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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바라밀
 
 
 
카페 게시글
지대방 스크랩 만파식적
연지 추천 0 조회 14 06.11.21 23:4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만파식적에 관한 유래"

 

"대"금에 관한 자세한 문헌이 없어 확실한 발생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대금의 기원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 만파식적에 관한 설화가 삼국유사 권 2 기이(紀異) 만파식적조와 삼국사기 권 32 잡지 제 1 악조(樂條)에 기록되어 있는 바, 다음에 삼국유사에 기록된 내용을 인용하기로 한다.


제삼십일대 신문대왕(神文大王)의 이름은 정명(正明)이요, 성은 김씨다. 개요(開耀) 원년 신사(辛巳, 681) 칠월 칠일에 왕위를 올랐다. 아버지 문무대왕을 위하여 동해변에 감은사(感恩寺)를 세웠다.-절의 기록에 이런 말이 있다.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려 하여 이 절을 처음으로 지었으나. 역사(役事)를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자 바다의 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왕위에 올라 개요 2년(682)에 역사를 마쳤는데, 금당(金堂)의 계하(階下)에 동쪽을 향해 구멍 하나를 뚫어 두었다.


이것은 용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대게 유언으로 유골을 간직한 곳은 대왕암이라 하고, 절은 감은 사 라 이름했으며 후에 용이 나타난 곳을 이견대(利見臺)라 하였다.- 이듬해 임오(壬午) 오월 초하루 - 어떤 책에는 천수(天授) 원년이라 했으나 잘못이다 - 에 해관(海官) 파진찬 박숙청이 아뢰 었다


"동해 안에 있는 작은 산이 떠서 감은사로 향해 오는데 물결을 따라 왔다갔다 합니다."


왕은 이를 이상히 여겨 일관 김춘질 - 혹은 춘일이라고 쓴다 - 에게 점치게 하니 아뢰었다.


"대왕의 아버님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시어 지금 삼한을 진호 하시고 또 김유신 공도 삼십삼천의 한 아들로서 지금 인간으로 내려와서 대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이 덕을 같이하여 성을 지키는 보물을 내어 주시려 하니, 만약 폐하께서 해변에 행차하시면 반드시 값을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얻을 것입니다."


왕은 기뻐하여 그 달 칠일에 이견대에 가시어, 그 산을 바라보고 사자를 보내어 살펴보게 했다. 산 생긴 형세는 거북의 머리와 같은데 위에는 한 줄기의 대나무가 있어,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 어떤 이는 산도 또한 대나무처럼 낮에는 벌어지고 밤에는 합해졌다고 한다 -


사자가 돌아와서 사실대로 아뢰니 왕은 감은사에 가시어 유숙했다. 이튿날 오시에 대나무가 합해져 하나가 되자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일어나 어두컴컴해지더니 칠일 동안 계속되었다.


그 달 십육일에 이르러서야 바람이 자고 물결이 평온해졌다. 왕은 배를 타고 바다에 떠 그 산에 들어가니 용이 검은 옥대를 받들어 왕에게 바치었다. (왕은 용을) 맞아 같이 앉으면서 물으셨다.


"이 산과 대나무가 혹은 갈라지기도 하고 혹은 합해지기도 하니 무슨 까닭이냐?"


"비유해 말씀드리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란 물건은 합쳐야만 소리가 나게 되므로 성왕께서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리게 될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왕께서는 대나무를 가지고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지금 왕의 아버님께서는 바다속의 큰 용이 되셨고, 김유신은 다시 천신이 되셔서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하여 이 같은 값을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저에게 주시어 저로 하여금 그것을 왕께 바치게 한 것입니다."


왕은 몹시 놀라고 기뻐하여 오색 비단과 금옥을 용에게 주고, 사자를 시켜 대나무를 베어 가지고 바다에서 나왔다. 그 때 산과 용은 문득 없어지고 보이지 않았다. 왕은 감은사에서 유숙하고 십칠일에 기림사 서쪽에 있는 시냇가에 가서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드시었다. 태자 이공 - 효소대왕 -이대궐을 지키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와서 경하하며 천천히 살펴보고 아뢰었다.


"이 옥대의 모든 눈금이 모두 진짜 용입니다."


"네가 어찌 아느냐?"


"눈금 하나를 떼어 물에 넣어서 그것을 보이겠습니다."


