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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교공파 13세 목사공 정시형, 14세 종애공 정부 및 남양홍씨 묘갈
2022.4.18. 여천 정철중
8세 응교 정웅(鄭熊)공의 이드님인 9세 서해 정응규(鄭應奎)공이 무과에 급제하여 10여년 이상 남해안의 왜구를 방어한 전공을 세우고 전라좌수사로 재직하신 후로 후손들은 무반가(武班家)로서 명맥이 이어져 왔으나, 11세 현감공(휘 보문 保門) 후계는 문재(文才)를 떨쳐 사마시와 대과에 여러분 나가시고 충효의 가문으로 빛을 내었다.
10세 증판서 영사당(永思堂) 연(演)공이 팔선계(八仙稧)와 구로회(九老會)에 참여해 선비들과 교유한 가풍을 이어 당대에 저명한 학자의 문인으로서 교류한 기록이 많이 보인다. 이 전에 주요 집안을 소개하면서 아래 내용을 소개한 바 있는데, 한두 가지 보완하여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
□ 가계도(家系圖)
□ 13세 정시형(鄭時亨) 묘갈명(墓碣銘), 撰 남구만(南九萬)
- 원전서지 : 국조인물고 권65 갑인 이후 이화 입절인(甲寅以後罹禍立節人)
공의 휘(諱)는 시형(時亨)이고 자(字)는 숙하(叔夏)이며, 성은 정씨(鄭氏)이고 관향은 광산(光山)이다. 시조(始祖)는 고려조 삼중 대광(三重大匡) 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 정신호(鄭臣扈)이고, 5대조는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 정웅(鄭熊)이고, 고조(高祖) 정응규(鄭應奎)는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이고, 증조(曾祖) 정연(鄭演)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고, 할아버지 정보문(鄭保門)은 현감(縣監)이고, 아버지 정유(鄭維)는 군수(郡守)이다. 군수가 광해조(光海朝) 때 일방(一榜)의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하여 폐모(廢母)에 대한 상소를 올려 그 의논을 배척하려다가 향리에 여러 해 동안 숨어살았고,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원년)에 반정되자 곧바로 관직에 임명되었다. 어머니 함양 박씨(咸陽朴氏)는 집의(執義) 박명손(朴命孫)의 손녀이자 봉사(奉事) 박한(朴澣)의 딸인데, 만력(萬曆) 기미년(己未年, 1619년 광해군 11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는 영리하고 빼어났으며 자라서는 단정하고 씩씩하였다. 문장이 뛰어나고 필법이 신묘의 경지에 이르렀으므로 선배들이 그 학업을 감상하고 속성(速成)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런데 거듭 상(喪)을 당하여 6년간 시묘(侍墓)살이를 하면서 예에 지나칠 정도로 거상(居喪)하여 병이 들어 위태로운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정유년(丁酉年, 1657년 효종 8년)에 비로소 태학(太學)에 들어갔고, 무술년(戊戌年, 1658년 효종 9년)에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는데 파직되었다가 서용(敍用)되었다. 기해년(己亥年, 1659년 효종 10년)에 연원찰방(連源察訪)에 임명되었고, 임인년(壬寅年, 1662년 현종 3년)에 제용감 직장(濟用監直長)으로 전직되었다. 갑진년(甲辰年, 1664년 현종 5년)에 활인서 별제(活人署別提)로 승진하였다가 감찰(監察)ㆍ형조 좌랑(刑曹佐郞)으로 전직되었으나 파직되었다. 의정부(議政府)의 별도 추천으로 서용되어 위솔(衛率)이 되었다가 정미년(丁未年, 1667년 현종 8년)에 공조 정랑(工曹正郞)으로 전직되었다. 그때 현고(顯考, 현종(顯宗)을 가리킴)가 동조(東朝, 대비(大妃)를 위하여 집상전(集祥殿)을 건립하였는데, 공이 그 역사를 감독하였다. 한겨울인데도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낙성을 하니, 특별히 모엄(帽掩)과 표리(表裡)를 하사하였다. 호조로 전직되었다.
무신년(戊申年, 1668년 현종 9년)에 연달아 금천(金川)ㆍ면천(沔川) 두 고을의 수령에 임명되었으나 그때마다 호조 판서(戶曹判書)가 공이 부처의 업무에 능숙하다는 이유로 청원하여 유임시켰다. 주목(州牧)의 추천에 선발되어 기유년(己酉年, 1669년 현종 10년)에 공산 현감(公山縣監)에 임명되었는데, 그 고을은 주목(州牧)이 강등된 것이었다. 신해년(辛亥年, 1671년 현종 12년)에 파직되어 임천(林川)으로 돌아가서 그곳의 강산(江山)을 사랑하여 지명(地名)을 따서 반주(盤洲)로 호(號)를 삼고 그곳에서 일생을 마치려고 하였는데, 선혜청 낭관(宣惠廳郞官)으로 차출하여 진휼(賑恤)의 일을 관장하도록 하니,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임자년(壬子年, 1672년 현종 13년)에 형조 정랑(刑曹正郞)에 임명되었다가 부평 부사(富平府使)로 승진하였고, 을묘년(乙卯年, 1675년 숙종 원년)에 해주 목사(海州牧使)로 승진되었다. 그런데 형조에서 송사에 진 사람의 거짓말을 듣고 아뢰어 파직시켰다가 조정에서 그 송사의 문건을 열람하고 무고임을 알아 유임할 것을 청하였다. 오래 있다가 어떤 사건에 연좌되어 파직되고 유배되었다가 곧바로 사면되었다.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에 임명되었다가 원주 목사(原州牧使)로 나가 진휼을 잘했다고 하여 말을 하사받았고, 계해년(癸亥年, 1683년 숙종 9년)에 또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스스로 연로하다고 여기어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왔다. 이조에서 공이 치사(致仕)할 나이가 곧 닥친 것을 애석하게 여긴 나머지 치사 이전에 다시 목민관(牧民官)을 시키려고 연달아 세 고을의 수령 후보의 대상으로 첫째에다 넣어 태인 현감(泰仁縣監)에 임명되었다. 어떤 사람이 인사 행정이 한쪽으로 치우쳤다고 말하자, 공론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지만 공은 굳이 사양하여 체차되었다.
