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박제천시인방산재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자연의 본성을 입체화시킨 상상미학의 결정
박제천
한마디로 말해 요즘 시는 읽기가 어렵다. 시만 쓰는 전업시인이 읽어도 어렵다. 시가 노래라거나, 한 시대 삶을 사는 사람들의 절실한 마음이나 현실이라는 소리와도 한참 어긋나 있다. 시가 독자적인 방법론을 택해 진화를 거듭하다보니 독자가 따라잡으려면 아득한 거리에 있다. 그래서 시인과 독자를 연결시켜주는 평론가라는 전문가들이 있지만. 이들 평론가 역시 입지에 따라 더욱 어렵게 해설하거나 아예 딴소리를 늘어놓는 경우도 생긴다. 그런가하면 시는 쉬워야 한다는 시인들도 나타났다. 쉽게 쓰다보니 어린아이 일기나 동시 정도로 독자를 확보해 끝도모를 자기복제에 매달리는 시인도 적지않다.
하지만 세상이치 그대로 시를 어렵게 쓰거나 쉽게 쓰는 시인들 말고도 세상에는 제대로 시를 써보려는 시인도 많다. 여기 첫 시집 [어리연꽃 피어나다]를 펴내는 김진환 시인의 작품들 역시 시의 정도를 지켜나가면서 좋은 시를 만들어내고 있다. 독자 여러분의 정독을 바란다.
김진환 시인은 2022년 [문학과 창작]의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한 시인이다.
“김진환 시인의 시에서는 일상적인 사건을 비범하게 엮어내는 정갈한 시어가 돋보인다. 겹도라지꽃, 어리연, 삼척 대금굴 등, 자연친화적인 소재로 시의 도입부를 열어 세속적인 꿈과 욕망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풍경 그대로를 보여준다. 찻잔에 그려진 겹도라지꽃이 별로 뜨고 다시 누이의 얼굴로 펼쳐지는 시상의 전개가 자연스럽다. 「가슴 천둥」에서는 대금굴 천둥소리가 “속에서 속으로 갇혀버린 함성”으로 들려오고 더 나아가 시적 화자의 간절하게 치밀어 오르는 욕심인 “가슴 천둥”으로 귀결된다. 자연의 소리가 속으로 갇혀버리는 침묵의 통과의례를 거쳐 마침내 내면의 소리를 듣게 되는 의미망의 확장이 시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박제천, 이길원, 이영신, 주경림(글)
심사평이 말해주듯 세상물정이나 풍경을 간절하게 통과시켜 이세상 두두물물의 가슴천둥을 시로 뿜어내는 장년기 시인의 솜씨가 돌올하기 그지없다.
1
서정시란 여러 가지 기능을 갖고 있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덕목은 마음을 닦는 일이다. 나이들면 세상 보이는 것들의 의미가 변질되게 마련이다. 어려서의 순정한 마음에 때가 끼고 얼룩이 져서 피사체가 보이는 대로 보는 대신에 자꾸 의미를 덧대거나 겹쳐 보게 된다. 한송이 꽃이 개화하는 순간마저 그 황홀한 기쁨을 만끽하는 대신 개화 자체에 다른 의미나 이유를 찾거나 색깔의 농담이나 꽃봉오리의 생김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타박을 놓는다. 그래서 진정한 서정시는 사춘기 시절의 때묻지 않은 순수한 나이에나 맛볼 수 있다는 말이 전해오기도 한다. 이 때문에 평생 마음을 닦는 수도승이나 승려와 같은 신앙인에게 우리네 삶의 얼룩을 닦아주고 씻겨달라고 종교에 의지하게 된다. 좋은 서정시도 그러한 종교의 기능을 발휘할 때가 많다. 우리 마음에 낀 때나 얼룩을 깨끗이 씻어내 주기 때문이다. 워즈워스가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며 어릴 적 무지개를 바라보던 설레임을 노래하듯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어린이로 돌아가자는 이유가 바로 그런 것이다.
