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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식의
'클래식은 영화를 타고'
< 더 파더 - The Father >
여기, 일상의 기억이 낯설어지며 급기야 자신조차
믿지 못하게 된... 그 완벽했던 삶이 무너져 내린
한 노인의 절망적인 흔들림을 담은 서사
< 더 파더 - The Father > 가 있습니다.
숨이 턱 막히도록 예상을 비껴가는 감정의
소용돌이... 그토록 격한 감정의 파도에 집어
삼켜진 듯한 이 97분의 드라마는,
헨리 퍼셀의 오페라 < 아더 왕 > 중 3막 아리아
'나를 깨우는 자 누구인가(What power art
thou)' 와 함께 그 막을 열어가죠.
장엄하고 힘차면서도 뭔가 숙명적인 굴레의
고통을 예감케 하는... 이 노래를 듣고 있는 주인공은
다름아닌 앤서니(앤서니 홉킨스 분)입니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딸 앤(올리비아 콜맨 분)이
창문을 활짝 열며 "어떻게 된 일이냐?" 고 묻자,
"아무 일 없었어" 라고 시큰둥하게 답하죠.
앤서니는 간병인을 내친 이유가 "내 시계를
훔쳐갔기 때문" 이라고 둘러댑니다.
앤이 런던을 떠나 영어로 대화도 못하는 파리에서
살 것이라고 하자, 앤서니는 "난파된 배에서 쥐가
도망치듯 떠난다" 며 화를 내죠.
"나 혼자 잘 할 수 있고, 또 문제 없다" 며, 간병인을
세 번이나 쫓아낸 괴팍한 노인과 딸의 대화...
영화가 시작된 후 13분 정도의 시퀀스는 여느
부녀와 다를 바 없어 보이죠.
그러나 곧이어 모든 시간과 기억이 온통
뒤섞인 채, 헝클어져버립니다.
내 기억이 맞는지, 여기는 어딘지, 또 무엇이
진짜인지,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상황이
닥친 것이죠.
< 더 파더 > 는 이렇듯 치매 노인의 머릿속을
거침없이 헤집으며 관객을 숨 막히게 하는
스릴러 영화로 다가옵니다.
무슨 상황인지 모를 때는 긴장감이, 또 상황을
알고부터는 두려움이 가슴을 짓눌러오죠.
그 공포심은 늙음과 죽음에 대한 슬프고도
거부할 수 없는... 극히 원초적인 것입니다.
틈틈이 우아한 클래식을 즐기는 엔지니어 출신의
이 고상한 노인네는 한때는 울창한 나무였을
것이죠.
단란한 가족에, 직장에서 인정받고 유복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비록 끔찍한 사고로 둘째 딸 루시를 잃었지만...
그의 삶은 나름 성공적이었죠.
나이가 들어 불편하지만 신체 또한 아직은 건강한
편입니다. 문제는 천형(天刑)에 가까운
치매(癡呆)가 온 것이죠.
영화는 첫 시퀀스 이후 문을 왈칵 열어 관객을
노인의 의식과 무의식, 그 도가니 속으로
집요하리만치 몰아넣습니다.
앤이 집을 떠난 후 바뀐 화면은, 벨리니 오페라
< 노르마 > 1막의 '정결한 여신이여'(Casta
Diva) 를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의 음성으로
듣고 있는 앤서니의 모습을 조명하죠.
한데 어디선가 왠 소리가 나길래 앤서니가
다가가보니, 어떤 낯선 남자가 거실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습니다.
"누구냐" 고 묻자 그 남자는 앤의 남편 폴(마크
게티스 분)이라고 말하며 "10년이나 됐는데
모르냐?" 고 곤혹스런 표정을 짓죠.
게다가, 모르는 여자가 자신이 앤이라며 집에
들어오는데 그녀(올리비아 윌리엄스 분)는 분명
조금 전 까지 얘기를 나눈 진짜 딸 앤이 아닙니다.
앤서니가 "앤은 어디 갔느냐" 고, 또 "내 집에 있었던
네 남편은 어디로 갔냐" 고 묻자,
방금 쇼핑 보고 왔다는 그녀는 "아버지, 저 여기
있어요. 남편이라뇨? 이미 5년 전에 이혼했잖아요!"