정묘년(丁卯年, 1687년 숙종 13년)에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으로 임명되었다가 선공감 부정(繕工監副正)으로 옮겼다. 기사년(己巳年, 1689년 숙종 15년)에 시사(時事)가 크게 변하였고 나이도 치사할 때가 이르렀으므로 결단을 내려 반주(盤洲)로 돌아가 다시금 벼슬하지 않았다. 무인년(戊寅年, 1698년 숙종 24년)에 장수로 품계가 승진되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기묘년(己卯年, 1699년 숙종 25년)에 졸(卒)하여 공주(公州) 반탄(半灘) 오좌(午坐)의 묏자리에 묻혔다.
부인 문화유씨(文化柳氏)는 현감(縣監) 유동발(柳東發)의 딸인데, 그의 선대가 혁혁하고 현달하여 으뜸의 씨족으로 일컬어졌다. 공보다 2년 전에 태어났다. 성품이 곧으면서도 순하고 엄하면서도 자애로운 등 부도(婦道)가 매우 잘 닦아졌으므로 종족들이 귀의하였다. 공보다 11년 전에 세상을 떠나 공의 곁에 묻혔다.
공은 4남 1녀를 두었다. 맏아들 정휘(鄭徽)는 진사(進士) 현감(縣監)이고, 둘째 정징(鄭徵)은 백부(伯父)의 후사로 나갔는데 문과 출신 병조 정랑이고, 셋째 정민(鄭敏)은 무과 출신 가선 대부(嘉善大夫) 부사(府使)이고, 넷째는 정부(鄭敷)이다. 딸은 김규(金湀)에게 시집갔다. 정휘는 6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정오상(鄭五常)ㆍ정오행(鄭五行)ㆍ정오서(鄭五敍)ㆍ정오교(鄭五敎)ㆍ정오준(鄭五俊)ㆍ정오채(鄭五采)이고, 딸은 이천석(李天錫)ㆍ이광조(李匡祚), 생원(生員) 윤동태(尹東泰)에게 각각 시집갔다. 정징은 정오상을 후사로 삼았다. 정민은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정오봉(鄭五鳳)이고, 딸은 권집(權)ㆍ송내상(宋來祥)에게 시집갔다. 정부는 3남을 두었는데, 정오규(鄭五奎)ㆍ정오위(鄭五緯)ㆍ정오운(鄭五雲)이다. 김규는 4남을 두었는데, 김상화(金相華)ㆍ김상렬(金相烈)ㆍ김상현(金相顯)ㆍ김상철(金相哲)이다. 측실에서 3녀를 낳았는데, 김응명(金應明)ㆍ이신저(李信著)ㆍ심상충(沈尙忠)에게 각각 시집갔다. 증손 몇 명은 모두 어리다.
공이 일찍부터 무리에서 뛰어난 재주와 세상에 수응하려는 뜻이 있어 더불어 교유하는 사람이 모두 다 일시의 유명한 부류였으니, 공경(公卿)을 하더라도 그 누구에게 뒤지겠는가? 그런데 정시(庭試)의 대책문(對策文)이 누차 합격권에 들어갔으나 눈이 오색(五色)에 어두워 급제(及第) 한 번을 못함으로써 만물을 재성(裁成)할 수 있는 도구를 가지고도 널리 시행할 수 있는 지위가 없었으니, 어찌 명이 아니겠는가? 비록 그렇기는 하나 가문의 음덕으로 평탄하게 진출하고 또 스스로 분발하여 낭관(郎官)에서 명예가 드높았고 고을에 혜택이 흠뻑 졌음으로써 말과 옷감을 하사받는 등 특별한 은총이 자주 내렸으니, 벼슬살이가 여기에 이르면 또한 영광스럽다고 이를 만하다.
그리고 관리들 속에 뒤섞여 있으면서도 마음에 고의(古誼)가 독실하여 출처(出處)의 즈음에는 반드시 마음에 만족해야 하였다. 만년에 일을 사절하고 초연(超然)히 벼슬길에서 떠나 한 번 도성의 문을 나가자 곧바로 세상의 분란을 단절하고 북해(北海)처럼 벗을 불러 술잔을 나누고, 서호(西湖)처럼 학ㆍ매화와 어울려 노닐며 즐기면서 세상 밖의 맑은 운치를 십수년간 누렸으니, 자고이래로 순리전(循吏傳) 가운데 또 이처럼 고상한 기풍을 가진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아! 숭상할 만하도다.
