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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군 -「권태」부대
친애하는 제2군 ‘권태18)’부대에도 격려와 축하를 보낸다! 주지하다시피 제1군과의 합동작전이 그대들의 임무이다. 그대들은 ‘감관적 욕망’이라는 무기로 적과 보병전을 전개하는 제1군을 도와 융단폭격으로 적의 방어선을 무력화시키는 포병 역할을 수행하는 용사들이다.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인간들이 계속해서 현실을 불만족스럽게 여기도록 만들어야 한다.
지루해진다는 것은 바로 혐오상태에 들었다는 증거다. 현재 자신들의 감관에 입력되고 있는 것이 원하는 만큼 스릴 있는 즐거움을 제공해주지 못하고 있고, 그래서 인간들이 그네들 어법대로 하면 ‘밋밋한 상황’에 대해 짜증을 내고 있다는 소식인 것이다. 그들은 지루하고 권태로워지자 새로운 짜릿한 자극을 통해 지루한 상태를 치유하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 자극은 나의 제1군이 열심히 제공해 줄 것이다. 그들은 감각적 쾌락에 빠져들 것이며, 다시한번 우리가 원하는 자리에 그들을 앉히게 될 것이다. 새로운 ‘존재’19)의 터전이 이래서 마련되는 것이다.
18) [역주] 권태로움으로 번역한 아라띠(arati)는 경에서 주로 muditā(더불어 기뻐함)와 대(對)가 되는 술어로 나타난다. 이 경우에 싫어함, 혐오가 그 적극적인 의미이고 넓게는 깨나른함, 따분함, 지루함 등을 함께 포괄하는 술어이다. 저자는 boredom으로 쓰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후자의 뜻으로 ‘권태로움’으로 옮긴다.
진짜 사기 치는 거지! 우리는 중생들이 언제나 새롭고 자극적인 것을 지속적으로 갈구하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가엾은 애완용 다람쥐들이 쳇바퀴를 돌리듯이 중생들은 기나긴 윤회의 수레바퀴를 끊임없이 돌리고 있는 것이다. 만약 중생들이 정신을 차려서 이 윤회의 수레바퀴를 얼마나 오래 돌리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된다면, 그리고 새롭고 참신하게 경험해 볼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게 된다면…….
물론 우리는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필요한 계략이, 그들로 하여금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일단 그들이 현재에, ‘지금-여기’20)에 온전히 머물게 되면 권태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어진다.
19) [역주] 존재[有]로 번역되는 바와(bhava)를 영어로 becoming으로 옮기고 있듯이 우리의 삶은 그냥 존재가 아니고 갈애와 집착을 통해서 끊임없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즉 존재는 어떤 고정된 불변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멸하는 진행과정 그 자체임을 뜻한다.
20) [역주] ‘지금-여기’로 번역한 딧타담마(diṭṭha-dhamma; here-andnow)는 기본적으로 ‘현재’, ‘지금 여기’, ‘금생’ 등으로 해석이 된다. 과거생과 미래생에 대(對)가 될 때는 금생의 의미가 되고, 과거와 미래에 대가 되어서 나타날 때는 현재의 의미가 되고 지금 여기라는 의미로 쓰일 때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등의 의미가 된다. 불교수행의 핵심은 매순간 지금 여기를 관(觀)함으로써 마음챙김(sati)을 굳건히 다져 상(想)의 피상적 인식을 배제, 모든 현상들의 실상 즉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것이다.
근래 우리는 고요와 투명을 적극적으로 저상(沮喪)하는 사회분위기를 조장해왔다. 그 결과 현대문화는 모두 급하고 열광적인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 음악에서부터 옷차림에 이르기까지 유행의 변천 속도는 엄청나게 빠르고, 대중들은 그것을 좇기에 정신이 없다. 대중은 정치(精緻)함보다 격렬함을 선호하게 되었다. 특히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는 인간의 주의집중 지속시간을 단축시키는 데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 일에는 텔레비전의 역할이 지대했고, 특히 그에 부수되어 발명된 리모컨이 인간들을 나태하게 만든 일등공신이다. 현대에 이르러 인간들의 주의집중력은 반 시간짜리 이야기마저도 가만히 앉아서 들을 수 없을 정도로까지 떨어졌다. 재미있는 영상물일지라도 단일 주제로는 반시간을 붙잡아놓을 수 없는 형편인데 그런 그들이 조용히 홀로 앉아있겠다고? 한 번 해보라지.