라고 응답하죠.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무슨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지... 당황한 앤서니는 황망한 기색이
역력해지며 어쩔 줄을 몰라합니다.
이 여자가 정말 내 딸이 맞는지, 딸이 결혼했는지,
아님 이혼했는지, 그리고 손목시계는 어디에
뒀는지, 모든 것이 모호하기만 하죠.
기억도 지워지고, 순서마저 뒤죽박죽입니다.
이젠 내가 누구인지도 명확하지가 않죠.
앤서니의 기억 세계엔 큰 혼란이 엄습하고...
익숙했던 주변마저 낯설게 느껴지면서 가족과
자기 자신조차 믿지 못하게 됩니다.
앤서니는 이러한 디맨시아 증상에도 불구하고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다고 장담하면서 간병인을
계속해서 거부하지만,
딸은 곧 런던을 떠나 파리에서 살 예정이라며
그를 돌볼 네 번째 간병인을 구하겠다고 하죠.
그런데 정작 앤은 파리로 떠나기는 커녕
아버지를 혼자 둘 수 없어 집으로 모셔왔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혼돈스럽기만 앤서니 앞에 어느 날,
죽은 둘째 딸 루시와 닮은 젊은 간병인 로라
(이모겐 푸츠 분)가 방문하죠.
그는 앤이 자신의 집을 차지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고 의심하기에 이릅니다.
앤은 그런 아버지 앤서니를 모시고 병원에 가죠.
그런데, 진료를 받는 도중 비제의 오페라
< 진주조개잡이 > 1막 아리아 '귀에 익은 그대
음성' 이 흐릅니다.
자못 중의적인 타이틀의 이 매혹적인 아리아는
장중 수차례 의미심장하게 풀어지며, 인지 장애의
격랑 속에 속절없이 흔들리는 앤서니의 마음을
처연한 빛깔로 투영해주죠.
앤서니는 상담 의사인 사라이 박사(아예샤 다커
분)에게 당당하게 말합니다.
"난 여기서 30년을 살았소. 근데 내 딸이 집에
눈독을 들이고 있어요. 그래서 사귀는 남자랑
내 집으로 들어온 거고... 뭔지 모르겠지만 딸애가
일을 꾸미는게 확실해요."
그런 앤서니는 묻고, 또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요?"
그러곤 부르짖습니다. "분명히 말하는데 난
내 집에서 절대로 떠나지 않을거야!"
사위 폴은(요양원의 종사자 빌(마크 게티스 분)을
사위로 혼동하거나, 실제 사위인 폴(루퍼스 스웰
분)일 수도 있습니다만...) 앤서니를 은밀히
겁박합니다. 아니, 그렇게 느끼는 게지요.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얼마나 더 여기서 이렇게
버티면서 따님 삶을 망가뜨릴 작정입니까?"
모든 생활의 중심에 앤서니가 위치한 탓에
괴로워하고, 분노하던 폴은 급기야 장인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칩니다.
물론 섬망(譫妄)입니다만... 앤서니는 겁에 질려
몸부림치며 자기 자신을 향해 소리치죠.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젤러 감독은 < 더 파더 > 의 주인공 앤서니를
그 역을 연기하는 배우 앤서니 홉킨스와 이름과
생일(1937년 12월 31일)이 같은 사람으로
설정하였습니다.
'앤서니' 가 열연한 ‘앤서니’ 는 은퇴한 83세의
노인으로, 자신만의 규칙과 방식으로 직접
가꿔온 집에서 평온한 노후를 즐기고 있는
인물이죠.
그러던 중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하는 기억으로
인해 일상에 혼란과 불안을 겪게 되고, 자신을
돌봐주던 딸 ‘앤’ 은 물론, 급기야 자기 자신까지
의심하게 됩니다.
영화는 그렇게... 관객이 주인공 앤서니의
시점에서, 또 그의 딸 앤의 시점에서
미로(迷路)처럼 얽힌 시공간을 통과하게 만들죠.
앤서니와 앤, 두 부녀는 흐르는 시간과 바래지는
기억 사이로 자꾸만 서로를 놓칩니다.