안경을 닦으면 세상이 밝게 보인다
얼룩이 묻은 렌즈를 닦으면
무심코 지나치던 주변 풍경
거리를 오고 가는 얼굴들이 선명해진다
저만치 흐릿하게 보이던 것들
미처 알아채지 못하던 당신의 몸짓
한두 번쯤은 더 자세히 보게 된다
찬찬히 살펴 가며 생각하게 한다
때가 낀 안경을 벗어 꼼꼼히 닦는다
눈이 나쁘다는 핑계로 대충 흘려보낸 것들
부대끼던 거리의 표정을 살필 겨를도 없이
그저 앞만 보고 달려가던 욕심을 비워 낸다
어느새 송두리째 굳어버린 본색을 펼쳐놓고
마음이 부끄럽지 않게 닦아낸다
아리아리한 눈꺼풀을 천천히 풀어내고 있다.
-「마음을 닦다」 전문
평생 한마음을 지니기 위해 마음을 닦는 일에는 오랜 수행과 시간이 필요하지만 시인은 일상생활에서 잠시만이라도 마음을 닦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안경을 닦으면 세상이 밝게 보이”듯이 “얼룩이 묻은 렌즈를 닦으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더 잘 보이는 것은 안경을 닦는 것이 곧 마음을 닦는 것이기 때문이다. 육신의 노화를 방지하기 위해 마련된 안경을 활용해 마음을 조금이라도 닦아내는 새 방편이다. 안경 역시 오래 끼다보면 이물질에 오염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안경을 닦아 쓰면 닦아 쓰기 이전과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저만치 흐릿하게 보이던 것들”과 “미처 알아채지 못하던 당신의 몸짓”이 보이는 것도 “욕심”이라는 마음의 번뇌를 닦아내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이 흐려지고 사욕에 차면 성(性)의 본래 모습대로 심(心)이 발현되지 못한다고 주장한 퇴계의 지적처럼, 마음을 비우고 순수한 정으로 본성이 채워지면 삼라만상이 더욱 선명하게 보이게 되는 동시에, 세상일을 “한두 번쯤은 더 자세히 보게” 되고, “찬찬히 살펴 가며 생각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새 송두리째 굳어버린 본색”이란 세상을 살면서 오염된 부끄러운 자아일 것이다. 치열한 자아성찰을 통해 “마음의 먼지”를 닦아내면 잃어버린 본래의 마음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아리아리한 눈꺼풀을 천천히 풀어내”는 것은 곧 욕심으로 흐려진 마음의 눈을 닦아내는 자기수양의 행위를 의미한다.
어리연 하얀 꽃이 성큼 피어올랐다
어스름을 틈타 내려앉은 별처럼 깨끗하다
일찍 잠을 깬 물방개 한 마리
연잎을 깨물고 있다
연잎은 물의 파장에 간지러워 흔들리다
술렁이던 바람을 붙잡는다
연지에서 고요하게 중심을 잡는 일
그 중심을 붙들고 꽃을 피워내는 일
먹장구름이 묵직해져
어리연 하얀 꽃을 하나둘 흔들고
꼿꼿이 피어오른 어리연꽃은
물 아래의 중심에서
발뒤꿈치를 바짝 치켜들고 서 있다.
-「어리연꽃 피어나다」전문
시의 첫 연에서 “어스름을 틈타 내려앉은 별처럼 깨끗”한 하얀 어리연꽃은 사욕이 가라앉아 고요하고 맑은 인간의 본성(性)을 표상한다. 안경을 닦듯 마음을 닦아낸 시인이 온갖 욕망과 번민이 뒤섞인 “연못”에서 “고요하게 중심을 잡는 일”, “그 중심을 붙들고 꽃을 피워내는 일”은 경건한 삶의 자세를 의미한다. 중용에 보면 ‘인심(人心)은 오로지 위태롭고, 도심(道心)은 오직 은미하니 오직 정(精)하며 한결 같아야 진실로 중(中)을 잡는다’라는 말이 나온다. 인심은 인욕(人慾)의 근본이어서 위태로우니, 마음을 한 가지로 함으로써 미약한 도심이 우세하도록 경(敬)의 상태를 유지할 때 과오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건한 삶의 자세는 시 「별나라 내 별」에서 “마음 갈피에 깊숙이 끼워두었던 별/ 부스러지지 않도록/조심조심 붙들고 지나갑니다”와 같은 ‘신독(愼獨)’의 자세로 이어진다. 화자는 왜 이렇게 거경궁리(居敬窮理)의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가? 그것은 아마도 “가슴천둥”소리가 끊이지 않는 내면의 정(情) 때문일 것이다.
