 원교(圓敎)에 의거하여 바른 도리를 밝히는 것뿐이니, 곧 진여(眞如)로서 불변(不變)이 수연(隨緣)을 장애하지 아니하는 바로 그 원만한 이치이다. |
법상종은 한결같이 진(眞)이 있고 망(妄)이 있다고만 말하며, 파상종은 한결같이 진이 아니고 망이 아니라고만 말한다. 이 두 가지 문(門)은 저마다 한 편을 집착한 것이어서 다 헤아리거나 말로 할 수가 있다. 지금의 이 원종(圓宗)은 앞의 공(空)과 유(有)의 두 문이 다 같이 존재하고 또 어기거나 장애하지도 아니하니 이것이야말로 헤아리거나 말로 할 수조차 없는 것[不可思議]이다. |
만약 결정코 있다[有]ㆍ없다[無]는 두 문을 말한다면, 모두가 헤아리거나 말로 할 수 있다. 이제 물들지 않으면서 물든다[染] 하면 불변수연(不變隨緣)이요, 물들면서 물들지 않는다 하면 수연불변(隨緣不變)이다. 있다ㆍ없다 함으로써 실로 생각할 수가 없고 또한 진(眞)과 망(妄) 때문에 미혹될 수도 없다. 이야말로 헤아리거나 말로 할 수 없는 종취(宗趣)로서 정식(情識)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이제 가정으로 글과 뜻[文義]을 시설하여 다스리는 것은 그 삿된 집착을 깨뜨리기 위해서일 뿐이다. 만약 정식(情識)이 비면 지혜가 끊어지고, 병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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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으면 약이 없어진다. 처음과 끝의 유래를 잘 궁구하여야 비로소 뚜렷하고 항상하는[圓常] 뜻을 환히 안다. |
그 때문에 복례 법사(復禮法師)가 천하의 학사(學士)들에게 물은 진망게(眞妄偈)에 이르기를 “참된 법성(法性)은 본래 깨끗하거늘/망심은 어디서 일어나는가./진으로부터 망이 생긴다면/이 망이 어찌 그칠 수 있으랴./처음이 없으면 곧 끝이 없으며/마지막이 있다면 마땅히 시작도 있어야 한다./시작이 없으면서 마지막도 없거늘/길이 품어서 이 이치에 어둡구나./그대들을 위하여 현묘한 것[玄妙] 여나니/분석하여 생사에서 벗어나지이다”라고 했다. |
그러자 징관 화상(澄觀和尙)이 대답하기를 “진을 미혹하면 망념이 생기고/진을 깨치면 망이 곧 그친다./능미(能迷)는 소미(所迷)가 아니거늘/어찌 온전히 비슷할 수 있으랴./종래(從來)로 일찍이 깨치지 못했기에/망에 비롯함이 없다고 말한다./망을 알면 본래 스스로 진이거니/비로소 이것이 항상하는 도리이다./분별하는 마음을 없애지 못했는데/어떻게 생사에서 벗어나겠는가”라고 했다. |
종밀 선사(宗密禪師)가 해석하였다. |
“대승경교(大乘經敎)에는 통틀어 세 가지 종(宗)이 있을 뿐이다. 첫째는 법상종(法相宗)이요, 둘째는 파상종(破相宗)이며, 셋째는 법성종(法性宗)이다. 이제 이 질문은 바로 법성종 중의 살촉[鏇]을 깨무는 관절(關節)로서 두 가지 종(宗)은 묻지 않았다. 만약 법상종으로 말한 것이라면 온갖 유루(有漏)의 망령된 법과 무루(無漏)의 깨끗한 법이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저마다 종자가 있고 아뢰야식(阿賴耶識) 중에 있으면서 연(緣)을 만나 훈습(熏習)하며 이내 저마다 자성(自性)을 쫓아 일어나되 도무지 진여(眞如)와는 관계되지 않거늘 누가 진으로부터 망이 생긴다고 말하겠는가? 그 진여는 한결같이 무위적멸(無爲寂滅)이요 일어남도 없고 그침이 없음을 말한 것이므로, 저 진으로부터 망이 생긴다고 힐난할 수 없다. 파상종의 경우에는 한결같이 범부와 성인ㆍ더러움과 깨끗함 등 모든 것이 공(空)이어서 본래 아무 것도 없음을 말한 것이므로, 설령 하나의 법이 열반보다 더 뛰어나게 나타난다 하여도 역시 허깨비요 꿈과 같다. 그것은 또 본래가 진(眞)조차 세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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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거늘, 하물며 망(妄)이겠는가? 그러므로 진으로부터 망이 생긴다고 힐난하지 아니한다. |
다만 법성종이 의심될 뿐이다. 이 종(宗)의 경론(經論)대로 진에 의지하여 망을 일으킨다고 말하면, 마치 법신(法身)이 다섯 갈래[五道]에 헤매고 여래장(如來藏)이 괴로움과 즐거움 등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망을 깨치면 그대로가 진이라고 말하면, 마치 처음 발심(發心)할 때에 이내 아뇩보리(阿耨菩提)를 이루며 망을 알면 본래 스스로 진인지라 부처가 나타나고 이내 청정하여진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또 범부와 성인은 한 덩어리요 차별이 없다고 말하면, 마치 온갖 중생들은 본래 정각(正覺)을 이루었고 반열반(槃涅槃)하며 비로자나(毘盧蔗那)의 몸 안에 여섯 갈래[六道]의 중생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고 말한 것과 같다. 진망(眞妄)은 서로가 즉리(卽離)하나니 번뇌와 보리(菩提)에 처음과 마지막이 없다고 말하며, 또 번뇌가 끝까지 없어져야 비로소 묘각(妙覺)이라 한다고 설명한다. |
『화엄경(華嚴經)』과 『기신론(起信論)』 등의 첫머리와 끝의 글과 뜻의 종취(宗趣)에는 걸림이 있고 스스로의 말이 서로 어긋난다. 헤아려서 그를 가리려고 하나하나를 취하고 하나를 버릴 수가 없다. 그를 합하려고 하여도 또 화합하기 어려우며, 다 함께 그를 쓰려 하여도 또 서로가 어긋난다. 시험 삼아 천하의 학사들에게 묻거니와 통달한 이는 곧바로 진(眞)을 알아 도(道)에 들리라. 만약 모든 스승들의 대답한 바가 모두 묻는 뜻에 미혹하였고, 모두가 모양이 소멸되고 진리에 귀착하는 것에 의거하여 설명한 것이라면, 도무지 저 묻는 바는 진으로부터 망이 일어나는 원유와 망을 닦아 진을 증득하는 도리를 모르는 것이리라. |
그러나 진을 미혹하여 망을 일으키는 데는 대개 연유가 있다. 망을 쉬면 진으로 돌아감에도 까닭이 없지 아니하다. 복례 법사가 어찌 진망이 다 같이 고요하고 이사(理事)가 모두 여여(如如)함을 몰라서였겠으며, 여여하고 고요한 가운데서 어찌 문답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두 가지 문이 있어서 뜻과 도리가 쉽게 분별되며, 곧 어기거나 방해됨이 없다. 첫째는 한결같이 망이 있으므로 끊어야 하고, 진이 있으므로 증득하여야 한다 함을 설명하는 것이요, 둘째는 한결같이 진도 아니고 망도 아니며 범부도 없고 성인도 없음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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