이토록 무질서한 혼란과 상실의 시간을
신산(辛酸)스런 영화적 체험으로 구현한
< 더 파더 >...
앤서니와 그를 둘러싼 상황은 더 나빠져만 가죠.
마치 변신하듯, 앤서니가 살고 가꿔온 런던의
아파트가 '이상한 나라의 출구없는 공간' 으로
변모하기 시작합니다.
불쑥 낯선 사람이 나타나거나 사라지기도 하고,
심지어 가족들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일도
발생하죠.
그러나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이 여전히 과장된
농담을 고집스럽고도 강퍅하게 던지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의 마음은 착잡합니다.
분명, 앤서니가 말하는 것은 과거의 사건들과
연관된 일들이긴 하지만 현재의 시간과는
상관없는 것이죠.
이 80대 노인의 의식세계를 망각이라는 질병이
파고들면서... 세상의 모든 일관성은 송두리째
뒤집어진 겁니다.
극중 앤서니와 앤은 수 차례 창밖을 내려다보죠.
앤서니는 길에서 장난치는 어린아이를, 앤은
다정해 보이는 아래층 커플을 응시합니다.
마치 자신들이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을 바라보는
것처럼 말이죠.
감독이 의도한대로 영화는 전 장면이 아파트와
요양원(앤서니가 아파트로 착각하는) 내부에서
이루어져, 계속해서 변화하는... 일종의 '정신적인
장소'(mental space)처럼 와닿습니다.
'삶의 공간', 곧 '집', 그 밖의 세상은 그들 없이
돌아가는 세계이자, 그들이 바라만 보는 세상 혹은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셈으로,
앤서니가 바라보는 소년은 아이였던 그 자신일 수도
있고, 그가 없어도 세상은 흘러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죠.
아울러 올리비아가 바라보는 커플의 모습은
그녀가 갖지 못한 삶일 것입니다.
희곡 < 더 파더 > 를 썼던 플로리앙 젤러는 이를
2012년 연극으로 선보였다가, 크리스토퍼 햄튼과
각색 작업을 함께 하며 첫 영화 연출까지 맡았죠.
이렇듯 첫 필름이지만 젤러 감독의 밀도 있는
연출에 앤서니 홉킨스라는 걸출한 배우와 올리비아
콜맨 등 조연들의 호연이 어우러져 < 더 파더 > 는
높은 완성도의 수작으로 우뚝 섭니다.
< 양들의 침묵 >(1991)을 통해 제64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던 앤서니 홉킨스는
< 더 파더 > 에서도 명불허전의 연기를 펼치죠.
그는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무너지는 치매를 겪고
있는 '인물, 앤서니' 의 요동치는 내면과 심리를
강렬하고도 정치(精緻)한 톤으로 표현해냈습니다.
특히 80대 노인부터 7살 어린아이까지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며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아우르는
앤서니 홉킨스의 경이로운 연기는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그는 치매에 걸려 겉잡을 수 없이 무너지는 노인의
분노, 당황, 후회, 슬픔, 그리움 등... 순간순간
변하는 감정을 놀라운 초절정의 연기력으로
펼쳐냈죠.
영화의 엔딩 신... 앤이 요양원 병실을 떠나간 뒤
카메라는 “내 잎사귀가 다 지는 것 같아” 라고
울먹이는 앤서니를 무연스레 비춥니다.
그의 등 뒤로 세찬 바람이 불고 있죠. 창밖의
커다란 나무 둥치를 감싸던 이파리가 마구잡이로
흔들립니다.
우울감에 함몰된 환영(幻影)의 빙의(憑依)...
앤서니는 이제 갓 태어난 아이처럼, 간호사
캐서린(올리비아 윌리엄스 분)의 품에 기대어 있죠.
올리비아 콜맨 또한 점차 나약해지는 아버지에게
헌신하며 가족과 자신의 삶 사이의 갈림길에서
고뇌하고, 또 눈물짓는 딸 ‘앤’ 역을 섬세하게
소화해냈습니다.
기억의 흐름이 바뀌면서 닥치는 이야기의 구성도
밀도있게 어우러져 있죠.
"시계가 없으면 시간을 알 수 없어" 라며 앤서니가
손목시계에 집착하는 시퀀스가 그러합니다.