삼척 대금굴 땅 밑에서
천둥소리를 들었어요
칠흑을 헤집고 제 길을 찾아드는 저릿한 울림
바닥을 흔드는 두툼한 소리를 들었어요
용천수 쿵쿵 떨어져 내리는 소리
속에서 속으로 갇혀버린 저릿한 함성
기어이 듣고 말았어요
그러면 그렇지, 털썩 주저앉는
가슴 천둥을 듣고 말았어요
한껏 부푼 자궁에서 터져 나온 양수처럼
이 앙다물고 용쓰는 내 안의 간절함
치밀어 오르는 욕심
그만 들키고 말았어요.
-「가슴 천둥」전문
『문학과 창작』 신인상 수상작 중의 하나인 위의 시에서 화자는 “삼척 대금굴 땅 밑”에서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칠흑을 헤집고 제 길을 찾아드는 저릿한 울림”으로, “바닥을 흔드는 두툼한 소리”로 다가온다. “속에서 속으로 갇혀버린 저릿한 함성”인 그 소리는 아마도 오랫동안 억압해 왔던 화자 자신의 무의식에서 들려오는 소리일 것이다. 그것은 또한 “이 앙다물고 용쓰는 내 안의 간절함” 혹은 “치밀어 오르는 욕심”으로 표상된 무의식적 본능의 소리일 것이다. 평상시에는 잘 들리지 않아 알 수 없었던 그 소리가 무의식의 공간을 연상케 하는 동굴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들려온 것이다. 그러한 무수한 억압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보름이 지나니 달이 금방 이지러졌다
내 마음을 빼닮았다
이지러진 것이 어디 마음뿐이랴
생활이 이지러지고
너와의 만남이 어그러지고
거무튀튀한 잡티도 생겨났다
이지러지는 것은 품어 안은 것을 내려놓는 일
제 몸의 빛으로 누군가의 얼굴을 씻겨주고
한 뭉텅이의 흔적을 덜어내는 몸짓이리라
이지러지고 어그러지고
또 비워내다 보면
다시 차오를 때도 있을 것이다
보름이 지나니 달이 자꾸 이지러졌다.
-「달이 이지러지다」전문
위의 시에서 화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커졌다가 이지러지는 달의 순환에 빗대어 우리 인생의 본질과 마음의 변화를 토로한다. 그것은 곧 일상의 “생활”이 그러하고, “너와의 만남”이 그러하고 “거무튀튀한 잡티”로 표상되는 육체의 변화가 그러하다. 모든 것이 변해가는 무상한 세월은 점진적으로 마음속에 “품어 안은 것”들을 내려놓게 한다. 그러나 “이지러지고 어그러지고/ 또 비워내다 보면” 언젠가 “다시 차오를 때도 있을 것”이라는 깨달음은 자연의 순환에 순응해가는 삶의 지혜를 암시한다. 삶이 주는 무수한 억압과 고통을 견뎌내며 무상한 세월을 순수한 정(情)으로 살다 보면 인간 본연의 성(性)이 길러질 수도 있을 터이다. 이러한 지혜와 달관의 자세는 시 「동강할매꽃」에서 “저무는 저녁노을도 무심히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에 의해 구체화된다. 달관의 자세와 시선은 그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시 「손톱을 깎으며」에서 처럼 “끈적거리는” 미련과 생각들을 끊임없이 닦아내고, 시 「얼굴을 자꾸 씻는 이유」에서 처럼 “덕지덕지 눌어붙은 개운치 못한 기억들”을 지워내고, “지우고 비워내도 사라지지 않는 흔적들”을 닦아내고, “찌들고 얼룩진 얼굴”을 씻어낼 때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치열한 자기 수양의 끝자락에서 비로소 단풍과 같은 황홀한 인생의 순간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산허리에서 숲을 본다
저마다 치열하게 살아온 생활의 방식
감추지 못한 고집들이 서로 부대끼다가
상처로 멍들고 얼굴 붉히는 것을 본다
그러나 아직은 꼿꼿한 잎새들
제 마음을 내던지면 저리 황홀해질 수 있는지
마지막 순간까지 당당해질 수 있는 것인지
다시 힘을 내어 불타오르는 것을 본다
