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의 전쟁(The War of Bread)> - 제 1 떡 전쟁의 시작 - 존재냐 소유냐?
(1)
떡?
떡은 쌀 또는 다른 곡식을 곱게 빻아 반죽하여 굽거나 쪄서 만든 가공식품이다. 한국을 비롯한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관혼상제의 예식이나 명절에 빠지지 않고 상위에 등장해온 주식의 일종이다. 찹쌀떡, 인절미, 절편, 시루떡, 가래떡, 송편, 무지개떡, 쑥떡, 흰떡, 술떡, 빈대떡, 개떡, 감떡 등, 떡의 종류도 다양하다. 일상적 주식인 밥보다는 특별한 맛과 품격을 지니고 있기에 잔치와 기쁨을 상징하는 음식이기도 하다. 남주북병(南酒北餠)이라는 말이 있어 옛날 한양 북쪽에는 문관 출신의 고관들이 살아 주로 떡을 많이 먹었고 남산어귀에는 무관들이 살아 술을 많이 마신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떡은 신분이 높은 집안에서 주로 해 먹는 부귀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음식이기도 했다.
해마다 추석을 맞이하면 이곳 중국 연변에서도 송편을 빚어먹는다. 고향을 찾아가는 발걸음으로 전국에서 민족대이동이 일어나는 한국과는 달리 중국의 추석은 의외로 단촐하고 형식만 남아있는 느낌이다. 추석 당일도 휴일이 아니어서 학교에서는 정상 근무와 강의를 계속하였다. 중국인들은 추석이면 팥이나 여러 가지 속이 들어있는 월병이라는 둥근 떡을 서로 선물로 주고받으며 먹는다.
성경에는 떡 이야기가 무수히 등장한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떡은 서양인들의 주식인 빵(bread)을 대신하여 쓰였기에 단순히 우리 인간이 반드시 필요로 하는 먹을 양식, 즉 밥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히브리인의 떡은 우리의 밥, 서구인의 빵과 마찬가지의 주식을 의미한다. (떡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레헴](lechem)은, [양식], [식물], [음식]등으로도 많이 사용된 말이고, 그리스어 [아르토스](artos)는 [양식]으로 많이 번역된 말이다.) 그러나, 더러는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드는 유월절 음식 무교병이나 성막 안의 성소에 올리는 진설병을 생각하면 특별한 목적으로 만든 떡이 밥보다 더 적합한 번역일 수도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떡을 좋아하여 별명이 떡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성경을 읽으면 떡이 먼저 눈에 뜨인다. 성경은 온통 떡 이야기로 가득 찬 책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성경은 한마디로 예수 이야기인데..... 예수가 곧 자신을 떡으로 소개하고 있으니...... 삼단 논법에 의하여 성경은 떡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아무튼 이제 성경에 나타난 떡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성경에 나타난 떡들 중에서 가장 중요해 보이는 12개의 떡을 골라내어 이야기를 풀어가려고 한다. (계속)
(2)
세상은 전쟁터이다.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다.
역사(historia)라는 어원을 만들어낸 희랍의 역사학자 헤로도투스와 투키디네스가 쓴 역사서가 각기 페르샤와 펠레폰네소스의 전쟁사(戰爭史)였다는 사실이 그것을 시사한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 사람은 한번도 전쟁이 없는 세상을 누려보지 못했다. 지난 4,000년 동안 전 세계적으로 전쟁이 없었던 평화 시기는 겨우 265년에 불과했다고 하며, 세계의 화약고라고 불려지는 이스라엘 땅에는 평균 44년마다 한번씩 전쟁이 일어났다고 역사학자들은 진술하고 있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전쟁, 민족과 민족 사이의 전쟁, 국가와 국가 사이의 전쟁, 인간과 자연 사이의 저항할 수 없는 전쟁으로 인해 피에 젖어 왔다. 인간은 역사의 어느 한 모퉁이 어느 한 순간에도 시대적 모순에서 완전히 벗어나 본 일이 없었다. 전쟁과 기근, 끝없이 지속되는 자연 재해, 그리고 사회적 모순과 폭력, 독재와 압정에 시달리며 역사는 흘러왔다. 결국 세계의 역사란 자신들만의 정치 경제적 이득을 쟁취하기 위하여 이웃을 갈취하고 환경을 파괴하면서 인간들이 연출해 낸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전쟁마당이었던 것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말이다.