시간의 기억을 어떻게든 부여잡으려는 행동을
은유하는 탁월한 묘사이죠.
모두가 한때는 울창한 나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무엇도 영원할 수는 없을 터... 어느 순간
나뭇잎을 다 뱉어내고 앙상해지죠(화면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장면이 자주 등장함).
이것이 필연적이라는 것이 우리를 사뭇 슬프게
합니다만... 플로리안 젤러 감독은 말합니다.
"앤서니 홉킨스가 어릴 적 엄마의 자장가를
기억해내며 눈물 흘릴 때 촬영 현장의 모두가
울었지요."
"엄마가 보고 싶다" 며... 흐느끼는 앤서니의
마지막 초상을 마주하며 관객들 또한 한없는
눈물을 흘립니다.
1. 영화 < 더 파더 - The Father > 트레일러
- https://youtu.be/khIb0L_gYZ8
영화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앤서니의
평온한 모습으로 이야기는 시작되죠.
하지만 오프닝으로부터 10여 분이 지나고 앤서니가
주변을 의심하기 시작하며, 영화는 앞서 믿었던
모든 것이 전복되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극도의 혼란을 유발하는 내러티브와 모든 예상을
뒤엎는 미스터리 적 전개는 영화 속에서 절묘하게
융합되죠.
시종일관 부서진 현실의 조각이 스크린에
나타나고, 일련의 상황이 퍼즐처럼 '스릴러’ 나
'초현실적 사이코 드라마’ 사이의 경계를 오가는
장르적 색채와 결합되고, 또 변주됩니다.
극 후반부 현실과 망각을 연결하던 딸 앤이
스크린 뒤켠으로 사라진 후 극의 분위기는
반전된 채, 그나마 유지되던 불완전의 균형이
완전히 흐트러지죠.
집의 구조가 변화하듯, 그들은 '아버지와 딸’ 이란
사실을 잊은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앤은 울음을 터뜨리고, 무의식의 표지(標識)가
된 앤서니의 얼굴은 현실로 돌아오죠.
- https://youtu.be/oSDv5_4zFPw
< 더 파더 > 는 관객에게 일종의 체험을 제공하는
영화로, 다만 수수께끼와 같은 형태로 그 체험을
구체화했습니다.
치매를 다룬 다른 많은 영화들처럼 이야기를
외부의 시선으로 풀어내고 싶지 않았던
플로리앙 젤러 감독...
그는 관객이 이 이야기에 관찰자로 연결된
감성적 포인트마저 잃어버리길 원했죠.
젤러는 대신, 보다 불편한 방식으로 스토리를
끌고 가며 관객을 독특한 위치에 놓습니다.
모든 것에 질문을 던져야 하는 일종의 시험대
같은 곳에 말이죠.
하여, 관객들은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영화 속
아파트나 병원이 마치 미궁(迷宮)과 같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이로써 관객들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무엇이 실화이고 무엇이 픽션인지
헷갈리게 되죠.
언제나 상황을 통제하던 아버지 앤서니가 통제권을
잃어버리는... 그토록 취약하고 연약한 상황을
더욱 고통스럽고 편치않게 품게끔 몰고 가는
것입니다.
앤서니라는 캐릭터는 단순히 혼란스럽고 믿을 수
없는 화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스스로의 기억과
맞서며 끝없이 고독한 싸움을 이어가야 하는
존재이죠
플로리안 젤러 감독은 말합니다. “관객이
미로 속에서 손으로 벽을 더듬어 길을 찾는 기분을
느꼈으면 했지요.”
관객들은 그렇게, 앤서니가 갖는 개인적이고
내밀한 감정, 두려움, 필멸에 대한 생각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자신의 자아가 분열되면서 자장가를 불러줬던
엄마를 찾으며 우는 어린아이로 뒤바뀌는 앤서니의
모습...
영화의 실마리가 주어지는 대목이자 감정적으로
큰 울림을 선사하는 이 피날레 신은,
어린아이를 연기하는 앤서니 홉킨스가 아니라
우리 앞에서 울고 있는 어린 앤서니 그 자체로,
영화의 진정한 목적지로 자리하죠.