-「나도 단풍이었다」부분
위의 시에서 화자는 인생의 “숲”을 완성하는 길이 결코 수월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저마다 치열하게 살아온 생활의 방식”으로 인해 “감추지 못한 고집들이 서로 부대끼다가” “상처로 멍들고 얼굴 붉히는” 과정을 지나 고집으로 가득한 “제 마음을 내던지면” 비로소 사욕을 벗어난 순수한 감정으로 본성이 충만하게 채워져서 “황홀해질 수 있”음을, “마지막 순간까지 당당해질 수 있”음을 발견한다.
2.
한 편의 시는 시를 쓴 사람의 영혼의 구조를 보여준다. 영혼은 두 가지 특질과 방향성을 갖게 되는데, 그 안에는 목표 지향적이고 지배적인 남성적 측면과 관계 지향적이고 공감적인 여성적 측면이 함께 존재한다. 김진환 시의 화자가 강한 에로스적 열정으로 가득한 것은 주변의 사랑했던 여성들이 세상을 떠나버려 마음속에 깊은 구멍이 생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것은 곧 남성의 내면에 존재하는 여성성, 즉 아니마(anima)가 결핍되어 균형이 깨졌음을 보여준다. 일제 강점기의 시인 김소월이 일제라는 남성적 폭력이 억압하는 세상에서 “엄마야 누나야”를 비롯해 “못잊어”와 같은 애절한 그리움의 노래를 부른 것도 아니마의 결핍에서 유래한 것이 아닐까 한다. 몸이든 마음이든 균형이 깨지면 그것을 회복하려는 ‘복구추동’의 노력이 본능적으로 나타나는데, 그 구체적 행동의 하나가 시인들의 경우에는 시를 쓰는 행위이다. 시를 쓰려고 하는 동기는 시인의 에로스적 추동에서 나오는 것이다. 김진환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에로스(eros)란 생명을 유지시키고 발전시키며 친밀하고 유쾌한 신체적 접촉을 갖고 타인과 사랑을 나누며 개인의 창조적 발전을 도모하는 생존에 대한 본능, 즉 삶의 본능을 말한다. 이번 시집에는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 고갈되어버린 아니마에 대한 갈증으로 인한 그리움의 시편들이 많이 보인다. 아니마란 우리 마음속의 혼(넋, 심령)과 같은 것으로 집단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내적 인격’이라 할 수 있다. 남성 속의 여성성인 아니마와 여성 속의 남성성인 아니무스(animus)는 우리의 꿈, 신화, 민담에 상징을 통해서도 나타나며 무의식의 원형 중에서도 특수한 원형으로서 자아와 의식의 심층이자 중심인 ‘자기(self)’에게로 인도하는 인도자, 또는 매개자의 역할을 한다. 이러한 자기실현의 매개자로는 광야의 예언자, 성모마리아, 관세음보살 등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중세의 신비적 경서인 떠오르는 생명의 빛에서는 아니마의 속성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나는 들판의 꽃이요, 골짜기의 백합이다. 나는 아름다운 사랑의 어머니, 인식, 그리고 거룩한 희망이다. 나의 손을 벗어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김진환의 이번 시집 가운데 꽃을 소재로 한 시들이 유난히 많은 것도 어쩌면 그러한 오브제들이 화자의 아니마적 열망에 불을 붙여 시를 쓰게 함으로써 참된 자기에게로 인도하는 매개자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오브제들에는 화자의 아니마 결핍 충족에의 욕구와 에로스적 열망이 은밀하게 배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피그말리온
공들여 깎고 다듬었던
너의 고운 얼굴을 매만지고
가녀린 허리를 감싸 안고
엎드려 발등에 입 맞추고 있지
나의 신부 갈라테이아
이젠 스스로 숨 쉬며 웃고 떠들지