창조 직후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표현되었던 피조계....... 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 사이에는 무엇하나 서로 가릴 것이 없는 육적, 영적인 투명성으로 서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아가 사람과 동물, 사람과 자연 환경 사이에서도 서로 친화적인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다고 묘사된 창세기 2장의 아름다운 모습을 기억해 보라. 그곳은 완벽한 평화의 나라였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강, 즉 샬롬(shalom)으로 통치되는 세계였다. 그 아름다운 에덴 동산이 어째서 파괴되었는가? 그리고 온 세상이 전쟁 상황으로 돌변하게 되었는가?
우리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결국 우리는 대화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선악과의 이야기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니 또 그 지겨운 선악과 이야기? 하고 고개를 내저을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리 싫더라도 할 수 없다. 당신의 인내심을 잠시만 빌려 달라. 선악과 문제를 다시 복습할 수 있도록....... 만일 전쟁의 원인을 파악하고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한다면 선악과의 현장에 당신은 다시 서야만 한다. 선악과는 모든 문제의 시작점이요 이 전쟁 상황을 일으킨 발원지이기 때문이다.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예수가 마침내 십자가의 길에 들어서기 위해 공생애를 시작하는 첫 부분에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사십 일간 금식하며 마귀에게 시험(temptation)받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그가 받았던 첫 번째 시험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것이었다. 어째서 마귀는 이 문제를 던졌을까?
굶주림.......
그것은 나에게 조금은 생소한 개념이다.
배가 고파서 눈물 흘렸던 기억이 없는 세대들에게는 추상적인 단어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날마다 세끼의 식탁을 마주하며 필요 이상의 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그 행위를 덧없이 반복하고 살아가는 동안 인간은 떡을 소외시키고 단순히 소유해버린다. 그러나 생존을 위해 먹을 것을 찾아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지구상에 무수히 존재하며 더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또한 알고 있다. 비록 추상적일지라도 그들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바로 내 사랑하는 아들이 그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가정해보면 곧 깨닫게 된다. 상상만 해도 아픔으로 가슴이 저려오지 않는가? 북한에서 굶주리는 어린이들의 피폐한 모습의 사진을 볼 때 그들이 한 민족 핏줄을 이어받은 바로 우리 자식들이라는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탤런트 김혜자씨가 최근 펴낸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라는 책을 읽으며 내가 살고 있는 이 지구상에 극심한 기아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죽어가는 어린아이들이 그렇게 많다는 사실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굶주리는 사람들에게는 떡 자체가 존재양식(存在樣式)이 될 수밖에 없다.
인간에게는 반드시 먹을 양식이 필요하다. 그것은 존재의 법칙이다. 설사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일지라도 이 사실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다. 먹는 존재로서의 인간...... 그 설정 자체가 인간을 자기 충족적인 존재가 아니라, 의존적 존재로서 인식하도록 만들어 놓은 하나님의 의도된 계획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억압을 위한 것이 아니라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게 하는 은혜와 자비의 계획이다. (실상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없으면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존재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에덴 동산을 통해 먹을 양식을 충분히 공급해 주었다고 확인하고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계에는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물질이 넘치도록 충분히 많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처음에는 물질이 소유 가치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문화 창조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가치를 나타내기 위한 도구로써 주어진 것이었다. 그 시기에는 모든 피조물이 존재 자체의 의미를 생동감 있게 지니고 있었다. 물질이 소유 가치의 대상으로 전락한 것은 인간의 타락 이후에 발생한 퇴보(degradation)일 뿐이다. 따라서, 가난한 자가 떡을 부분적이나마 존재 가치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들이 더 에덴에, 아니 천국에 가깝다는 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계속)
(3)
하나님은 타락 이전의 인간에게 모든 나무의 실과를 따먹을 수 있도록 풍성한 자유도 함께 주었다. 문제는 그곳에 금단의 열매, 선악과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오직 선악과만이 인간에게 먹을 수 없도록 금지된 과일이었다. 따라서 선악과의 문제는 결코 육신의 양식의 필요에서 비롯된 배고픔의 문제는 아니었다. 오히려 선악과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는 존재의 법칙을 나타내는 시금석이었다. 아담과 하와는 육신의 배고픔으로 굶주린 탓에 선악과를 탐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육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영적인 문제요, 경제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인 문제에 더 가깝다.