나는 응교부군(應敎府君)의 외손자이므로 나와 공은 실로 중표(中表)의 정의가 있다. 그런데 중간에 떨어져 살다가 갑자기 천고(千古)로 떨어져 버렸으므로 옛날을 회상할 때마다 매우 슬펐다. 공의 아들들도 많이 세상을 떠나고 막내아들만 남아있는데, 그가 묘소에 기록할 글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내가 이 일에 대해 어찌 차마 늙어서 정신이 혼미하다고 사양할 수 있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가림(嘉林)의 동쪽에 반주(盤洲)가 있도다. 호수와 산들이 맑고 화려하여 수목이 깨끗하고 그윽한데, 이곳이 바로 공이 사는 집이니 노년에 벼슬을 사직하고 여기에서 휴식했도다. 공산(公山) 서쪽 모퉁이에 반탄(半灘)이 있도다. 산봉우리가 휘감아 안아서 풍기(風氣)가 왕성하게 서렸는데, 이곳이 바로 공의 무덤이니 혼백이 안식(安息)한 곳이도다. 유풍(遺風)을 상상하니 어언간 좌우에 맴돌도다. 백세는 앞에 있고 천세는 뒤에 있도다. 좋은 말을 새기니 영원히 불후(不朽)할 것이도다.
< 겸재공의 임천고암(林川鼓巖) >
□ 14세 정부(鄭敷) 묘표(墓表) 및 부인 남양홍씨(南陽洪氏) 묘갈(墓碣)
▪ 종애처사(鍾崖處士) 정부(鄭敷) 묘표
출전 : 寒水齋先生 文集 卷之三十三/墓表
處士鄭公 敷 墓表
嘉林濱海。江山之勝。甲於湖右。友人鄭大哉居焉。以淸修力學。爲搢紳章甫所推重。今冢宰李公晩成奉 命巡撫。薦其才識于朝。不幸早世。未展其抱負。識與不識。莫不嗟惜焉。大哉諱敷。故海州牧使諱時亨之季子也。以 崇禎己亥閏三月七日生。自幼凝重端潔。及長行誼純備。能文辭善草隷。先輩期以遠到。鳴於泮試。農巖金公昌協誦其傑句。亟加歎賞。自是擅譽場屋。屢捷發解。而畸於命。竟至無成。人皆稱屈。己巳丁內艱。哀毀踰制。己卯牧使公寢疾屢月。扶侍服勤。誠孝懇至。及喪執禮如前。壬辰入洛感疾。以五月十四日終。得年五十四。葬于林川家後枕戌之原。大哉孝友出人。事兄姊歡愛藹然。至其析著。厚讓而薄取。二兄先亡。奉丘嫂克盡烝嘗之享。撫諸孤如己出。鄕隣化服。有疑事輒叩質。蓋大哉坦率簡默。平生無矯激之行。忌忮之心。人皆信愛之。自孤露之後。優游於江山之間。杜門端居。博觀經籍。手抄諸史作十冊。名以史雋。浸灌其中。樂以忘其窮阨。最好朱子書。留心爲己之學。而常有晩悟難成之歎。少日同隊幷列華要。而未嘗一通書問。人以爲難。光州之鄭。以高麗門下贊成事臣扈爲上祖。入我朝珪組蟬聯。應敎熊當 中廟朝。以檢閱上章。請伸佔畢,濯纓之冤。士論韙之。曾祖諱保門縣監。祖諱維。光海時中司馬。立異於讎母之論。走歸鄕里。 仁廟改玉。首被收錄。官止白川郡守。牧使公少有峻望。見重於一時。勝流。晩以循吏名。己巳禍作。棄官還鄕。妣文化柳氏。左議政亮之後。監察東發之女也。大哉娶監司洪公葳女。生三男。五奎,五緯,五雲。長房二男二女。仲房二男季房二女。嗚呼。以大哉之才行。早負儁譽。宜若大鳴于世。而竟齎志而歿。天道不可知。爲善者何以勸也。雖然今五奎克紹家傳。知名士友間。天之所以裕後者。其在斯歟。余與大哉有連家之誼。慣知其平日言行。玆於墓文之託。義不敢辭。遂撮其家狀敍次如右。銘曰。
我佩之芳兮。人不知何傷。守分安命兮。聊以徜徉。睾如斯丘兮。吉士之藏。孝子鑱珉兮。千秋耿光。
가림(嘉林)은 바다와 인접한 곳으로서 강가의 뛰어난 경치가 호우(湖右) 지역에서 으뜸으로 꼽히는데, 나의 우인(友人) 정 대재(鄭大哉)가 그곳에 살았다. 그는 청백하게 몸을 수양하고 학문에 힘써 높은 관원들과 선비들의 추중(推重)을 받았는데, 지금 이조 판서로 있는 이만성(李晩成)공이 왕명을 받들어 본도를 순무(巡撫)할 때에 공의 재주와 학식을 조정에 천거하였으나 불행히 일찍 세상을 떠나서 그 포부를 펴보지 못하였으므로, 공을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모두 애석하게 여기었다.