혼자 옷도 입을 수 있고
눈은 시클라멘꽃으로 눈부시게 피어나지
세상에 당신 같은 여자는 없어
내 가슴은 전율하는 피뢰침이 되고
입술은 소프라노 아리아에 기꺼이 빌려주고
꿈길에선 아침 바다가 햇살처럼 펼쳐지지
오늘도 나는 에로스의 반지를 만지작대며
베누스 신이여, 아프로디테여
내 짝의 환생을 갈망하며 기도하지
-「나는 피그말리온」전문
위의 시에서 화자는 자신을 “피그말리온”이라고 규정한다. 주지하다시피 피그말리온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키프로스의 조각가이다. 화자는 독신으로 살며 이상적인 여인상을 조각하던 피그말리온에 자신을 감정이입하여 죽은 아내의 “환생”을 갈구한다. 마치 피그말리온이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조각상과 같은 아내를 얻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집으로 돌아와 조각상에 입 맞추자 조각상이 살아있는 여인이 되어갔듯이, 화자에게도 다시 한 번 그러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갈구하며 에로스의 열망을 불태우고 있다. “나의 신부 갈라테이아”를 열망했던 피그말리온처럼 이 시의 화자는 오늘도 “에로스의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들판의 꽃이요, 골짜기의 백합’이며 ‘아름다운 사랑의 어머니’이자, ‘거룩한 희망’인 아니마를 그리워하고 있다. 죽은 아내를 대상으로 한 시와 달리 다음의 시에서는 또 다른 아니마의 표상인 ‘누이’에 대한 그리움이 ‘꽃차’라는 오브제를 통해서 아름답게 표상된다.
겹도라지꽃이 피어납니다
찻잔에 담긴 잔잔한 바다에서
진보랏빛 은은한 향기를 내며
찻잔 속에서 때 이른 별이 눈뜹니다
누이의 얼굴이 꽃이파리로 펼쳐집니다
얇고 촉촉한 입술
파르르 떨리는 고운 눈매
밀려갔던 고운 파도가 조심조심 되돌아오면
못다 한 말이 있는 듯 꼼지락댑니다
꽃을 따서 말리고 얌전하게 덖어
차곡차곡 병 속에 담아 놓은 누이의 방
겹도라지꽃이 다시 피어납니다.
-「겹도라지꽃 누이의 방」전문
『문학과 창작』 신인상 수상작 (2022년 봄호) 중의 하나인 위의 시에서 화자는 “찻잔에 담긴 잔잔한 바다에서/ 진보랏빛 은은한 향기를 내며” “이른 별”처럼 떠오르는 “누이”를 그리워한다. “얇고 촉촉한 입술”과 “파르르 떨리는 고운 눈매”를 지닌 얌전하고 수줍은 누이를 도라지 꽃차 안에서 펼쳐지는 꽃잎을 통해 추억한다. 그 누이는 아마도 자기의 방에 “꽃을 따서 말리고 얌전하게 덖어”서 “차곡차곡 병 속에 담아 놓”았던 듯하다. 위의 시는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쉽게 하지 못했던 숫기 없고 비밀스러웠던 누이의 내면을 “진보랏빛 은은한 향기”라는 공감각적 이미지와 “방”이라는 공간성을 통해서 잘 형상화하고 있다. 이처럼 화자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아니마는 아름다운 이미지를 창출하며 김진환 시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구원의 여성상으로서의 아니마적 표상은 시 「솔체꽃」에서는 “흡족한 듯 탄성을 흘리며 웃던 당신” 혹은 “연보랏빛 치마를 즐겨 입던 나만의 화신(花神)”으로, 시 「겨울 편백나무숲」에서는 “앞섶 가슴을 보란 듯이 풀어 헤친 당신” 혹은 “가뿐 호흡으로 달음질쳐 올라/ 억세게 안아주고 싶”은 에로스의 대상으로 나타나 화자의 시적 열정을 추동하고 있다. 이처럼 시인의 열정을 불타오르게 하는 리비도의 에너지를 제어하는 길은 마음을 추스려 열기를 가라앉히고 경(敬)을 통한 자기 조절의 과정이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된다.