이에 왼편 둘째 눈금을 떼어 시냇물에 넣으니 곧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 땅은 못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 못을 용연 이라 한다. 왕은 돌아와서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에 간직해 두었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낫고, 가물 때는 비가 오고, 비올 때는 비가 개이고, 바람이 가라앉고, 물결은 평온해졌다. 이 피리를 만파식적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효소왕 때에 이르러 천수 4년(693)에 부례랑이 살아 돌아왔던 기이한 일로 인하여 다시 만만파파식적이라 이름했다. 자세한 일은 그의 전기에 나타나 있다.



이상의 만파식적 설화를 대금의 기원으로 둘 수도 있겠느나 전문가들의 견해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이미 가로부는 저(橫笛)가 우리나라에 널리 퍼져 불리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고려시대 이후로는 모든 악기를 조율(調律) 하는데 표준으로 삼아왔다.


설화에 등장하는 만파식적은 악기로서 단군신화의 천부인(天符印), 진평왕의 천사옥대(天賜玉帶), 이성계의 금척(金尺) 등과 같이 건국할 때마다 거듭 나타난 신성한 물건과 비슷한 성격을 지닌다. 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에 이어서 즉위한 신문왕은 정치적 힘이 결핍과 일본의 침입이라는 문제거리를 타결하기 위하여 지배층의 정통성과 동질성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강력한 왕권을 상징할 수 있는 신물을 등장시킨 이러한 신화를 만들었으리라고 추측 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통일신라의 건국신화가 구체적 모습을 갖추면서 형성될 수 있었으나, 그 의미가 왕권에 관한 것으로 한정되고 사회조직의 원리와 이념을 구현하고 있지는 않아서, 신화의 기능이 약화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출의 문무대왕릉


 

만파식적설화를 잇는 흥미로운 이야기 하나가 있어 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 신라의 국보 만파식적과 관련하여 비록 그 신물(神物)은 오늘 찾을 수 없다 하더라도, 그 국보가 신라시대의 대표적 미술품으로 조형되어서 오늘에 전하고 있는 사실을 지적해 두겠다.


그것은 특히 신라 종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오늘 전래하는 신라 종은 국내에 2구(口)가 있어 그 하나는 성덕대왕신종, 속칭 에밀레종이요, 다른 하나는 오대산(五臺山) 상원사(上院寺)에서 전하는 종이다. 이들 2구는 모두 똑같이 종 최정부(最頂部)에 종을 달아매는 용뉴(龍뉴)가 있는데, 그 모습이 아주 특이해서 중국이나 일본 종과 다르다.


이들 중·일의 종에서는 똑같이 두 마리의 용머리를 앞뒤에 조각하고 몸을 곡선으로 했을 뿐인데, 신라 종이나 그 후의 고려 종은 거의 예외없이 하나의 용머리와 굴곡된 몸과 그 죄우에 달린 다리로써 용을 표현했다. 그리고 따로 높은 원통을 세워서 용이 마치 이 원통을 짊어지고 두 발로 애써 전진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대체 다른 곳에 없고 오직 신라 종에서만 볼 수가 있는 이 둥근 통은 무엇일까.


필자는 이것이 바로 신라의 국보 만파식적이라고 생각하며, 한 마리의 용은 그 설화에 보이는 동해룡이라고 생각한다. 귀중한 신적(神笛)이기에 동해룡이 그것을 등에 짊어지고 온갖 힘을 다해 두 발로 움직이려는 동작의 순간을 표현하려 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 원통은 대(竹)로 만든 만파식적을 상징하기에,


첫째, 그 기본형이 원형이다.


둘째, 대를 모범으로 삼았기에 마디가 있다.


셋째, 대이기에 내공(內空)이어서 종신(鐘身)에 이르기까지 관통되어 있다. 이 같은 특징은 신라 종 꼭지에 세워진 원통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의 주종공장(鑄鐘工匠)은 신라 종의 정상부에 이 같은 동해상의 설화를 조형화하여 신라의 역사와 조형에 알맞은 독특한 양식을 창출한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기왕에는 음통, 음관 등으로 불러 마치 종소리와 관련시켜서 설명하려 했는데, 필자는 그보다는 신라의 공인들이 자기 나라 종 위에다 나라의 국보인 '만파식적'이라는 국보를 올려놓음으로써 신통력을 지닌 신라 국보의 존재를 높이 받들고 신라 종만의 특색을 표현하려 했던 것으로 보고자 한다.」


<신라의동해구>(황수영,열화당 교양 한국문화사-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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