대재(大哉)는 휘(諱)가 부(敷)이고, 고(故) 해주 목사(海州牧使) 정시형(鄭時亨)의 막내아들이다. 숭정(崇禎) 기해년(己亥年, 1659년 효종 10년) 윤3월 7일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침중 단결(端潔)하였고, 자라서는 행의(行誼)가 순수하게 갖추어지고 문사(文辭)에 능하였으며, 초서(草書)와 예서(隸書)를 모두 잘 썼으므로 선배들은 그가 원대하게 성취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이윽고 반시(泮試)에서 명성을 울렸을 때에는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공이 그의 걸출한 글귀를 외우면서 자주 감탄하고 칭찬하였다. 이로부터 장옥(場屋)에서 명예를 독차지하면서 누차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으나 명운(命運)이 기구하여 끝내 대과(大科)에는 급제하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억울하게 여기었다.
기사년(己巳年, 1689년 숙종 15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예제(禮制)보다 지나치도록 슬퍼한 나머지 몸이 몹시 야위었고, 기묘년(己卯年, 1699년 숙종 25년)에 목사공(牧使公)이 서너 달 동안 병들어 누워 지내자, 곁에서 부축해 모시며 병구완을 하는 데 지극 정성으로 효도를 다하다가 상을 당하기에 미쳐 예전처럼 상례대로 거상(居喪)하였다. 임진년(壬辰年, 1712년 숙종 38년)에 서울에 들어갔다가 병이 들어 5월 14일에 죽으니 향년은 54세였다. 임천(林川)의 집 뒤에 있는 술좌(戌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대재는 효성과 우애가 남보다 뛰어나서 형과 누나를 항상 화기애애하게 모셨으며 분가(分家)할 때에도 형제들에게 많이 양보하고 자신은 조금만 가져갔다. 두 분 형이 먼저 죽었으므로 구수(丘嫂, 큰 형수(兄嫂)를 말함)를 받들고서 조상의 제사에 정성을 다하였으며, 아버지를 여읜 여러 조카들을 마치 자기 자식처럼 무양(撫養)하니, 이웃 사람들이 모두 감화되어 의심나는 일이 있을 때마다 찾아와 묻곤 하였다.
대체로 대재는 성품이 너그럽고 솔직하였으며 말수가 적어서 평소에 과격한 행동이나 남을 시기하여 해치려는 마음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믿고 사랑하였다. 일찍 부모를 여읜 이후로 강산(江山)을 유유자적하며 문 밖을 나가지 않고 조용히 지내면서 경적(經籍)을 폭넓게 보았다. 또 손수 여러 사책(史冊)에서 중요한 사실들을 베껴내어 10책으로 엮은 뒤에 이를 ≪사준(史雋)≫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그 가운데 정신을 몰두하고 이것을 낙으로 삼아 그 곤궁함을 잊고 지냈다. 그중에서도 주자(朱子)의 글을 가장 좋아하고 위기(爲己)의 학문에 마음을 두었는데, 항상 늦게서야 깨달아 성취하기가 어렵다고 탄식하곤 하였다. 그리고 젊었을 때 함께 지내던 동무들이 모두 현달한 관직에 있었으나 일찍이 그들에게 문안하는 편지조차 한 통 보낸 적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아무나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광주 정씨(光州鄭氏)는 고려 때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지낸 정신호(鄭臣扈)를 상조(上祖)로 삼는다. 아조(我朝)에 들어와서 현달한 관원을 계속 배출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응교(應敎) 정웅(鄭熊)은 중종조(中宗朝) 때에 검열(檢閱)로 재임하면서 소장(疏章)을 올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호)와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호)이 원통하게 죽은 일을 신원(伸寃)하도록 청하였으므로 사론(士論)이 옳게 여기었다. 증조(曾祖)는 정보문(鄭保門)인데 현감(縣監)이었고, 조(祖)는 정유(鄭維)인데 광해군(光海君) 때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인목 대비(仁穆大妃)를 유폐하자는 논의에 반대 의견을 제기하고 곧장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맨 먼저 수록(收錄)되어 벼슬이 배천 군수(白川郡守)에 이르렀다. 부친인 목사공은 젊었을 때에 높은 인망(人望)이 있어서 한 시대의 승류(勝類)들에게 추중을 받았고 만년에는 순리(循吏)로 이름이 났는데, 기사년(己巳年, 1689년 숙종 25년)에 사화(士禍)가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왔다. 선비(先妣)는 문화 유씨(文化柳氏)로 좌의정(左議政) 유양(柳亮)의 후손이며 감찰(監察) 유동발(柳東發)의 딸이다.
정 대재는 감사(監司) 홍위(洪葳)공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을 두었는데, 정오규(鄭五奎), 정오위(鄭五緯), 정오운(鄭五雲)이다. 장방(長房, 맏아들을 말함)은 2남 2녀를 낳았고, 중방(仲房, 둘째 아들을 말함)은 2남을 낳았으며, 계방(季房, 막내아들을 말함)은 2녀를 낳았다.