이 분야에서 우리는 멋들어지게 승리를 거두었고, 급기야 인간들은 지루함이야말로 견딜 수 없는 인생고(苦)라고까지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살아남기에 급급해서 모든 육체적 에너지를 몽땅 거기에 쏟아부어야 했던 시절에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자신의 동반자마저도 참아내지 못하는 활력 잃은 어설픈 인간들이 넘쳐나는 세대를 대하게 되었다. (하기야 그들 탓으로만 돌리기는 뭣하지만.)
사람들은 스스로 ‘권태’라는 가상지옥을 만들고 있다. 우리는 대도시의 지하철 속에서, 도처에 줄지어선 군중 속에서, 북적거리는 사무실 속에서 언제 어디에서나 그런 인간들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의 따분하고 무기력한 표정과 흐리멍덩한 눈동자에는 어떻게든 현실에서 벗어나 어디로든 떠나기를 꿈꾸는 그들의 마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아, 가련한 중생들. 그들은 자기들이 언제나 있어야 할 유일한 곳이 바로 지금 여기21)의 현실뿐이라는 사실만 깨달으면 되는데.
권태는 우리의 대적수가 위봐와땅하(vibhava-taṇha)라 부른, 우리말로 바꾸면 ‘존재소멸에 대한 갈애[無有愛]’22)라고 부른 것에 기반 한다. 그들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존재상태가 견딜 수 없다고 문득 판단하는데 물론 자신들의 심리상태에 주로 기인한 것이다. 이런 경향 때문에 인간들은 현재의 상태를 지워 없애고 싶어 하게 된다. 이런 정신작용은 극단적인 경우 자살로까지 이어지는데 결국은 더 저열한 생명을 받아 다시 태어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렇게 극단으로 치닫지 않고 좀 더 온건하다싶은 경우로는 술․마약․잠․얼빠진 오락 등으로 이것들은 야금야금 자신을 파멸시켜간다.
21) [역주] 여기서 쓰인 ‘지금 여기’는 불교수행에서 말하는 ‘지금-여기’가 아니라 마라의 지배에 순응, 현실을 숙명으로 받아들일 때의 지금 상황을 가리킴.
22) [역주] 존재하지 않으려는 갈애는 단견(斷見)과 관련 있고, 존재하려는 갈애는 상견(常見)과 관련 있다. 본문의 제4군 ‘갈애’ 참조.
우리의 두 가지 전략인 쾌락과 무기력의 덫에 걸려있는 한, 인간들은 결코 우리 손아귀를 빠져나갈 수 없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헤매다가 ‘중(中)’에 부설되어 있는 진짜 탈출로23)에 접근하는 사태가 발생하면 그땐 우리도 죽기 살기로 막아야 할 것이다. 그들에게 잠시의 틈도 주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귀에 우리가 예로부터 즐겨 써먹던 감언이설을 끊임없이 속삭여줘야 한다.
“이 얼마나 따분한 노릇인가. 나가자. 나가서 생을 즐기자.”
“아이 목말라. 마라, 잠시 쉬며 소마24)를 마시는 게 어때요?”
마라의 지시를 받아적느라 힘이 들었던지 여비서가 뿌루퉁해서 한 마디 한다.
“모든 존재들은 식(食)으로 지탱한다25)…….”
23) [원주] ‘중에 부설되어 있는 진짜 탈출로’는 부처님께서 발견하시고 가르치신 중도를 일컬은 것이다. 중도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 존재거부[無有]에 대한 갈애, 그리고 +이런 갈애들이 당연히 빚게 되는 견해들과 수행법 등 극단을 피한다. 그 대신 연기(緣起)와 사성제에 대한 이해에 기반한 팔정도의 계발에 초점을 둔다.
24) [역주] 소마(soma)는 천상의 신들이 마시는 신주(神酒)이다.
25) [역주] 《상응부》〈인연상응〉에 나오는 말을 마라가 인용하고 있다. 식(食āhāra)은 음식, 자양물, 양육 등을 뜻한다. 단식(段食/형체가 있는 음식/kabalikarāhāra), 촉식(觸食phassāhāra), 의사식(意思食mano- sancetanāhāra), 식식(識食vinnāṇāhāra)의 네 가지가 있다.)
“방금 뭐라고 하셨죠?”
여비서가 크리스털 물병에서 반짝이는 천상주를 한잔 따르며 묻는다.
“별 건 아니고, 예전에 읽었던 책 속의 한 구절이 문득 생각나기에.”
“우리 마라님은 정말 유식하셔……!”
(여비서는 애교를 떨며 다시 마라의 무릎에 올라앉아 필기장의 페이지를 넘긴다.)
_(계 속)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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