연극 무대처럼 주로 집 안에서 촬영된 영화
< 더 파더 > 는 철저하게 앤서니 한 사람의 1인칭
시점을 따라갑니다.
영화음악가 루도비코 에이나우디의 엘레지 풍의
피아노 콰르텟 'Cold wind var.' , 'Low mist var.' ,
그리고 'My Journey' 와 함께,
적재적소에 흐르는 퍼셀, 벨리니와 베르디의
클래식 오페라 아리아들은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극의 흐름에 격조있는 리듬을 선사해주죠.
여기에 벽의 색상, 그림들, 주방과 가구 배치의
변화를 통해 극 중 제시된 장면이 실제인지,
앤서니의 환각(幻覺)인지 모호한 시선으로
보여주면서 긴장감을 고조시킵니다.
2. < 더 파더 > 속 명배우
https://youtu.be/N0wHVOoNm1M
영화 < 더 파더 > 에서 실타래처럼 뒤엉키며
흐트러지는 현실의 문제는 이후 끊임없는 혼란의
미로를 관통하게 되죠.
감독은 관객에게 짐짓 묻습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끔찍한 것은 ‘어긋난 시선’ 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인지, 아니면 스스로의
'모순된 상황’ 을 맞이하게 된 개인인지를 말이죠.
2. 벨리니 오페라 < 노르마 - Norma > 1막
노르마의 아리아 '정결한 여신이여'(Casta Diva)
-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
https://youtu.be/718vx_927lU
1막 1장, 여사제를 거느린 드루이드교 여제사장
노르마는 전쟁을 갈망하는 군중들을 향해
"전쟁보다는 평화를 기다리는게 신의 뜻이다" 라고
설득합니다.
노르마는 떠오르는 달을 품으며 점술로 신탁을
부르는 기도의 카바티나 '정결한 여신이여'
(Casta Diva) 를 부르죠.
이 곳은 이탈리아 전 오페라 중 대표적인
명 아리아로 어려운 장식적인 기교에 난해한
멜로디 라인을 잡아야 하는데다,
넓은 음역을 자유자재로 누벼야 하고, 복잡한
심정을 심리적인 표현으로 표출해야 하는 난곡으로
유명합니다.
노르마는 이 노래를 통해, 여제사장으로서 계율을
어긴 금지된 사랑을 하고, 또 자기로부터 멀어져간
남자를 그리는 여인으로서 사랑 때문에 조국을
부름을 어기고 민족을 배신하는... 참담한 심경을
애절하게 풀어내고 있죠
아리아의 후반부는 카발레타 '그리운 사람이여
돌아와다오' 로, 다시 한번 적국 로마 총독이자
아이들 아버지인 폴리오네의 품에 안길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 더 파더 > 에서 이토록 고혹적인 아리아 '정결한
여신이여' 는 장중 디바 마리아 칼라스의 목소리로
2차례 불리워지죠.
앤서니는 처음엔 그저 일상적으로 라디오에서,
다음엔 혼란스런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오디오를
통해 이 곡을 듣습니다.
한데 두번째 시퀀스에선 CD에 문제가 생겼는지
갑자기 소리가 어그러지죠. 앞으로 닥쳐올
먹구름의 상황을 암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르마' 역의 소프라노와 같이 콜로라투라 기술과
표현력, 그리고 힘과 카리스마를 모두 갖춘
소프라노를 '소프라노 아솔루타'(절대적인
소프라노) 라고 말하죠.
바로 이 불멸의 소프라노 아솔루타로 불리는
칼라스의 업적 중에서도 < 노르마 > 를 최고의
프리마 돈나 오페라로 끌어올린 것이 그녀의
가장 큰 공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칼라스는 노르마', '노르마는 역시 칼라스' 라는
등식은 지금도 당연시되는 실정이죠.
3. 비제 오페라 < 진주조개잡이 - 'Les pêcheurs
de perles > 1막 나디르의 아리아 '귀에 익은
그대 음성'(Je crois entendre encote)
https://youtu.be/jgS9lQbUD5k
제사장인 누라바드와 함께 진주조개잡이들을
동반하고 해변에 도착한 무녀 레일라는 그녀가
노래를 부를 외딴 바위로 인도됩니다.