아! 대재는 재주와 행실로써 일찍부터 뛰어난 칭찬을 짊어졌으니 마땅히 명성을 세상에 크게 떨칠 듯하였는데, 끝내 그 뜻을 펴지 못하고 죽었으니, 천도(天道)를 알 수가 없다. 선(善)을 하는 자를 어떻게 권면하겠는가.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내가 일찍이 관찰하건대, 인(仁)을 쌓고 행실을 깨끗이 하고서도 그 보답을 누리지 못할 경우 반드시 그 후손을 크게 창성하게 하였으니, 근원이 깊으면 멀리까지 흘러가는 것이 이치의 떳떳함이다. 지금 정오규가 그 전해오는 가업을 이어서 사우(士友)들 사이에 이름이 알려졌으니, 하늘이 그 후손에게 넉넉하게 해준 것이 바로 여기에 있는가보다.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정오규(鄭五奎, 1678~1744) : 유학자, 호 삼회재(三悔齋), 노학재(老學齋) 일찍 수암 권선생 문하에서 배웠다. 이미 바로 이를 실천하고 이행했는데 이에 더해 경사와 백가의 서적에 더욱 정진하니 하늘과 사람의 성명근본에 대하여 궤 뚫지 못함이 없었다. 저서로는 「독서질의」와 「의례영언」이 있으며 유고가 남아있다. 소위 「병진초보」를 편찬하였는데 실로 우리 광주정씨의 최초 족보인데 발문을 썼다. 현손 구석이 묘지를 짓고 도암 이재가 묘표를 지었으며 퇴어 김진상이 글씨를 썼다 早師遂菴權先生門 路旣正踐履 益篤於經史 百家之書 天人性命之源 無不該貫 而究極著「讀書質疑」「疑禮零言」 又有遺稿 編纂所謂「丙辰初普」 實是我宗初普也書拔 玄孫龜錫述墓誌 陶菴李縡撰墓表 退漁金鎭商書 (족보) |
▪ 유인 남양홍씨 묘갈(孺人南陽洪氏墓碣) : 도암 이재(李縡)
孺人南陽洪氏墓碣
출전 : 陶菴先生(주1)集卷三十六 / 墓碣[六], 번역 정철중
鄭公敷葬于林川頒詔院。遂菴權公(주2)書其碣曰鍾崖處士字某之墓。婦洪氏泣而謂其子五奎曰。乃父生而志不就。得名儒表揚(주3)。其死猶不死也。越十有三年(주4)戊申洪氏卒。壽七十三。五奎遷處士墓而合祔于其傍幾十步。五奎旣免喪。謁銘于三州李縡曰。五奎母淸溪公(주5)之少女。淸溪公以文學鳴世。諸舅(주6)能業家。而姨母爲金副學萬吉(주7)夫人者。世所稱碩媛。母生長其間。略通古書大義。又工於女功。十九歸五奎先君。先大父牧使公𥳑嚴少可人。常曰吾賢婦。緦功之親(주8)咸萃一室。無大小無二口。治梱有法。至老克勤。被服儉而潔。截肉必方正。先君寡交遊。或有嘉客至則觴豆立辦。人不知其爲貧。待妾祖姑(주9)如姑。鞠孤姪(주10)若己子。以父家零替(주11)。常存矦夫人(주12)。百五之感(주13)。歲送乾豆助祭。薄榮貴安澹泊(주14)。一以承順(주15)夫子(주16)爲志。聞子弟讀史。有奸邪亂逆之事則爲之憤歎。或論斯文是非時事得失。語鑿鑿中理。性慈仁。雖昆蟲草木之微。不忍傷。於人無忮克。又未嘗一言其過惡。下至僕御(주17)之賤。莫不有恩。故其歿也。哭之者咸哀。又作曰吾母之賢若此。卒窮困以死。不得君子一言。吾無以見吾母於地下矣。縡悲其志。不能辭。淸溪公諱葳。南陽人。官止觀察使。其配德水李氏。牧使梣考也。夫人三男。具在處士公碣文。孫捄,掄及爲參議李匡德,士人李商重(주18)妻者 五奎出。擇 五緯出。餘皆幼。五奎嘗遊遂菴門。以文行稱。余又知夫人之敎成於家也。銘曰。
幼爲賢婦。老爲賢母。展也女士。我銘不朽。
정공 부(敷)는 임천(林川) 반조원(頒詔院)에 장사를 치뤘는데 수암(遂菴) 권공은 그 묘갈에 종애처사 자(字) 모지묘라 썼다. 부인 홍씨는 울면서 그 아들 오규(五奎)에게 말하기를, “아버지는 생전에 그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이름난 선비로서 표양(表揚)을 받으니 죽었어도 오히려 죽은 것이 아니다.” 하였다. 십년하고도 삼년을 지나 무신(戊申)년에 홍씨가 졸하니 나이가 73세이다. 오규(五奎)는 처사 묘를 옮기고 그 몇 십 보 곁에 합부(合祔)하였다.
오규는 상복을 벗고 삼주(三州) 이재(李縡)에게 묘명을 부탁했는데, (쓰기를) 오규의 모친은 청계공의 작은딸인데 청계공은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났다. 모든 외숙들도 가업을 이을 만했다. 이모는 부제학 김만길(金萬吉)의 부인이다. 세상에선 석원(碩媛)이라 불렀다. 모친은 오래 사셨다. 고서(古書)의 대략적인 뜻을 통했다. 또 여자로서 열심히 공부하여 열아홉에 오규의 남편에게 시집왔다.
