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자다가 잠이 깨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생각이 나지 않을 때가 있다
어디부터 이야기를 해야 하나… 어린 시절 하도 밤마다 날아다니는 꿈을 많이 꾸어서 어느 가게 앞에서 등교길에 가방을 땅에 내려놓고 팔을 벌린 적이 있다. 동생이 그 모습을 보았단다. 내 기억에 녀석은 없었는데…
꿈이 현실인지 지금이 꿈인지 분간이 안되는 순간들은 분명 내가 너무 행복하다고 느끼거나 아니면 그 시절을 벗어나고싶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내가 미국에 도착한 날은 1983년 12월 30일이었다. 아마 일요일이었는지 길거리에 사람들은 안 보이고 차들만 주차되어 있었다. 무척 추운 날이었는데 간판들이 모두 영어로 써있어서 내가 미국에 왔기는 했다는 생각이 엉뚱하게 들었다.
그 해 이월에 대학교 이 학년의 신분으로 미국에서 나온 집사람과 결혼을 했다. 우리는 교회 청년회에서 같이 임원을 하다가 친해졌다. 장인이 나의 결혼을 반대하셨는데 아직 경제력이 없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결혼하는 닐은 아주 추웠는데 무슨 보따리를 들고 지나가는 택시를 잡느라 무척 부끄러웠던 기억이 있다. 안 어울리는 양복에 빨간 넥타이 그리고 동네 이발관에서 머리를 짧게 자르고 기름을 바른 채로…
나는 학교에서 적응을 잘 못했다. 삼수를 하고 보충역을 갔다온 이유로 신입생들과는 다섯 살이 차이가 났고 현역을 갔다 온 복학생들은 나 보다 한 두 살이 위였다. 그리고 당시에 데모들이 거의 매 주 있어서 교정에 최루탄 냄새가 가실 날이 없었다.
뉴욕에 도착하면서 내가 기대했던 것은 누군가가 나에게 직장을 소개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 달이 가까워 오도록 아무 소개도 없었고 그로서리나 브로드웨이 도매상 등 인터뷰하는 곳마다 거절 당했다. 심지어는 사는 동네에 구화식품이라는 마트가 있었는데 거기서도 거절 당했다
살던 아파트는 백 년 정도 된듯 해서 엘리베이터는 냄새와 진동이 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힘든 것은 바퀴벌레였다. 그것들이 신발 속, 침대 등 안가는 곳이 없어 늘 노이로제에 걸렸다. 한 번은 바퀴를 죽이는 폭탄을 터뜨렸다. 몇 시간이 지난 후 돌아와 문을 여니 바닥에 발을 디딜 곳이 없을 정도로 깔려 있었다. 약 한 주 정도가 지나면 어디에거인지 다시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한 달이면 예전의 수준으로 돌아갔다
한 달만에 신문 광고를 보고 얻은 잡은 야채가게 일이었다. 새벽에 눈을 비비고 Northern Blvd에 서 있으면 12인승 푸른 색 밴이 와서 픽업을 한다. 차에 실려 약 삼십 분을 졸면 차는 코네티컷 그리니치에 있는 가게에 도착한다. 퇴근 길에 보석같이 빛나던 Shea stadium이 나와는 상관 없는 다른 세상으로 여겨졌다.
야채가게는 두 주인이 동업을 하는 두 가게중 하나였는데 장사가 잘되어 내가 담당하던 젖은 야채 중에서 파를 다듬고 씻고 진열하는 것을 거의 뛰어다녀야 했다. 브라클리는 바벨탑을 쌓듯 둥그렇게 싸서 올리고 중간에는 얼음을 채웠다. 수 많은 상추와 배추 종류등과 같이 섿업을 해놓으면 그것은 나만의 훌륭한 작품이 되어 주었다.