혼자 남은 나디르는 사랑하는 레일라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떠올리면서 미려한 로망스 '귀에 익은
그대의 음성을'(다시 한번 : 'Je crois entendre
encore') 을 부르죠.
레제로 테너의 미성이 그야말로 한껏 발휘되는
명곡입니다.
- 테너 롤란도 비야손
: 미셸 플라송 지휘 뮌헨 방송교향악단
https://youtu.be/ET_bXJada4Q
- 테너 살바토레 리치트라 / 로열오페라
: 영화 < 피아노 II - The man who cried OST
https://youtu.be/o_oFQT8rurw?list=OLAK5uy_lC9oZja4_Ol6R-7Pqx2ub4000ekZe_5Wk
4. 헨리 퍼셀 오페라 < 아더 왕 - King Arthur
: The British Worthy >(1691) 3막 아리아
'What power art thou(The cold genius)'
'나를 깨우는 자 누구인가'(What power art
thou : 일명 'Cold Song') 는 바로크 시대 영국을
대표하는 작곡가 헨리 퍼셀의 세미 오페라
< 아더 왕 > 의 3막에 나오는 아리아죠.
섹슨 족의 게르만 마법사 오스몬드는 아더 왕의
연인 에멀린을 차지하기 위해, 마법을 써 숲을
혹독한 겨울의 얼음 나라로 만들어 버립니다.
바로 그 때 사랑의 신 '큐피드'(Cupid)가 내려와
잠자는 '겨울 신'(God of winter)을 깨우죠.
그러자 이 겨울 신은 눈을 침대삼아 영원한 잠을
자고 있는 자신을 깨우는 자가 누구냐고 투덜대며
일어납니다.
- 베이스 바리톤 페테리 살로마
: 윌리엄 크리스티 의 레자르 플로리상
https://youtu.be/ARyq4V3Pw_c
- 베이스 바리톤 스테펜 바르코,
: 존 엘리옷 가드너
https://youtu.be/qNSKxEhAh1Q
- 스팅(Sting)의 리메이크 노래 'Cold Song'
https://youtu.be/kANE25lLjqQ
- 李 忠 植 -
첫댓글 영화 < 더 파더 > 는 평생 믿어왔던 모든 것이
흔들리는 것에 혼란을 느끼는 아버지의
이야기이자, 나약해지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자신의 삶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 딸의 이야기입니다.
플로리안 젤러 감독은 연극이 관객과 소통하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영화의 관객들도 즐길 수
있기를 바랐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죠.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스릴러 같다. 연극 무대가
그랬던 것처럼 내러티브를 쌓으면서 관객이
이야기의 일부가 되기를 원하고, 관객이 캐릭터와
가깝게 느끼기를 바랍니다."
프랑스 출신의 플로리안 젤러 감독은 이미
유명한 극작가였죠.
2012년 초연한 연극 < 르 플레 - Le Pere :
The Father > 가 미국 공연에 성공하며,
이후 동일한 작품을 각색한 영화 < 플로리다 >
(2015)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2020년에 본인의 연극을 직접 각색해서
이 영화 < 더 파더 > 를 만들었죠.
영화가 제 93회 아카데미상 6개 부문의 후보로
오르면서, 그는 프랑스 영화계의 루키로
떠오릅니다.
물론 영화의 주요 소재인 ‘치매’ 라는 화두는 다소
고루해 보이지만 그의 관점만큼은 신선하죠.
< 아무르 >(2012)나 < 스틸 앨리스 >(2014),
< 노트북 >(2004) 등에서 상황의 설정을 위해
사용된 소재가,
< 더 파더 > 에서는 관점의 주요 주제가 되어
등장합니다.
시종일관 부서진 현실의 조각이 스크린에
나타나고, 일련의 상황이 수수께끼처럼
'스릴러’ 나 ‘초현실적 사이코 드라마’ 의 장르적
색채와 결합하죠.
영화의 엔딩 신... 카메라는 울먹이는 앤소니를
뒤로 하며 한 장소에 멈추어 서죠.
이 피날레 시퀀스의 창밖 풍경을 통해 관객은
방금 눈앞에서 앤서니 홉킨스가 느낀 혼란을
고스란히 전달받습니다.