시아버지(先大父) 목사공(牧使公 정시형 鄭時亨)은 대쪽같이 엄했고 융통이 적었는데 항상 우리 현부(賢婦)라고 말했다. 작은 일이라도 모두 한 방에 모여 크고 작음이 없고 다른 소리가 없었다. 문지방을 다스림에도 법도가 있어 나이 들도록 지극히 부지런하고 옷은 검소하게 입고 청결하였으며, 육 고기를 잘라도 방정하였다. 선군(남편 鄭敷)은 교유가 적었다. 간혹 반가운 손님을 맞을 땐 반드시 술을 내어 정성을 갖추었다. 사람들은 그 것을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할아버지 첩 시어머니(목사공의 측실)도 시어머니와 똑같이 대했다. 고아가 된 조카도 자기 자식처럼 길렀다. 친정집(父家)의 가세가 기울어 부인은 항시 시어머니께 부친의 안부를 물었다. 백오지감이 든다.
나이가 들었어도 제수를 말리고 도와 살폈다. 부귀와 영화와 동떨어졌으나 마음은 평안하고 욕심이 없었다. 오로지 남편의 뜻을 따랐다. 자식이 사서를 읽는 소리를 듣고 간신과 사특한 자와 난으로 세상이 뒤집어지는 일에 이르러서는 강개 한탄하였다. 혹은 사문의 잘잘못을 말할 때는 그 일의 득실을 논했다. 말은 핵심을 찌르고 그 중에 이치가 있었다. 성품은 자애롭고 인자하였다. 비록 곤충 초목 같은 미물이라도 해치는 것을 참지 못하였으니 사람에 대하여서야 마음 상하게 대함이 없었다. 그 잘못과 죄에 대하여는 한마디의 말도 올리지 않았다. 아래로 마부에 이르기까지 그 은혜를 입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돌아가심에 모두 울고 슬퍼하였다.
또 (남양홍씨) 말하기를, 나의 어머님의 현명함이 이와 같으신데, 곤궁하게 사시다 돌아가셨는데 군자일언은 못되지만, 지하에 계신 나의 어머니를 보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재(李縡)는 그 뜻을 슬퍼하며 글을 이을 수 없다.
청계공은 휘가 위(葳)이고 남양인(南陽人)으로 관직은 관찰사이다. 부인은 덕수이씨인데 부친은 목사 침(梣)이다.
부인은 삼남을 두었는데 모두 처사공 비문에 있다. 손자는 구(捄), 륜(掄)이고, 참의 이광덕(李匡德)과 사인(士人) 이상중(李商重)에 시집간 딸은 오규(五奎)의 자손이고, 오위(五緯)는 택(擇)을 낳았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오규는 수암 문하생으로 문행이 있다. 나는 집안에 부인의 가르침에 대하여 잘 안다.
명(銘)에 가로되, 젊어서는 현부(賢婦)이시고, 나이 들어서는 현모(賢母)이시며, 참으로 여성의 선비(女士)이시니 나는 비에 불후(不朽)함을 새기는 바이다.
주1) 이재(李縡) : 1680~1746, 조선후기 문신. 대제학, 공조판서
주2) 권상하(權尙夏) : 1641년∼1721년, 조선 후기의 학자
주3) 표양(表揚) : 드러내어 찬양(讚揚)함.
주4) 월십유삼년(越十有三年) : 종애공(1659년생)의 졸년은 임진년(1712년)으로 54세이고, 남양홍씨(1656년생) 졸년은 무신년
(1728년)으로 73세로서 월십유육년(越十有六年)이 맞다.
주5) 청계공(淸溪公) : 홍위(洪葳), 1620(광해군 12)∼1660(현종 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군실(君實), 호는 청계(淸溪)·창람(蒼嵐). 군수 홍익준(洪翼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숙(洪琡)이고, 아버지는 진사 홍원호(洪遠湖)이며, 어머니는 조정호(趙廷虎)의 딸이다. 조석윤(趙錫胤)의 문인이다. 1635년(인조 13) 진사시에 합격하고, 1649년(효종 즉위년) 성균관 유생으로서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묘종사를 여러 번 주청하였으므로 경상도 진사 유직(柳稷) 등 900여명으로부터 논박을 받아 한때 고향에 내려가 있었다. 1650년(효종 1)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설서·정언·지평을 거쳐, 1654년 부수찬, 이듬해 이조좌랑, 1656년 교리, 이듬해 동래부사가 되었다. 1658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모든 숙폐(宿弊)를 일소하고 밀려 있던 안건을 공정히 처리하였다. 이듬해 동부승지가 되었다. 언행이 질실하여 공담(空談)이 없었으며, 계주(啓奏)에 힘써 전후 장소(章疏)가 수만언에 이르렀다 한다. 저서로는 『청계집』 8권이 있다. 판서에 추증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묘소 : 처음에는 광주부(廣州府) 서쪽에 장사지냈다가 1686년(숙종 12) 경기도 양주 선영으로 이장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정확한 위치는 전해지지 않는다. |
주6) 외숙 : 홍무(洪茂), 1635년 을해 증광시 진사(進士), 청계공의 형으로 동방(同榜)이다.