이 대목에서 사탄이 등장한다. 사탄은 피조물로서 최초로 하나님이 정하신 존재의 법칙을 깨뜨리고 튀어나간 타락한 천사였다. 사탄의 존재는 하나님의 위치를 탐하고자하는 데에서 그 속성이 드러난다. 그것이 바로 사탄의 모든 관심사의 초점이다. 따라서 사탄은 어떻게든지 하나님의 위치를 빼앗고자 총력전을 기울이게 마련이다.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서 선악과는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존재 법칙을 정해놓은 삶의 이정표였다. 마땅히 인정해야할 하나님의 위치를 깨닫고 시인하는 표지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것은 사탄에게는 도무지 참을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사탄은 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접근한다. 사탄은 지혜롭다. 그러나 사탄의 지혜는 악하다. 그 의미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지혜를 악하게 사용했다는 뜻이다.
사탄이 처음 시도한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지되고 있는 깊은 신뢰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었다. 사탄은 아름다운(?) 뱀의 모습으로 다가선다. 뱀이 아름답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사탄이 본색을 드러내기 전에는 뱀은 징그러운 것이 아니라 아름답게 치장하고 나타난다. 그리고 첫 미끼를 던진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이 질문은 공교하게 계산된 절묘한 질문이었다. <참으로>와 <모든>이라는 두 가지 부사를 던져서 마치 하나님이 불합리하고 인간에게 억압적인 존재로 비추어질 수 있도록 살짝 그 느낌을 뿌리는 것이다. 최음제처럼...... 사실은 정반대다. 하나님은 대단히 합리적일 뿐 아니라 인간에게 너그럽고 풍요로운 분이셨다. 그는 자신이 창조한 피조세계를 모두 인간에게 맡기며 마음껏 그것을 취하고 가꾸고 다스리도록 백지 수표를 끊어주신 분이다. 그것은 인간을 향한 절대적 신뢰와 사랑의 표현이었다.
안타깝게도 인간은 사탄의 그 술수에 넘어가고 만다. 미끼에 걸려든 것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살짝 왜곡시킨다.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이 말은 표면적으로는 맞는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유 대신 사탄이 집어넣은 불신앙이 들어가 뒤틀린 말이다.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임의로 먹되 선악과만을 금하고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했던 하나님의 말이 순서와 내용이 바뀌어있다. 풍요롭게 주어졌던 자유는 제한적으로 표현되었고, 반드시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확언은 약화되었다. 그 과일을 먹을 경우 혹시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확실한 설정으로 변화되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았던 내용이 삽입되었다는 사실이다. 만지지도 말라...... 이 말은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선악과를 따고 싶어하는 여자의 의중을 드러낸 첨언이었다. 이미 여자의 마음은 선악과에 빼앗겨 그 손이 절반 이상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와가 미끼에 걸려든 것을 확인한 사탄은 회심의 미소를 감추며 마침내 본색을 드러낸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제는 정면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거짓말을 하고 나선다. 그럴듯한 거짓말로 마지막 미끼를 던진다.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 이것이 사탄의 마지막 문장이다. 피조물인 인간을 하나님의 위치로 끌어올리려는 시도......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도록 하는 것이다.
그녀가 바라보았던 선악과는 먹음직하였고, 보암직하였으며 정말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워 보이기도 하였다. 결국 하와는 선악과에 손을 대고 만다. 선악과 앞에서 하와가 느꼈던 이 세 가지 유혹이 결국 모든 인간에게 끊임없이 미치고 있는 본질적인 유혹이요 시험이 되고 만 것이다. 이 원죄의 문제에 대하여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증언한다. 우리가 못난 조상 아담과 하와 탓에 문제 덩어리를 안고 살아가게 된 것이 아니라, 에덴 동산 그 범죄의 현장에 우리가 함께 있었으며 하와가 손을 뻗어 선악과를 따는 그 순간 우리도 함께 죄를 범했다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마침내 불순종의 길에 들어서게 된 그 행위 이면에는 사탄으로부터 비롯된 불신앙과 교만과 탐심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결국 완벽했던 평화는 깨지고 전쟁이 시작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미 예고된 죽음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깨어진 평화...... 그것은 기다란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네 가지 측면의 분리(Separation) 현상으로 나타난다. 하나님과의 분리에서 시작된 깨어진 관계는 곧바로 자기 내면과의 분리를 일으켰으며, 사람들 사이의 분리, 그리고 자연과의 분리로 확장되었다.
