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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진산 용진정사
호남 의병활동의 본거지
일제강점기의 용진정사는 한말의 도학자 후석 오준선(1851∼1931)이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자 망국의 한을 달래면서 용진산에 강당을 짓고 후진 양성에 힘쓴 곳으로서 한말 호남 의병활동의 본거지이기도 하였다. 정사는 학문을 가르치거나 정신을 수련하기 위해 마련한 집을 뜻한다. 용진정사는 용진산 남쪽의 산록에 자리잡고 있다. 절이 허물어진 뒤 청안 이씨들이 그 터를 가지고 있었으나, 후석이 정사를 짓는다는 말을 전해듣고 옛 절터의 상대와 중대를 희사함으로써 정사를 지을 수 있었다. 후석이 별세한 뒤 문인들이 정사 동쪽에 3칸의 용진영당을 세우고 1924년 석지 채용신이 그린 초상화를 모셨다. 영당의 좌우벽에는 큰아들 북파 오헌수와 둘째 아들 도호 오동수의 영정이 함께 걸려있다.
일제강점기의 의병, 후석 오준선
후석은 본관이 나주이며 광산구 도덕동 도림마을에서 오하규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백부 향규에게 입양되었다. 8세 때부터 이웃에 사는 친척 오태규로부터 사서와 근사록을 배웠다. 이어 18세 때부터 노사 기정진에게 배웠으며, 이를 계기로 송사 기우만, 식재 기재, 현와 고광선 등과 사귀었고, 전재 임헌회, 입재 송근수 등에게서 학문의 폭을 넓혔다. 그의 학문 체계는 경학, 성리학, 예학, 의리론 등의 영역에서 찾을 수 있다. 1910년 일제는 명사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은사금이라는 금품을 지급하려 하였는데, 이를 거절하자 헌병대로 끌려 가 갖은 협박을 가했으나 끝내 받기를 거절하였다. 이후 1917년 용진산에 들어가 193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후학을 가르치니, 문하생이 600여명에 이르렀다. 1919년 고종이 승하 하시자 문하생들과 용진정사 앞의 바위에서 통곡하였는데, 그뒤 이 바위를 읍궁암이라 불렀고, 원수를 갚기 전에는 상복을 벗을 수 없다하여 일생동안 백립을 쓰고 지냈다. 명정에 조선 유민이라 쓰도록 유언하였다. 1934년에 그의 학문적 체계를 정리한 문집 25권 12책이 간행되었다.
용진정사는 용진산으로 향하는 산행길 초입에 자리하고 있다. 단정한 듯 숲 속에 파묻힌 이곳 용진정사는 우리의 의병역사를 아우르는 자랑스러운 역사가 스며있는 곳이다. 직접 찾아가 본 용진정사는 오랜 세월이 흘러 빛바랜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단정하고 굳건한 모습으로 찾아오는 이들을 반기는 듯 했다. 광산구가 한말 호남 의병의 중심무대였다면 이곳 용진정사는 수많은 광산의병, 나아가 호남의병을 길러낸 산실이었다. 용진정사는 한말의 도학자 후석 오준선이 나라가 병탄되자 망국의 한을 달래면서 용진산에 강당을 짓고 후학을 가르쳤던 곳으로 17년간 오준선이 경영한 용진정사는 세 칸짜리 소담스러운 한옥강당이다.
후석 오준선은 이곳으로 몰려든 유생들에게 ‘나라가 어지러울수록 지극한 선(善)의 발현이 요청된다’는 사상을 강조했고 배움을 바탕으로 의병들은 구국활동에 힘썼다. 후석 오준선은 1910년 일제는 명사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은사금이라는 금품을 지급하여 하였는데, 이를 거절하여 헌병대에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오준선은 이곳 용진정사에서 의병장들의 생애를 기록한 ‘의병전’을 지었다. 이 ‘의전’에는 기삼연, 고광순, 김준병 등 굵직한 의병장들의 활동이 상세하게 실려있다. 이곳은 삼봉 정도전, 우암 송시열 등도 다녀갔던 곳으로 전해진다.
용진산(聳珍山 349m)은 광주 서쪽을 흐르는 황룡강 건너 장성군과 경계를 이 루는 산이다. 봉우리는 암반으로 뾰족하게 생겼으며 2개의 쌍봉이 남북으로 마주 보고 있다. 남쪽 봉우리를 석봉(石峰), 북쪽 봉우리를 토봉(土峰)이라 부르는데, 두 봉우리 사이의 고개 를 배가 넘어간다고 ‘배넘어재’라 부른다. 이름 그대로 들녘에서는 드물게 보는 겹겹으로 포 개져 있는 산으로 산 정상에 있는 뾰족한 암석이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 있는 모습에서 유래 된 지명이다.
►우제봉(雨祭峰338.3m 石峰)은 비가 오지 않을 때 제(祭)를 지냈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최고봉인 용진산(聳珍山351m 土峰)은 솟은 모양 ‘솟돌뫼’를 한자로 표기해 용진산(聳珍山)이 되었다. 봉우리 뾰족한 산을 풍수에서 화산(火山)이라 하고, 문(文)으로 풀면 붓 모양 필봉(筆 峰)이다. 또 무(武)로 보면 창이나 칼이 된다.
►산 안에는 동굴과 폭포가 있고 조선의 개국 공신 삼봉 정도전 선생이 전국을 두루 돌면서 이산의 빼어난 경치에 빠져서 산사에서 며칠을 머물다 갔다 하니 그 그윽하고 아름다운 풍광 을 가히 짐작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이 산은 왜정 때에 전국에서도 이름 있는 금광이 있었던 곳으로 그로 말미암아 신임곡 일대는 작은 도시 형태를 이루어 번창한 때가 있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경치 말고 값진 문화유산이 많은데 그중 하나인 여래석불은 4백 년의 오랜 역사를 간직한 가학정(駕鶴亭)으로 가는 길목에 깎아지른 듯한 높은 암벽에 미소를 짓는 자비로운 얼굴의 석가모니 여래상이 새겨져 있다. 그 속에 쓰여진 불당일월 (佛堂日月) 용진수석(聳珍 水石)의 글씨가 또한 명필이며 그 밑에 열길 낭떠러지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는 한여름 무더 위를 말끔히 씻어준다.
•가학정(駕鶴亭): 임진왜란 때 벼슬도 없이 선조를 모시고 북쪽으로 피란 간 공로로 박경이 임금에게 죽림처사의 시호와 함께 하사받은 정자다. 북쪽엔 황룡강 맑은 물이 사시사철 흐른 다. 그 길목에는 노송과 비자나무, 싸리나무, 상수리나무, 산비장이 등 갖가지 잡목이 우거져 푸른 숲을 이루며 곳곳에 단애를 이룬 암벽이 솟아 있어 소금강을 방불케 한다.
• 용진정사(湧珍精舍): 중국매화, 치자나무, 벚나무의 울창한 숲이 우거진 이 산의 남쪽 골 짜기에 자리한 용진정사는 조선 말 대학자이며 애국지사인 후석 오준선이 국난과 속세를 떠 나 후진을 양성 하던 곳이다. 기암괴석이 자연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이곳은 광산, 나주 출신의 한말 의병들의 근거지로, 면암 최익현과 전해산, 김태원, 오상렬, 오성술 장군 등 쟁 쟁한 의병장들이 구국의 일념으로 오준선과 항일전략을 세우고 의논했던 곳이다.
용진산 토봉,최고높이 351m▼
용진산 석봉▼
하마바위▼
멀리 무등산과 광주시내가 보인다 ▼
용진정사, 광주시 문화재 7호▼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