주7) 김만길(金萬吉) : 1645~?, 부제학, 전라도관찰사, 이조참의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자적(子迪). 형조참판 김장생(金長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판 김반(金槃)이고, 아버지는 승문원 부정자 김익후(金益煦)이며, 어머니는 심정화(沈廷和)의 딸이다. 1682년(숙종 8) 주부로서 춘당대 문과(春塘臺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지평이 된 뒤 정언·부교리·부수찬·교리·수찬을 지냈고, 1688년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1689년 3월 숙부 김익훈(金益勳)의 신원을 위해 사판(仕板) 삭제를 청하다가 변방으로 귀양갔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등용되어 동부승지가 되고 부제학·전라도관찰사를 거쳐 1697년 이조참의가 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주8) 시공(緦功) : 시마(緦麻)와 소공(小功)을 아울러 이르는 말.
* 시마(緦麻) : 상복(喪服)의 하나. 가는 베로 만들어 종증조(從曾組)ㆍ삼종 형제(三從兄弟)ㆍ중증손(衆曾孫)ㆍ중현손(衆玄孫)의
상사(喪事)에 석 달 동안 입는 복(服).
* 소공(小功) : 1. 5복(服)의 하나. 소공친(小功親)의 상사(喪事)에 다섯 달 동안 입는 복제(服制). 가는 베로 지음. 2. 작은 공(功).
조그마한 공로(功勞).
* 시소공지찰(緦小功之察) : 「부모(父母)의 상복(喪服)보다 시마(緦麻)나 소공(小功)을 더 중(重)히 여긴다.」는 뜻으로, 큰일은 깨
닫지 못하고 작은 일에만 골몰(汨沒)함을 비유(比喩ㆍ譬喩)하여 이르는 말.
주9) 목사공은 문화류씨(문화류씨 1617~1688)에게서 4남 1녀, 측실(側室)에서 3녀를 낳았는데, 김응명(金應明), 이신저(李信著),
심상충(沈尙忠)에게 각각 시집갔다.
주10) 고질(孤姪) : 고아가 된 조카가 누구일까? 금산군수 시경(時卿) 공의 장남 창의 2남 오훈, 오기가 아닌지?, 창과 배우자 영
산신씨의 졸년이 없고 기일만 족보에 기록되었다.
주11) 영체(零替) : 권세(權勢)나 살림이 줄어서 보잘것없이 됨
주12) 후부인(矦夫人) : 시어머니로 보인다. 출가외인이므로 친정집 소식을 시아버지나 시어머니를 통해 들을 수 있다.
주13) 백오지감(百五之感) : ?
주14) 담박(澹泊) : 淡泊 澹泊, 욕심(慾心)이 없고 마음이 깨끗함. 맛이나 빛이 산뜻함
주15) 승순(承順) : 웃어른의 명령(命令)을 좇음.
주16) 부자(夫子) : 1 덕행(德行)이 높아 모든 사람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의 높임말. 2 남편(男便)의 높임말. 3 공자(孔子)의 높임
말.
주17) 복어(僕御) : 말을 다루는 사람. 마차 앞에 타고 말을 모는 하인
주18) 이상중(李商重) : 1753년(영조29년) 선공감감역(繕工假監役), 1754년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 사간(司諫),
1756년(영주32년) 흡곡현령(歙谷縣令), 1759년 순창군수(淳昌郡守), 1766년(영조42년) 익찬(翊贊 : 왕세자(王世子)를 호위
(護衛)하던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에 딸린 정육품(正六品)의 무관(武官) 벼슬. 좌우 익찬이 한 명씩 있었음.) (승정원일기)
▪ 이재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희경(熙卿), 호는 도암(陶菴)·한천(寒泉). 유겸(有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숙(䎘)이고, 아버지는 진사 만창(晩昌)이며, 어머니는 민유중(閔維重)의 딸이다.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이다.
1702년(숙종 28)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예문관검열이 되어 ≪단종실록≫ 부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705년 사서가 되어 1707년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문학·정언·병조정랑을 거쳐, 홍문관부교리에 임명되었다. 1709년 헌납·이조좌랑·북평사를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위해 젊고 재능있는 관료에게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휴가를 내리던 제도)했다.
1712년 장악원정·수원도호부사, 1713년 형조참의·대사성, 1715년 병조참의·예조참의를 거쳐 다음해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어 호조참의를 거쳐 부제학이 되었을 때 ≪가례원류 家禮源流≫의 편찬자를 둘러싸고 시비가 일자 노론의 입장에서 소론을 공격하였다. 이후 노론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1719년 형조참판·승문원제조·부교리 등을 거쳐 경상도에 균전사(均田使)로 파견된 뒤 당면한 토지 정책을 논하다가 파직되었으며 이듬 해 함경도관찰사가 되었다.
1721년(경종 1) 대사헌·동지춘추관사를 겸하다가 실록청당상에 임명되었고, 이조참판에 제수되면서 실록청도청당상으로 승진하였다. 같은 해 예조참판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으나 소론의 집권으로 삭직되었다.
1722년 임인옥사 때 중부 만성(晩成)이 옥사하자 은퇴하고, 인제에 들어가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1725년(영조 1) 영조가 즉위한 뒤 부제학에 복직해 대제학·이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대제학에 재임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 중심의 정국이 되자 문외출송(門外黜送 : 서울 성문 밖으로 쫓겨남)되었으며, 이후 용인의 한천(寒泉)에 거주하면서 많은 학자를 길러냈다. 1740년 공조판서, 1741년 좌참찬 겸 예문관제학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였다.