◆ 전쟁(The War)
= Broken Peace (with God → with self → with people → with nature)
이 모든 전쟁의 이면에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죄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 죄 (Sin) : 선악과 → 불신앙 → 교만 → 탐심 → 불순종 → 전쟁
따라서 이 전쟁은 인간의 행위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 근본 뿌리의 출발점인 불신앙의 문제가 믿음으로 다시 회복되기 전에는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악성 질환인 것이다. 결국 우리가 왜 십자가의 믿음을 필요로 하는가? 어째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의 해답이 여기에 있다. 십자가는 불신앙의 늪으로 떨어진 인간을 구원키 위해 하나님이 다시 한번 설정해 놓은 제 2의 선악과 문제인 것이다.
▼ 치유(Healing): 십자가 → 믿음 → 회개 → 자유함 → 순종 → 평화
그 십자가를 붙들 때에 비로소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했던 교만으로부터 다시 내려올 수 있으며 먹음직하고 보암직하며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느껴졌던 그 탐심의 우상 숭배로부터 해방되어 자유함을 얻게 되어 마침내 하나님이 처음부터 원하셨던 순종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는 모든 전쟁 상황을 종식하고 에덴의 평화를 되찾기 위해 얻어야할 고지이다. (계속)
(4)
선악과에서 나타났던 세 가지 유혹이 있다. (창세기 3장 6절)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이 세 가지 유혹이야말로 이제 모든 인간들에게 던져진 피할 수 없는 유혹이 되고 말았다.
우리가 덫에 빠져드는 순간 사탄은 항상 이 세 가지 무기를 들고 우리 앞에 나타난다. 예수가 광야에서 받았던 세 가지 시험 또한 같은 내용이었다.(마태복음 4장 1-11절)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라.
나에게 엎드려 절하라. 내가 천하만국의 영광을 주마.
이 세가지 유혹을 가리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다시 요약하고 있다. (요한 1서 2장 16절)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잘 알려진 영성 신학자 리차드 포스터는 이 주제를 (돈, 섹스, 권력)의 문제로 다루고 있다. 더러는 육신의 정욕은 식욕 또는 성욕을 포함한 원초적 본능적 물질욕을 의미하고, 안목의 정욕은 남의 눈에 더 좋게 보이고자 하는 지위, 학위 같은 명예욕을 의미하며, 이생의 자랑은 최종적으로 세상의 영광을 차지하고자 하는 권력욕을 뜻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아무튼 (돈, 성, 명예, 권력) 어느 하나 인간에게 뿌리치기 쉬운 만만한 상대는 없다. 한번 그것을 차지하고자 하는 탐심에 마음을 빼앗기고 나면 그것은 우리를 얽어매는 철저한 우상으로 바뀌고 만다. 그 유혹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이 모든 유혹이 그 첫 출발점을 자세히 살펴보면 결국은 돌을 떡으로 바꾸라는 그 말 한마디에 압축되어 있다. 다름 아닌 존재의 문제를 소유의 문제로 환원시키려는 사단의 간교한 계략에서 시작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법칙을 나타내는 선악과를 교묘히 소유의 대상으로 환원해버린 사단은 동일한 수법으로 예수께 다가와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어라.”
