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하고 화려한 옷 입고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곱디곱다. 그림 가운데 소담한 꽃들과 드레스 입은 여인들이 하얗게 하나다. 나무에 꽃이 피어있고, 꽃이 걷고, 꽃이 앉아있고, 꽃이 말한다. 나무 사이로 드러난 하늘엔 꽃같이 하얀 구름이 흐른다. 정원에 난 길도 꽃과 어울려 하얗다. 흰 길 위로 그림자가 발끝을 내밀어보지만, 하얀 꽃길을 더 이상 범하지 못한다.
모네(Claude Monet,1840~1926)가 그린 하얀 꽃 같은 여인들은 그의 아내가 될 ‘카미유’라고 한다. 카미유가 위치를 달리해 자세를 취해주었다. 모델이었다가 아내가 될 카미유는 모네에게 분명 봄을 증명하는 하얀 꽃이었겠다. 아름다운 꽃,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장면, 아름다운 옷이다.
산업혁명은 방직공업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중세 귀족이 입던 드레스를 중산층들도 입을 수 있게 됐다. 풍요로운 시대를 맞게 된 것이다. 풍요로운 시대, 아름다운 계절 봄에, 예쁜 옷을 입은 여인들과, 사랑하게 될 모델을 그리는 천재 화가의 작품이다. 보고 있으면 따뜻하고 기분 좋은 그림이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모네였으나, 이 그림을 완성하는데 다른 방식으로 기여한 사람들이 있었다. 꽃같이 하얀 풍성한 드레스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중산층 숙녀들의 한껏 부풀린 드레스에 필요한 직물은 아동과 여성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해 생산되었고...시골이나 소도시에서 올라온 젊은 여성, 남편이 죽었거나 남편에게 쫓겨난 기혼 여성, 몸을 망치고 쫓겨난 하녀”들이다.
산업혁명 때 영국에선 시장에서 내다 팔 양과 곡물을 키우기 위해 울타리를 치고 농민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 버렸다. 양을 키워 털과 젖을 얻고, 농사를 지어 밀을 수확했던 농민들은 더 이상 농촌에서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도시로 이주하게 되었다. 털을 깎고 젖을 짜고 밭을 일구던 농부의 딸들은 도시에서 방직공장에서 만든 천으로 옷을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다. 한창 바쁜 4월부터 7월엔 20시간 씩 재봉틀을 돌렸다고 한다.
밤을 샜을까. 얇고 소박한 커텐을 통과한 햇빛이 얼굴을 쓰다듬는데 잠이 깊다. 당시에 커피는 무척 비싸서, 잠을 깨기 위해 치커리 차를 마셨다. 받침도 없는 작은 찻잔이 재봉틀 바늘에 손가락이 박히지 않도록 밤새 옆자리에 앉아 지켜주었겠다. 지금도 하얀 찻잔은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 있다.
조금 지나면 15분 만에 아침 식사를 마치고 다시 일해야 한다. 젊다 못해 어린 여성이 하루 20시간씩 재봉틀을 돌려 만든 드레스가 모네의 그림 속에서 하얗게 곱디 고왔던 것이다. 정작 재봉틀을 돌려 옷을 만든 여성은 꽃같이 하얀 드레스를 입을 수 없다. 시골에선 털을 깎으면 따뜻했고 젖을 짜고 농사를 지으면 배불렀지만 도시에선 드레스를 만들어도 드레스를 입을 수 없다. 드레스를 만드는 여인은 드레스의 주인이 될 수 없다. 드레스를 만들지 않는 사람들이라야 드레스를 입을 수 있다. 산업혁명은 혁명이 아니다.
봄이 왔지만, 재봉틀을 돌리는 여인은 꽃을 볼 수 없다. 꽃이 될 수 없다. 다만 봄빛이 들어오는 창문이 있다. 창문의 크기가 하늘의 크기요, 세상의 크기다. 재봉사에겐 하늘도 작고, 세상도 좁다. 작은 창문을 통해 들이닥친 햇빛이 잠든 재봉사의 얼굴을 애무한다.