3.
시인 김진환에게 시 쓰기란 무엇일까? 그것은 곧 “생활의 얼룩”을 기록해나간 일기장, “남몰래 써 내려간 일기장”인지도 모른다. 현대시란 한 시인의 정신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벽지를 바르려다 거뭇거뭇한 얼룩을 보았다
이사 나간 방 한쪽 벽면에
덕지덕지 묻어있는 어떤 흔적과 마주했다
몸이며 마음을 비비고 치대다가
고스란히 남겨두고 간 생활의 얼룩
밀린 월세 탓에 도망치듯 짐을 뺀
그들만의 절절한 사연처럼
이리저리 깊숙하게 파인 손톱자국이며
모질게 품어 안고 가던 응어리 같은 흔적은
남몰래 써 내려간 일기장인지 모른다
지저분해진 벽면에 새 벽지를 바른다
제대로 각을 잡아 반듯하게 붙여 나간다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도록
꼼꼼히 도배해 버렸다
-「얼룩 일기장」전문
위의 시에서 화자는 “벽지”를 새로 바르다가 방 한쪽 벽면에 “덕지덕지 묻어있는 어떤 흔적”을 발견한다. 그것은 곧 “생활의 얼룩”이기도 하다. “몸이며 마음을 비비고 치대던” 삶의 고난과 애환의 기록인 그것은, “모질게 품어 안고 가던 응어리 같은 흔적”으로 가득한 삶의 기록, “남몰래 써내려간 일기장”일 것이다. 화자는 그러한 삶의 얼룩으로 가득한 벽면에 “새 벽지”를 바르며 아무도 모르게 “도배”를 한다. 그것은 또 하나의 새로운 삶을 위한 준비작업이기도 할 것이다. 화자에게 시 쓰기는 “하늘에 덧칠하기”인지도 모른다.
황사빛 하늘에 덧칠을 한다
큼지막하게 마름질한
세목細木 고운 천을 펼쳐 들고 붓질을 한다
치대고 덖은 세상의 들꽃 풀꽃
비틀어 짜고 색을 내어 작두필雀頭筆을 들이민다
(중략)
빛나는 햇살 맑은 공기 흐드러진 새소리
상큼한 풀꽃의 향기도 채워 넣는다
황사빛 뿌연 마음에 남모르게 덧칠을 한다.
-「하늘을 덧칠하다」부분
흔히 이 세상을 이르는 말의 하나가 “이 풍진 세상” 이다. ‘풍진(風塵)’이란 바람에 날리는 티끌이나 먼지를 가리킨다. ‘이 풍진 세상’은 결국 편안하지 못하고 어지러운 세상 혹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지러운 일이나 시련을 의미한다. 요즘은 몽골사막에서 불어오는 황사에다 미세먼지까지 자주 발생하여 호흡기 환자들을 괴롭게 하고 있다. 화자에게 시를 쓰는 행위는 그림을 그리는 것과도 같다. 화자는 이처럼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황사빛 하늘에 덧칠을 한다”고 표현한다. 화자는 “큼지막하게 마름질한 세목(細木) 고운 천을 펼쳐 들고” 그림을 그린다. 물감은 자연에서 얻는다. “치대고 덖은 세상의 들꽃 풀꽃 비틀어 짜”서 만든 색으로 그려나간다. 붓은 “작두필(雀頭筆)”이다. 작두필은 두루 알다시피 동양화에서, 한쪽으로 색깔을 펴는 데 쓰는 몽똑한 붓을 말한다. 화자에게 있어서 시 쓰기란 마음을 정화하는 행위, 즉 “황사빛 뿌연 마음에 남모르게 덧칠을”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 마음의 캔버스는 “빛나는 햇살 맑은 공기 흐드러진 새소리”와 “상큼한 풀꽃의 향기”로 채워진다.