에덴의 풍요로움 속에 있었던 아담과 하와보다도 예수는 훨씬 열악한 환경 속에 놓여있었다. 40일 간의 금식 가운데 찾아온 굶주림의 고통......,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처한 전쟁터의 비극적 상황이다. 그 속에서 돌을 떡으로 바꾸라는 유혹은 대단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더구나 만일 예수처럼 우리가 돌을 떡으로 바꿀 수 있을만한 능력과 위치에 놓여 있다면....... 그 유혹에서 벗어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크리스천의 부정 행위, 간음, 청탁, 업무 사기, 배임, 뇌물 수수, 비자금, 횡령, 불의와 착취, 자원 남용, 생태계 파괴 등의 사건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하신 존재의 법칙은 절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돌은 돌이고 떡은 떡이다. 원숭이가 사람이 될 수 없듯이 돌이 떡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돌을 떡으로 바꾸는 행위는 하나님이 정하신 존재의 법칙을 깨고 그것을 자신의 소유물로 만들겠다는 대단한 월권 행위다. 금지된 것을 행함으로 정면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이다. 결국 하나님 위에 자신을 두고 인생의 의사 결정권을 스스로 취하겠다는 말이다. 자신이 왕으로, 주인으로 등극한 것이다. 하나님 위에 다른 어떤 것도 두지 말라는 제 1 계명을 어긴 것이다.
제 1 계명을 어기고 나면 곧바로 인간은 우상을 만들기 시작한다. 제 2 계명을 범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이 사라지고 난 후에는 반드시 섬겨야할 다른 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여러 가지 모양으로 형상화해서 나타난 것들이 바로 물신(物神)이다. 자신의 손으로 만든 우상을 모셔놓고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자신의 풍요와 안녕을 빈다. 주식과 부동산 시세 앞에서 기원하며 예배를 드리는 현대인들과 금송아지 앞에서 절하는 고대인들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 물신을 섬기기 시작한 인간들은 이제 거침없이 다른 계명들을 어기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든지 안식일을 범하든지 떡을 더 쥐기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다. 결국 돈 때문에 부모를 무자비하게 대하고 더러는 살해까지 하고, 돈으로 성을 사고 팔며 간음을 자행한다. 남의 재물을 보이지 않게 횡령하며 그것을 감추기 위해 거짓 증거를 댄다. 그의 눈에는 탐심으로 가득하여 이웃의 재물이 모두 이제 자기 소유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떡의 문제가 단순한 경제적 문제가 아닌 영적인 문제인 까닭은 바로 십계명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락한 인간들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십계명의 율법을 주어야만 했던 당위성을 거꾸로 유추할 수 있다.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 풍성한 에덴을 허락하셨던 하나님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핍박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 따라서 비록 타락한 인간 사회이지만, 가난한 자들을 먹이고 그들을 돌보기를 요청한다. 그러나 인간의 탐심과 이기심은 끊임없이 빈부의 격차를 벌려놓으며 가난을 확대 재생산한다. 자신의 배만 불리는 탐욕에 사로잡힌 사회에서는 가난하고 헐벗은 이웃을 벼랑 끝으로 내몰아 자살로 인생을 마감케 한다. 빈곤에 의한 자살은 어떤 의미에서 사회적 살인이다. 존재를 소유로 바꾸고 나면 그 소유가 존재를 소멸시키고 만다.
타락... 실락원의 순간, 인간은 에덴의 풍요를 상실하고 가난하게 되었다. 존재보다 소유를 선택하였지만 그 결과는 반대가 되고 만 것이다. 인간이 직면하게 된 가난은 단순한 육체적 물질적 가난 뿐만이 아니었다. 하나님과의 대화의 단절에서 비롯된 영적 가난, 그리고 인간 사회의 소외 현상에서 비롯된 억압과 핍박의 사회적 가난, 자연과의 불화에서 자초한 생태학적 가난으로까지 이어졌다. 총체적 가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가난하게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를 다시 천국으로 부르신다. 예수를 통한 복음, 곧 천국으로의 초대는 세상의 모든 가난한 자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부요와 풍성함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먼저 누린 우리들에게도 그 일을 위한 동역자로 함께 일하도록 사명을 맡기시는 것이다.
소유냐 존재냐? 라는 책으로 인생 후반기 자신의 사상을 종합한 에리히 프롬이란 유태인 사회 심리학자가 있다. 그는 소유의 문제보다는 존재의 문제가 더 본질적이며 중요하다는 결론에는 이르렀던 사람이다. 그러나 소유의 문제를 해결하고 존재의 문제로 돌아가기 위한 방법론을 제시하는 데에서는 여전히 실패하고 있다. <소유의 나라>도 <신의 나라>도 아닌 <존재의 나라>로 스스로 돌아갈 것을 철저한 인본주의적 사고를 통해 권면하는 그는 놀랍게도 사탄이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할 때 사용했던 그 말을 다시 한번 반복하고 있다.