그 가게에서는 엄청난 양의 야채와 과일을 담았던 박스가 나왔는데 한참 일하는 동안은 지하로 통하는 계단에 던지는데 오후가 되면 그 계단이 꽉 메워져서 당번을 정해 두 사람이 밑으로 내려가 하나씩 발로 박스를 부수고 덤스터에 쌓는다. 덤스터 두 개가 가득차면 물을 뿌려가며 발로 뛰며 누르고 사방으로 박스 담을 쌓아서 산더미를 만든다
손님 중에는 다이애나 로스가 있었는데 몇 번 싸인을 받으려다가 결국 용기 부족으로 실패했다. 직원들 중에는 왈짜도 있어서 한 번은 나와 싸운 적도 있었다. 말다툼을 하다가 갑자기 배추가 날라오더니 나를 향해 돌진했다. 나는 엉겁결에 목을 야채대에 누르고 버둥거리는 그를 내려보다가 풀어주었다. 나중에는 그와 친하게 지냈고…
집사람은 봉제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먼지가 너무 심해서 생선과 샐러드를 파는 브롱스의 한 가게로 옮겼다. 나나 집사람이나 주인들의 사랑과 신뢰를 받았다. 일요일이 오면 늦잠을 자고 일어나면 받은 주급이 신기해서 따로 세어보고 합쳐서 세어보고 한국돈으로 이게 얼마냐 하며 만족하곤 했다.
그러다가 84년에 아내가 임신을 했다. 시간이 갈수록 추운데서 무거운 것을 들어야하는 그니의 일이 염려스러웠다. 한 사람만 벌어서는 도저히 세이브를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NC에 사는 처이모님이 그곳에 단 돈 사천불에 기가막힌 비즈니스가 있다고 내려 오라고 권했다. 당시에 모은 돈이 약 육천 불 정도로 기억하는데 고민 끝에 쓰던 가구와 재봉틀을 처분하고 여행가방 두 개만 들고 버스를 탔다.
그 때 야채가게의 주인 두명이 한 분은 김씨 한 분은 최씨였는데 김씨는 아주 아담한 분이었고 최씨는 거구였다. 당시에 중학교 동창을 우연히 그 가게 매니저의 결혼 피로연에서 만났는데 나중에 만난 그 친구에 따르면 그 중 한 분이 종업원을 태우고 가던 중에 밴이 비탈에 굴러 몇 명이 사망했다고 말했다. 그 김씨라는 분은 내가 그만둘 때 조금만 더 다녀달라며 집사람을 캐쉬어로 채용하겠다며 눈물을 보였는데…
훗날 세월을 계수해보니 내가 패잔병 같이 뉴욕을 떠나고 얼마 안 되어서 그 사고가 난 것을 알았다.
하루는 그 동창이 아주 오래된 고물차를 끌고 와서 우리를 태우고 롱아일랜드에 해변에 갔다. 아 그 어렵고 외로왔던 시절 나를 데리러 왔던 그 친구를 잊을 수 없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배씨 아저씨는 술을 좋아했다. 야채가게 매니저의 피로연이 끝나고 그 아저씨의 차를 타고 집을 가는 길에 그는 운전 도중 길을 잃었다. 약 한 두 시간을 헤메며 그는 영어로 온갖 욕을 쏟아냈다. 그리고 급기야는 좌회전을 하는 중에 중앙분리대를 들여 받았다. 동네에서 몇 블락이 떨어진 지점에 차가 서고 나서야 우리는 그 차를 탈출할 수 있었다.
84년 7월 4일이 되었다. 처남이 불꽃놀이를 보러가자고 했다. 허드슨 강을 따라서 firework 을 한다고 했다. 아내와 셋이서 맨하탄을 들어갔는데 주차를 할 수 없었다. 약 한 시간 이상을 헤매다 포기를 하고 다시 다리를 건너 퀸즈로 넘어오는 중간이었다. 당시에 다리는 공사중이었고 많은 차들이 그 빈 공간에 차를 대고 불꽃놀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도 그 틈에 차를 세웠다. 아 내 눈 앞에 벌어지는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대보름날 쥐불놀이와 수련회에 켐프파이어 아니면 어릴 적 할머니 집 아궁이에서 불장난 하던 것 국민학교 때 뒷산에서 불장난 하다가 불이 갑자기 번지는 바람에 위기를 맞았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것은 모든 어둠에도 희망이 있다는 전주곡과도 같았다. 불꽃이 터지는 속도와 그 크기 그리고 나와의 더리가 빠르고 크게 그리고 내 머리 위까지 접근을 했다. 그 때 경험했던 환희는 그 후로 볼 수 없었다.
그 시절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무도 나를 먼저 돕지 않는 세상의 이치와 만남이 첫째요 평생 처음으로 한 주에 70시간 가까이 일을 하면서 이민생활에 기초훈련을 마친 것이 두째다. 셋째는 내가 믿을 것은 나 자신의 몸과 노동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돈이라는 것을 안 것이다.
그레이하운드 버스는 어둡고 지저분했다.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우리는 결코 흥분이 되거나 즐겁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