서구 중산층 여성들의 곱디 고운 드레스를 다시 하얗게 빛나게 하는 세탁부가 있었다. 세탁부는 속옷, 페티코트, 장식과 레이스를 빨고 다림질했다. 세탁부가 일하는 “작업장은 항상 수증기와 열기로 가득했고, 불타는 석탄을 넣어 사용하는 다리미에서 일산화탄소가 계속해서 나왔다. 쉽게 말해 세탁부들은 연탄가스를 들이마시며 온종일 일”했다.
다림질을 하다가 잠깐 짬이 났을까. 이마로 내려온 머리카락 사이로 창밖을 응시하는 눈빛이 간절하다. 로트렉(Toulouse-Lautrec, 1864-1901)은 세탁부의 눈을 보여주지 않은 채 눈빛을 그려 보인다. 화가는 눈을 그리지 않고도 눈빛을 보여준다. 손목 까지 내려오는 소매를 걷어 붙이고 일하다보면, 자꾸 내려와 이마를 덮는 머리카락을 올릴 새도 없지만, 창문으로 연결된 세상을 향한 눈빛을 거둘 순 없다. 창문의 크기가 세상의 크기다.
하얀 빛이 창문으로 들어와 세탁부의 옷을 하얗게 비춘다. 봄날, 꽃처럼 걷고 꽃처럼 앉고 꽃처럼 말하는 중산층 여인들이 입은 하얀 드레스는 아니지만, 세탁부의 셔츠가 하얗고 환하다. 작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하얀 빛이 있어, 세탁부의 옷도 드레스마냥 하얗게 곱다.
이사를 앞 둔 사람을 위해 마루를 깎는다. 마루 틈새에 낀 먼지나 돌도 꺼내고, 헐거워져 나무가 들뜬 자리엔 못을 박는다. 마루를 깎으면서, 먼지를 빼고 못을 받는다. 평평하고 단단하게 바닥을 정비하고 있다. 마루를 깎는 이유는 묵은 때를 벗겨내는 것만은 아닌 것이다.
마루를 깎기 위해 웃통을 벗은 인부들의 근육이 아름답다. 노동으로 얻은 잔 근육으로 덮인 몸은 땅 위로 드러난 나무뿌리 같다. 땅을 움켜 쥔 나무뿌리처럼 인부들은 바닥에 붙어 자기 근육을 빚어왔고, 늘 이렇게 바닥에 뿌리를 박아 양분을 끌어올린다. 일하는 인부들의 몸이 지쳐 보이지 않는다. 늘 있었던 자리를 지키며 땅 위에 뿌리 내린 나무처럼 바닥 위에서 인부들은 자연스럽고 단단하다.
나무뿌리 같이 단단한 근육을 빛이 비춘다. 작은 창은 단조로 꾸며져 있어 들어오는 빛에 무늬가 새겨지고, 단조를 통과한 빛은 인부들의 몸을 매끈하게 비춘다. 극장 무대 위 배우를 비추는 조명처럼 창문으로 빛이 들어오고, 인부들은 무늬 새겨진 빛을 조명 삼아 마루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 같다. 어떤 작위도 허식도 없는 공연이 끝나면, 무대는 평평하고 단단해질 것이다. 더 좋아진 무대 같은 마루에서 누군가 다시 빛을 받으며 일상을 살 것이다. 인부들의 공연으로 마루로 짠 무대는 다시 완성된다.
하루 20시간 일하던 재봉사에게, 증기와 일산화탄소에 둘러싸인 세탁부에게, 바닥에 엎드린 인부들에게 창문이 있다. 가난하고 갇힌 사람들에게 세상은 닫혀있지만, 거기에도 빛이 있다. 창문을 통해 빛이 들어온다. 창문의 크기가 세상의 크기다. 작은 세상에 가난한 사람들이 산다.
작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한 줌이요 한 순간이지만, 빛과 함께 하루가 열린다. 가난하고 갇힌 사람들에게 창문의 크기는 작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하루의 크기는 같다. 창문의 크기는 달라도 하루의 크기는 같다. 그래야 한다. 작은 창문을 통해 빛이 작은 사람들에게 들이 닥치면, 거기에도 “빛이 있으라” 하시면, 항상 첫 날이다.
글/ 김영준