“너희가 하나님 같이 되리라.”
결국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도달하는 최종 목적지는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돌과 떡을 내세운 소유의 문제로 도전하는 사탄을 일성(一聲)으로 물리치며 예수가 맞받아친 말은 전혀 다르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 : 4)”
예수에게는 생명의 떡인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그 해답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존재냐 소유냐 라는 하나님의 질문과 사탄의 유혹 앞에 던져진 영원한 해답, 존재의 떡이었다. (제 1 떡 끝) (계속)
루카스
떡고물...(1) : 돌비석
떡 애호가 동지들께,
아이구 아이구, 딱딱한 제 1 떡 잡수시느라 수고들 많으셨어요...
그래도 이 떡은 안먹고 지나갈 수 없는 떡이거든요.
전쟁을 일으킨 아니 사망에 이르는 악성 식중독을 일으킨 떡이니까요.
자~ 쉬어 갈 겸, 떡 고물 하나 선사할께요.
떡을 다루다 보면 떡고물이 떨어지기 마련이죠.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고구려사 왜곡 문제 있죠?
1995년도에 광개토대왕비가 있는 중국 집안 시에 가 보았었는데...
결국 이 문제도 ... 한 중 일 3국 사이의 첨예한 떡의 전쟁의 한 단면이란걸 새삼 알았습니다.
한번 맛 보시죠(~_~)!
(떡 먹을 땐 김치국이 있어야 맛있는데...)
--------------------------------------------------
"장 교수님, 제가 몇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장 교수의 일방적인 강의를 귀 기울여 듣고 있던 박민수가 구레나룻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요즘같이 현대 과학 문명이 발달한 시대에 그 따위 고리타분한 비석 하나를 둘러싸고 야단법석을 떠는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열을 내던 장 교수는 갑작스런 반격을 당한 사람처럼 일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전열을 가다듬은 듯 허리를 뒤로 재끼며 다시 포문을 연다.
"참 좋은 질문이요. 사실 그 질문에 본격적인 답을 하기 위해서는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강의부터 시작해야 하겠지만 오늘밤을 새워도 모자랄 일이고......, 간단히 생각하면 모든 학문의 출발이 그렇듯이 인간이 지닌 알고 싶어하는 욕망과 호기심이 역사의 진실을 밝히겠다는 학문적 욕구로 표출된 것으로 볼 수 있겠지. 그렇지만 역사란 것이 단순한 과거 사실의 발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의미를 추구하는 목적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배후에는 각국의 이해관계가 얽힌 일종의 고지 쟁탈전이 펼쳐지고 있음도 간파해야만 할 것이요."
"아니 이해관계라뇨? 옛 비석에서 무슨 떡고물이라도 떨어진답니까?"
송지혁이 냉소하듯 반문하자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던 장 교수가 손을 내저으며 곧바로 받았다.
"여보시요. 당신은 역사의식이 지닌 잠재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소릴 하는 거요. 어째서 학자도 아닌 일본군 참모부가 개입하여 광개토대왕 비를 왜곡 날조하려고 애를 써야만 했는가, 그리고 그 같은 날조된 역사의식 속에서 결국 조선 침략과 대동아 공영권을 꿈꾸는 일본 제국주의가 탄생할 수 있었다는 사실들을 상기해 보면 조금은 쉬워질 것이요. 역사란 사실은 떡고물이 아니라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의 문제야."