사나사舍那寺 초입에 들고 나서야
산비탈 그림자가 더 짙어진 것을 알았다
땅 위로 드러난 나무 등걸이 더 깊게 패인 것을 알았다
아뿔싸 그렇구나
황갈색 넓은 앞뜰이 턱없이 째려보고 있구나
제 바지춤을 올렸다 풀었다
투박한 콧등을 자꾸 만지작대는 모양새
내게 자리를 내주기엔 아직 마땅치 않은가 보다
설익은 개암열매를 주섬주섬 챙겨 감추는
저 단단한 욕심도 가상한데
눈빛마저 아주 호기를 부리고 있구나
반백半白의 머리를 풀어 헤친 채
긴장을 맥없이 풀어 내던진 얼바람마저
저 돌담 틈새로 깊숙이 걸터앉았구나
꺼뜰꺼뜰 호통을 치고 있구나
아직 설익은 가을이구나.
-「사나사 앞뜰」 전문
초가을의 풍경을 감각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위의 시는 시인 김진환의 묘사능력이 범상치 않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경기도 양평에 소재하고 있는 고즈넉한 사찰의 풍경을 생동감있게 보여주고 있는 이 시에서 첫 3행까지는 시간의 경과를 시각적 이미지로 보여준다. “산비탈 그림자가 더 짙어”지고 “땅 위로 드러난 나무 등걸이 더 깊게 패인 것”을 보여주면서 화자는 어느새 한 해도 저물어 가을에 접어들었음과 하루에서도 한낮을 지나 오후의 시간이 깊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황갈색 넓은 앞뜰이 턱없이 째려보고 있구나”라고 함으로써 지나온 자신의 삶에 대한 부끄러움과 자기반성을 느끼고 있음을 보여준다. “설익은 개암열매를 주섬주섬 챙겨 감추는”“단단한 욕심”을 지닌 채 호기스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자연의 당당한 모습을 통해 화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다. “반백(半白)의 머리를 풀어 헤친 채 긴장을 맥없이 풀어 내던진” 채 “저 돌담 틈새로 깊숙이 걸터앉아”서 어중간하게 맞는 “얼바람”을 통해 뭐 하나 딱 부러지게 이루어놓은 것이 없는 채 중년에 접어든 화자 자신의 삶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거만스럽게 잘난 체하며 몹시 버릇없이 자꾸 구는 모양을 나타내는 북한어 “꺼뜰꺼뜰”을 통해 자연의 꾸중을 듣던 화자는 “아직 설익은 가을이구나”라는 마지막 구절을 통해 자신의 인생 계절이 아직 제대로 충분히 익지 못했음을 성찰하고 있다.
감각적 이미지를 구사하며 탁월한 묘사능력을 지닌 김진환의 시는 삶의 무상성에서 오는 아니마의 결핍을 극복하려는 뜨거운 열정으로 충만하다. 흐린 마음의 눈을 밝혀 삶의 실상을 드러내고자 하는 그의 시 쓰기는 마음을 닦는 자기수양의 방편이기도 하다. 김진환의 시가 거경궁리의 삶을 통하여 참된 자기실현에 도달함으로써 인심 저 너머의 도심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순정한 시를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나아가 자연의 본성을 우리 삶의 두두물물에서 찾아내 입체적인 상상미학의 결정체로 만들어내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아득한 길이 아니니 다시 한번 용맹정진하시길! (시인, 문학아카데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