의리론(義理論)을 들어 영조의 탕평책을 부정한 노론 가운데 준론(峻論)의 대표적 인물로, 윤봉구(尹鳳九)·송명흠(宋命欽)·김양행(金亮行) 등과 함께 당시의 정국 전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의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는 이간(李柬)의 학설을 계승해 한원진(韓元震) 등의 심성설(心性說)을 반박하는 낙론의 입장에 섰다.
예학(禮學)에도 밝아 많은 저술을 편찬하였다. 용인의 한천서원(寒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도암집 陶菴集≫·≪도암과시 陶菴科詩≫·≪사례편람 四禮便覽≫·≪어류초절 語類抄節≫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권상하
서울 출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치도(致道), 호는 수암(遂菴)·한수재(寒水齋). 아버지는 집의 격(格)이며, 동생은 우참찬상유(尙游)이다.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이이·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정통 계승자이며,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인 호락논변(湖洛論辨)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660년(현종1)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668년 스승 송시열이 좌의정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우의정을 사직하자 유임(留任)시킬 것을 상소하였다. 1674년(숙종 즉위년)에는 1659년(효종 10) 효종의 승하 시에 있었던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 문제가 다시 발생하여, 송시열은 관작을 박탈당하고 덕원(德源)에 유배되는 불운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남인의 정권에서는 관계에 진출하는 것을 단념하고 청풍의 산중에 은거하며 학문과 교육에 전념할 것을 결심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자 송시열은 다시 제주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이 유배지에서 달아나거나 외부 사람들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두던 일)되고, 이어서 사약(賜藥)을 받게 되었다. 그는 유배지로 달려가 스승의 임종을 지켰으며, 의복과 서적 등의 유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 후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괴산 화양동(華陽洞)에 만동묘(萬東廟)와 대보단(大報壇)을 세워 명나라 신종(神宗: 임진왜란 때 군대를 파견하였음)과 의종(毅宗: 나라가 망하자 자살함)을 제향하였다.
1703년 찬선(贊善), 이듬해 호조참판에 이어 1716년까지 13년간 해마다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며, 그 밖에도 1705년 이조참판과 찬선, 1712년 판윤과 이조판서, 1717년 좌찬성·우의정·좌의정, 1721년(경종1)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나가지 않았다.
그는 16세기에 정립된 이황과 이이의 이론 중 이이-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하고, 그의 문인들에 의해 전개되는 이른바 호락논변(湖洛論辨)이라는 학술토론 문화를 일으키는 계기를 주었다.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동이논쟁(同異論爭)인 호락논변이 제자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 사이에 제기되자 ‘인성이 물성과 다른 것은 기(氣)의 국(局)때문이며, 인리(人理)가 곧 물리(物理)인 것은 이(理)의 통(通)때문이다.’고 한 이이의 이통기국(理通氣局)설을 들어 한원진의 상이론(相異論)에 동조하였다. 인성·물성 상이론의 발상은 후천적인 기질의 다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본성을 동물성으로부터 분별하고 보호하려는 데 있었다.
이처럼 본성의 문제를 물성과 관련하여 이해하려는 태도는 인성론이 자연물에까지 확대된 형이상학적 전개로서, 이황·이이 이래 조선 성리학의 이론적 발전상을 보여준다. 또한 17세기 이후 성리학이 예학(禮學)에 의해 구체적인 사회 규범으로써 경직되어가는 학문 풍토에서 인성·물성 상이론의 제기는 예학적 학문 이론을 활성화하고 심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이단하(李端夏)·박세채(朴世采)·김창협 등과 교유했으며, 문하에서 배출된 제자로는 한원진·이간·윤봉구(尹鳳九)·채지홍(蔡之洪)·이이근(李頤根)·현상벽(玄尙璧)·최징후(崔徵厚)·성만징(成晩徵) 등의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가 있다.
글씨에 능하여 「기백이태연표(箕伯李泰淵表)」·「형참권극화표(刑參權克和表)」·「부사과이숙표(副司果李塾表)」 등의 작품을 남겼다. 저서로는 『한수재집』·『삼서집의(三書輯疑)』 등이 있다. 이 중 『한수재집』은 1979년 양장으로 영인되어 간행되었으며, 가전되던 영정을 수록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첫댓글 감사합니다.
카페지기 부재중이 오래되어 걱정했는데, 대부님 돌아오셨네요! 감사합니다.
현감공(휘 보문) 후손 분들 중, 위 선조공의 묘소나 유물사진 있으시면 게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행히 소종에서 문집 등을 번역하여 책으로 낸다하니 반갑습니다.
유물집, 금서축, 서래만영, 동유기문은 가책자로 인쇄해서 교정을 보았고, 여기에 게시된 여러가지 글들도 교정을 보고 보완하여 향후에 가칭 '광주세설'이라는 책자로 엮어볼 생각입니다. 이밖에도 강릉부읍람이라는 조선후기 강릉부의 재정, 세제, 요역자료를 번역할 계획인데 무척 어렵습니다.
족숙께서 주신 책 잘받았습니다
저희집안 선대의 비문임으로 정말 잘보았습니다
늘 건안하시길 앙망합니다
족질 사강 정윤칠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