그를 통해 우리는 인생의 역행이라는... 불가능한
환상을 꿈꿀 수 있게 되죠.
이제 갓 태어난 아이처럼 앤서니는 간호사의
품에 안겨 있습니다.
이 순간 방 안은 상상계가 되죠. 그리고 동시에
사실과 연루된 실제 세계의 진행 공간이 됩니다.
처음부터 완전히 갇힌 ‘실내극’ 의 형태를 띄던
드라마가, 이 장면에서 폐쇄된 개인의 내면을
포착하는 장소로 변용되죠.
작품에 녹아 있는 인간의 감정과 연결, 공감의
정서는 공간적인 배경을 뛰어 넘는 보편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젤러 감독은 “앤서니는 엔지니어였고, 아마도
좋은 취향의 소유자였을 것” 이라는 명제하에
공간에 대한 이미지를 발전시켜 나갔죠.
특히 집이라는 한정적인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인 동시에 주인공의 혼란이 가중될 수록
낯선 공간으로 느껴져야 하는 만큼...
하나의 공간이 여러 개의 다른 공간처럼
여겨지도록 만들기 위해,
아파트의 구조나 문, 창문과 같은 틀은 그대로
유지하되 골드에서 크림, 노랑, 갈색, 그리고
파랑까지 색이나 톤, 가구의 디테일을 조금씩
바꾸는 방식으로 세트를 디자인했습니다.
드라마 < 더 파더 > 속 앤서니는 혼자이고
치매에 걸린 상태입니다.
간혹 앤서니의 사위, 간병인이 그와 독대하지만
그 어떤 인물도 이 노인을 온전히, 또 깊숙이
이해하려 들지 않죠.
질문을 위해 존재하는 여백처럼... 이 과정에서
효녀 딸 앤 역의 올리비아 콜맨은 주요한 반사적
캐릭터로 함께 합니다.
가장 안락하고 편안해야 할 공간인 아파트가
때로는 차갑게 느껴지고, 돌연 낯설어지는 등
주인공을 둘러싸고 계속해서 변모하는데...
아파트의 이러한 변화를 감지하기 시작하면서
앤서니는 자신의 세계가 변하는 공포에
휩싸이게 되죠.
이처럼 < 더 파더 > 에서 아파트나 요양원이라는
공간은 또 하나의 중요한 주인공으로 자리합니다.
< 더 파더 > 속 노인 앤서니가 처한 혼동과 상실의
시간을 공유하는 방식은 너무나 비밀스러워서,
관객들은 드라마에 빠져들 수밖에 없죠.
시시각각 변하는 주관적인 시점을 영화는 '배우의
얼굴’ 이란 불가결한 요소로 붙잡습니다.
영화를 보았는데, 선생님의 친절하고 자세한 해설로 더욱 심도있게 되짚어 보았습니다.
영화중에 나오는 음악 안내도 대단히 감사합니다.
올해 84살(1937년생)인 홉킨스는 역대 최고령
남우주연상 후보이기도 한데, 오스카 후보로
정식 지명된 후엔 “이 늙은이를 믿어줘 고맙다”는
소감을 SNS에 남기기도 했죠.
발표 직전 까지도 분위기는 <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 > 속 가상의 주인공 레비 그린을 열연한
채드윅 보스만의 사후 수상쪽으로 기울었습니다.
비록 앤서니 홉킨스가 영국 아카데미에서 상을
받았지만 영국은 홉킨스의 홈그라운드였죠.
< 양들의 침묵 >(1991)으로 제64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이미 거머쥐었던데다, 아카데미
후보 지명만 6번째인 이 명배우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고루하다거나 반칙 아니냐는
말 또한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더욱이 마지막까지 연기혼을 불태우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보스만의 산을 넘긴 힘들어 보였죠.
하지만 < 더 파더 > 에서 기억을 잃어가는 노인
앤서니를 연기하는 앤서니 홉킨스는 기꺼이
영화의 뿌리이자 줄기이자 꽃이 되어 명배우의
명불허전을 보여줬습니다. 감탄의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었죠.
결국 제93회 아카데미는 남우주연상 수상자로
웨일즈 출신의 위대한 배우 필립 앤서니 홉킨스
경을 선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