"하하하......, 역사를 떡의 문제로 풀어내시다니 역시 대단하십니다. 저 역시 전적으로 교수님의 의견에 동의를 합니다. 어차피 인간이란 존재는 그 내용이 진리든 비진리든 잘 짜여진 이론만 있어도 충분히 의식화가 가능한 허약한 존재가 아닙니까? 국가라는 이익 집단의 요구에 의해 집단 의식화를 이루어 내기 위한 방편으로 역사의 편린들이 종종 악용되어 온 것이 사실이지요.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것이 '역사의 진실' 이랄지 '학문' 또는 '과학' 이라는 그럴듯한 문양(紋樣)의 포장지로 싸여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교수님이 방금 광개토대왕 비를 둘러싼 논쟁 가운데는 진실을 밝히기 위한 학문 정신도 섞여 있다고 언급하셨는데, 외람되지만 과연 역사 연구에 의해 진실이 밝혀질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박민수의 질문이 점차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장 교수는 허드레 장사치인줄로 알았던 박민수의 연이은 질문 공세를 받자 약간은 긴장하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당신은 마치 우리 사학자들이 이루어낸 학문적 업적을 전적으로 무시하려는 듯한 말투로 이야기하는군. 사실 나 역시 이쪽 방면의 연구를 수 십 년 해오는 동안에 학계에서 벌어지는 웃지 못 할 해프닝들과 소위 학자라는 작자들의 허위적인 모습에서 생겨난 회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요. 하지만 그렇다고 투철한 학문 정신에 의해 얻어진 역사 해석의 찬란한 성과들과 비판의식들이 인류가 지속적으로 이루어내고 있는 진보의 물결에 동력을 제공해 왔다는 사실을 업신여겨서는 안 되지.”
“천만에요. 그럴 뜻은 없습니다. 올바른 역사 기술(記述)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걸어야 했던 충실한 사관(史官)들이나 지나온 과거를 통해 올바른 미래관을 제시코자 했던 역사학자들의 공로와 역할은 충분히 인정되어야 하고 또한 지속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다만 제가 드리고자 하는 질문의 핵심은 인간이란 존재의 본질에 관한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과연 인간이 역사를 진실 되게 기록할 수 있는 존재였는가 하는 질문이죠. 진실을 추구하고자 했으나 끝내 진실에 이르지 못한 허약함은 차치하더라도, 자신에게 돌아올 떡의 문제를 앞에 두고 고의적으로 진실을 외면하거나 때로는 악의적인 허위 사실을 조작해 가면서까지 역사를 왜곡 날조시킨 일들이 얼마나 많았으며 그로 인해 흘린 피는 얼마나 많았는지 생각해 보면 소름이 돋칠 만큼 끔찍하기조차 합니다. "
박민수는 마치 그 장본인이 장 교수라도 된다고 생각하는지 눈썹을 치켜뜨며 차갑게 그를 노려보았다. 장 교수가 마른침을 꿀떡 삼키고 있는 사이에 박민수가 재차 입을 열었다.
“불과 천 오 백년 전의 역사조차, 그것도 돌비에 새긴 문자 기록의 물증을 눈앞에 두고도, 인간들의 부패한 심성 때문에 진실을 밝혀내지 못하고 다투고 있습니다. 광개토대왕 비가 일본군에 의해 왜곡 변조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측에서 생각하는 진실일 뿐이지 일본인들은 일본인대로 철석같이 자신들이 믿고 있는 것이 진실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광개토대왕 비의 발견으로 이미 5, 6세기에 일본열도에서 의문시 되어왔던 야마도 정권이라는 고대 국가가 존재하여 한반도에 속지를 점령하였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고 배우며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본의 조선 침략은 과거의 자신들의 영토를 탈환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그뿐입니까? 엄연히 아직도 역사의 증인이자 피해 당사자들이 생존해있는 종군 위안부 문제에서도 거짓된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이 바로 일본인이요 바로 인간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얼떨떨해서 쳐다보고 있는 송지혁에게 박민수가 덧붙였다.
“자넨 혹 일본인들하고 우리는 다르다고 말하려 하는가? 오십보백보, 마찬가질세."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대는 박민수에게는 일종의 신념이 엿보였다.
“소위 히스토리아(historia)라는 어원을 만들어낸 희랍의 역사학자 헤로도투스와 투키디네스가 쓴 역사서도 각기 페르샤와 펠레폰네소스의 전쟁사(戰爭史)였다는 사실이 시사해 주는 바가 매우 많지 않습니까? 결국 세계의 역사란 정치 경제적 이득을 쟁취하기 위하여 인간들이 연출해 내는 이전투구(泥田鬪狗)의 한마당이요, 그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풍속도라고 보여 지는군요. 정직한 사관의 역할과 공로는 오히려 왜곡과 날조로 얼룩지고 주름져 있는 역사의 전면에 부각된 부도덕한 주체 세력과 맞서서 최소한의 양심과 진실을 수호하기 위해 싸워온 저항 세력으로서 가치가 인식되어지는 것이 올바른 자리 매김이 아닐까요?"
잠시 침묵이 흐른다. 거대한 밤의 정적과 싸우는 저항 세력으로서의 밤벌레 소리가 간간이 귓속을 찌르고 있다. 술맛이 달아난 듯 잠자코 빈 술잔을 쥐고 있던 장 교수가 무겁게 입을 연다.
“역사의 여신이란 겉보기에는 비록 평화로운 시기일지라도 엎드러진 시체들의 산너머로 승리의 전차를 몰고 가는 가장 잔인한 여신이라고 엥겔스가 지적한 바가 있었지. 나 역시 역사 자체를 본질상 전쟁사로 간주해야 한다는 당신의 말에 굳이 반대할 생각은 없소. 그러나 그 같은 전쟁의 와중에서도 전차의 수레바퀴가 짓밟고 지나간 자리에서 생명력을 잃지 않고 또다시 피어나는 이름 모를 꽃송이들이 있는 법....... 끊임없이 시련을 극복하며 미래를 개척해 가는 사람들의 노력에 대해 주목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 또한 우리 역사학자들이 해야 할 몫이 아니겠소?"
송지혁은 지금껏 학자연한 태도로 으스대며 거드름을 피우던 장 교수가 한결 수그러들고 침착해진 것을 바라보며 비로소 학자다운 면모를 그에게서 조금 발견한다. 역사 속에 선과 악이 공존하듯 인간이란 이렇듯 양면적 존재인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옳습니다. 하지만 역사(歷史)가 역사가(歷史家)만의 몫이 될 수는 없겠지요. 역사라는 강물을 타고 흘러가는 우리 모두가 결국 용기 있는 종군 기자나 정직한 사관의 역할을 감당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거대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국지전의 전투 양상을 아무리 충실히 지켜보고 기록한들 그 전쟁이 일어난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면 결코 완전하고 의미 있는 기록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역사라는 강물의 물줄기를 올바로 타기 위해서도 반드시 강물의 발원지를 파악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에게 던져진 영원한 숙제일 수도 있겠지요."
“그럼 박 선배는 전쟁의 원인을 파악이라도 했단 말이요?"
송지혁이 툭 쏘듯이 한마디 뱉었다.
“하하......, 무슨 나 같은 밀수꾼이 그걸 다 알 수야 있겠나? 다만 전쟁의 상흔을 입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다 보면 조금씩 깨닫는 바가 있기 마련이지. 광개토대왕 비에 대한 질문으로 되돌아 가보게나. 결국 그들의 관심에는 과거 역사에 대한 호기심 이전에 떡의 문제가 깔려 있었고 또 그 배후를 살펴보면 돌을 떡으로 바꾸도록 종용하는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지 않는가?"
“돌을 떡으로 바꾼다고?"
“하하하......,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구. 사람은 본질상 떡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아닌가? 떡을 먹어야 살 수 있도록 되어 있단 말이지. 그러나 인간의 욕심이 잉태하여 때로는 먹어서는 안될 돌까지 떡으로 바꾸어 먹는 일이 종종 벌어진단 말일세. 지혁이 자네 혹시 예수가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받은 이야기 들어본 적 있는가? 그때 그가 받은 첫 번째 유혹이 바로 돌을 떡으로 바꾸라는 것이었지. 광개토대왕 비의 돌비석을 자신들의 욕심을 따라 떡으로 바꾸어 먹은 일본인들이야말로 바로 그 유혹에 넘어간 자들이고 사실상 그 유혹은 모든 인간들에게 지금도 던져지고 있는 본질적인 시험이라고 생각하네."
송지혁은 자신의 지난 삶이 언뜻 스치면서 떡을 향한 집념을 불태우며 살아왔던 그 역시 동일한 시험대 위에 올라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떡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진실로 깨닫고 발견한 자만이 자신과 사회를 향한 왜곡된 역사를 회복시키는 삶을 선택할 수 있지."
박민수가 중얼거리듯 한마디 덧붙였다. 송지혁이 갑자기 망연해진 심정으로 술잔을 응시하고 있는 동안 장 교수도 혼자 자기만의 생각에 골똘히 잠겨 있었다. (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